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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2.10 18:53 수정 : 2015.02.10 20:57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염세주의 시절 청년 고은에게 모래내시장은 “어떤 인문적인 파편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곳”이었다. 오로지 “사고파는 것만이 생존의 이유가 되는 현실을 확인하는” 곳이었다.(<나의 산하, 나의 삶>) 삶은 고됐지만, 인정은 따듯했다.

마지막 남은 모래내 시장통이 억센 아낙네처럼 버티고 있지만, 이곳에도 27층짜리 주상복합 건물 3동이 들어선다. 1, 2층을 상가로 쓴다지만, 가난한 모래내 상인들이 들어설 공간은 없을 것이다. 모래내시장도 가재울도 사라지는가.

염세주의 시절 청년 고은에게 모래내시장은 “어떤 인문적인 파편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곳”이었다. 오로지 “사고파는 것만이 생존의 이유가 되는 현실을 확인하는” 곳이었다.(<나의 산하, 나의 삶>) 하지만 당대의 만담가 장소팔과 고춘자는 달랐다. “연신내 술집에선 연신 술값을 내라 하고, 모래내시장에 가면 모레 내도 된다 하고….” 말장난이었지만, 그들의 애정은 전폭적이었다. 실제 모래내시장은 서울에서 인심이 가장 후했다. 삶은 고됐지만, 인정은 따듯했다.

당시(1970년) 모래내시장은 모래내의 범람을 막으려고 쌓은 방죽을 따라 형성됐다. 지금의 수색로 37번지와 38번지 사이의 수색로4길이다. 둑 위엔 1960년 후암동과 도동에서 쫓겨난 철거민의 하꼬방이 들어찼고, 방죽 뒤로는 비만 오면 시궁창이 되는 쓰레기매립장이었다.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살 수 없다는 동네였다.

북한산 보현봉에서 발원한 홍제천은 조선조 사천 곧 모래내(사천, 沙川)로 불렸다. 모래내 남쪽은 연희방이었고 북쪽은 가좌였다. 가좌는 모래내 물이 맑아 천변에 가재가 많이 산다 하여 가재울이 되었다고 하고, 갓(변두리)과 울(마을)이 합쳐져 가재울이 되었다고 한다. 원주민들은 후자 쪽이지만, 새 주민들은 전자를 선호한다.

아무튼 가재울은 살만해졌다는 1980,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의 북서쪽 끝 달동네였다. 전쟁 피난민, 이농 유민, 도심에서 쫓겨난 빈민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곳이었다. 자기 땅에서 쫓겨난 이들의 지상에서 마지막 거처나 다름없었다. 이들이 밀려오기 전 가재울은 무주구천동이나 다름없었다. 그 넓은 땅에 주민은 수백가구에 불과했다.

가재울의 그런 ‘선사시대’는 1959년 사라호 태풍에 의한 이촌동 수재민 2200여명이 이주하면서 ‘역사시대’로 바뀐다. 정부는 지금의 북가좌1동 산기슭에 대형 군용텐트를 줄지어 치고, 한동에 네가구씩 살도록 했다. 버틸 수 없는 사람들은 산비탈에 판잣집을 짓고 빠져나갔다. 이듬해엔 용산 철길이 확장되면서 철도부지의 판자촌이 철거됐다. 그때 후암동 철거민도 가재울로 이주당했다. 지금의 남가좌1동 모래내 방죽이 이들의 새 주거지였다.

1962년 모래내 위로 사천교가 개통되자, 도시 빈민들이 또 밀려왔다. 서울역 등으로 장사를 가거나 날품을 팔러 가기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따라 인구가 폭증했다. 벼락골모퉁이, 앞냇골, 범말로 이어지는 방죽을 따라 판자촌이 확장됐다. 1960년 첫 인구 조사 때 그곳 인구는 7495명이었다. 1965년엔 2만8553명으로 늘더니, 5년 뒤엔 6만3852명으로 증가했다. 1975년엔 8만1668명으로, 1980년엔 10만8987명이 되어, 서대문구 다른 동의 인구를 압도했다.

그러나 여전히 참혹한 빈곤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강냉이 장수 아버지가 아들딸 삼형제를 극약 묻힌 빵을 먹여 죽이고 저도 목숨을 끊거나, 쓰레기통을 뒤져 가져온 생선내장을 끓여먹고 죽은 어머니 주검을 붙들고 몸부림치는 3남매 이야기가 사람을 울렸다.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엔 지강헌 등 교도소 탈주범 4명이 인질극을 벌이기도 했다.

“거기서 너는 살았다/ 선량한 아버지와 볏짚단 같은 어머니,/ 티밥 같이 웃는 누이와 함께/ 거기서 너는 살았다// 기차 소리, 목에 걸고/ 흔들리는 무꽃 꺾어 깡통에 꽂고/ 오래 너는 살았다// 더 살 수 없는 곳에 사는 사람을 생각하며/ 우연히 스치는 질문… 새는 어떻게 집을 지을까…”(이성복의 시 ‘모래내 1978년’) 그런데 ‘더 살 수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 있었을까?

시장통 첫 가게는 청과물상이다. 맞은편엔 프라이팬 등 주방기구 점포, 그 옆엔 뻥튀기가 쌓여 있고, 각종 밑반찬과 ‘시골된장’ 항아리가 있는 반찬가게가 이어진다. 맞은편은 다시 야채, 옷, 건어물