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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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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향원익청
이웃들의 온기를 되살려야 했다. 어렵고 힘들 때 가장 먼저 도와줄 사람은 이웃이고 마을 아닌가. 추운 겨울 밖에서 돌아온 이들이 가장 먼저 찾는 것이 따듯한 아랫목이듯, 유가족이 돌아올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이웃의 배려와 온기다. 그런 이웃을 되살리는 공간이 ‘쉼과 힘’이다. 갈숲이 우수수 떠는가 싶더니, 한 무리 새들이 오른다. 끼룩끼룩, 꾸~꾸~ 호수를 한 바퀴 돌고는 날아간다. 언제나 자유로웠고, 비상하고 싶었던 아이들. 돌아올 수 없는 하늘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부모, 형제, 친구들은 남은 이웃에게 맡기고. 갈꽃이 하얗게 손을 흔든다. 안녕…. 시화호는 물고기 한마리 살 수 없고, 찾아온 철새는 주검이 되는 곳이었다. 인간의 탐욕은 물길을 막아 저들의 재산을 늘리려 했다. 물길이 막히며 호수는 썩었고, 물짐승 날짐승 그리고 사람도 그곳을 떠났다. 주검의 늪. 결국 둑 일부를 허물었고, 물이 유통되면서 호수는 살아나기 시작했다. 호수 기슭에 갈대숲이 조성되기 시작했고, 갈대는 죽어가는 물과 펄을 조금씩 정화했다. 이제 물고기가 돌아오고, 새들이 돌아왔다. 끝없이 펼쳐지는 갈대밭, 함께 있어 행복한 갈꽃. 안산의 가난한 이웃들을 닮았다. 고잔1동, 와동, 선부3동은 통곡의 거리였다. 이웃들은 마주치면 울었고, 돌아서서는 오열했다. 신약성서의 기자 마태오는 헤로데의 욕망에 의해 2살 이하 어린이가 몰살당하는 것을 보고는 일찍이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라헬의 통곡을 떠올렸다. 그 슬픔이, 그 통곡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희생된 아이들이 모여 살던 세 마을은 현재진행중인 통곡의 땅이었다. ‘이웃’에서 10분 거리의 안산 와동일치의모후성당. 희생된 아이들 대부분이 다녔을 와동초와 와동중 중간쯤에 있다. 이 성당에선 고등부 학생 13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사고 후 119에 가장 먼저 신고했던 최덕하군도 활기차고 명랑한 고등부 학생이었다. 최군의 신고는 희생자를 줄였지만, 최군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 옛날 유다 땅의 어머니들이 그랬을까, 이후 일치의모후성당은 눈물의 성당이 되었다. 아이들을 생각하며 통곡했고, 그 부모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며 눈물지었다. 매일 계속된 미사는 눈물로 진행됐다. 고 김웅기군의 아버지, 고 이승현군의 아버지와 누나가 십자가를 지고 팽목항을 거쳐 대전까지 순례의 길을 떠난 건 그런 배경에서였다. 살아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으니 무엇이든 해야 했다. 도대체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지 묻고도 싶었을 것이다. 두 아버지는 팽목항을 거쳐 대전에 도착해, 마침 아시아청년대회에 참석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십자가를 전했다. ‘주의 고통을 잊지 않듯이 저희들 고통도 잊지 마소서.’ 성당 전면엔 ‘주님,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모든 이들을 기억하소서’ 펼침막이 있고, 눈물의 성모상이 그 위에서 굽어보신다. 와동성당은 모든 이웃들이 함께 쉬고, 위로하고 위로받는 공간을 조성해 11월 문을 연다. 단원고등학교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 안산중앙공원 기슭엔 새로운 둥지가 하나 더 생겼다. ‘우리 함께’. 참사 이후 안산의 사회복지사들은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무엇보다 살아 돌아온 아이들과 남은 가족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구조된 뒤 자책감에 목숨을 끊은 교감 선생님을 보고는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남은 이들은 벼랑 밖으로 한발 내밀고 있었다. 돌아온 아이들과 가족들을 2차 침몰로부터 막아야 했다. 각자 맡은 가정을 매일 방문해 유가족, 형제자매들과 생활을 함께하다시피 했다. 밥 짓고, 함께 먹고, 함께 차 마시고…. 이제 그들은 누구보다 더 가까운 이웃, 형제자매가 되었다. 그런 이들이 부대끼는 공간이 ‘우리 함께’다. 단원고 정문 앞엔 안산 명성교회(감리교)가 있다. 괴이한 서울의 명성교회와는 전혀 무관하다. 그곳 고등부 학생도 8명이나 희생됐다. 관리 담당 안수집사의 아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부터 교회의 모든 예배, 모든 순서는 통곡에 묻혔다. 김흥선 담임목사는 먼저 교회를 이웃들에게 개방했다. 추도하고 기도하고, 치유하고 위로하는 것이라면 어떤 모임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힐링센터 ‘0416 쉼과 힘’을 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반 가정의 이웃들이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고통과 슬픔의 그물에서 벗어나고 싶어했습니다. ‘결국 보상을 받고 나면 이곳을 떠날 것 아니냐’면서 마음의 문을 닫으려 하는 이들도 생겼죠. 힘들어하는 이웃들의 모습은 유가족들에게 더 큰 고통이었죠.”(임남희 쉼과 힘 사무국장) 이웃들의 온기를 되살려야 했다. 결국 어렵고 힘들 때 가장 먼저 도와줄 사람은 이웃이고 마을 아닌가. 추운 겨울 밖에서 돌아온 이들이 가장 먼저 찾는 것이 따듯한 아랫목이듯, 유가족이 돌아올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이웃의 배려와 온기다. 그런 이웃을 되살리는 공간이 쉼과 힘이다. 단원고는 비록 가난했지만, 다양한 특기적성 활동을 지원하고, 그래서 동아리 활동이 특별하고 선생님들도 자상하기로 소문이 났다. 박예슬, 빈하영, 이보미 등 희생당한 아이들의 다재다능은 그런 토양에서 나왔다. 기억저장소의 오혜란씨는 단원고에 가겠다는 딸아이의 성화 때문에 이곳으로 이사 왔다. 그러나 지금 단원고에선 동아리들의 부산스러움이나 웃음 따위가 들리지 않는다. 섣부른 이들이 찾아와 아이들 마음을 헤집지 않도록 항상 출입을 엄격히 단속한다. 그런 학교 안을 훤히 볼 수 있는 곳이 교회 부속건물 옥상이다. 그곳에서 이웃들은 아이들의 축 늘어진 어깨, 혼이 빠져나간 얼굴, 돌연한 눈물과 오열을 숨죽이며 지켜본다. 원고잔공원을 왼쪽에 끼고 10여분 걷다 보면, 삼두빌라가 나오고 상가 건물 한켠에 416기억저장소(1호)가 들어서 있다. 탐욕스런 사람들, 탐욕을 버릴 수 없는 사람들은 잊자고 하지만, 그 탐욕의 먹이가 됐고 또 먹이가 될 이들은 잊을 수 없다. 그래서 관련된 모든 기록, 영상, 그림, 자료, 리본, 만장, 대화 등을 모으기로 했고, 시민들이 한푼 두푼 모아 40평의 작은 공간에 1호 저장소를 마련했다. 김종천 사무국장은 참사 소식을 듣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날 저녁부터 촛불 들고 거리로 나가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던 중 잊지 않게 하는 것, 그 모든 걸 남기는 게 저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영상 제작자였다. 3등 항해사였던 김태옥씨는 참사 당시 제주항에 정박했던 거제~제주 여객선 브리지에 있었다. 무전기에선 뜻하지 않게 참사 현장에 있던 민간 선박 탑승자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승객들이 안 나오는 거야.” “저러다가 다 죽는 거 아니야.” “해경은 뭐 하는 거지.” 구조하러 접근했던 어부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후 김씨는 배에서 내렸고, 기억저장소의 궂은일을 도맡았다. “그분들의 시간은 아직 4월16일에 멈춰 있습니다. 아이들이 19일 돌아오기로 했는데, 아무리 해와 달이 뜨고 져도 19일은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갈수록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아이들처럼 아직도 차가운 바닷속에 갇혀 있습니다.”(이명수 실장) “쌍용차, 용산참사의 피해자들과도 함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도 잘 이겨낼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버티기 힘들었습니다.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는 유가족의 호소에 돌아오는 것은 온갖 거짓과 왜곡과 욕지거리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더 깊은 상처를 입고 돌아오는 유가족을 바라보기 힘들었습니다.”(정혜신 박사) 그러나 버텨야 했다. 유가족은 한발은 벼랑에 두고, 다른 한발은 허공으로 내민 상태에서 누군가 잡아줄 손길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이웃’엔 한의사도 있고 요리사도 있고 말동무도 있지만, 더 특별한 사람이 있다. ‘내 곁에 사람이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건 신체적 접촉을 통해서입니다. 유족들에게 처음으로 체온을 전해주는 사람, 악몽에 허덕이는 저희들의 손을 잡아주는 일을 하는 이웃이 바로 마사지사입니다.’ 기억저장소를 나서면 곧 화정천이고, 건너편에 화랑유원지 호수가 있다. 대부분 갈대로 덮여 있다. 피기 시작한 하얀 갈꽃이 붉은 저녁놀 속에서 흔들린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불지 않아도 흔들린다. 서로 기대어, 서로 몸을 부비며 수수댄다. 흩어져 날리는 갈꽃이 눈물처럼 슬프다. 갈꽃 위에 부서지는 햇살은 웃음처럼 눈부시다. ‘이웃’이란 저러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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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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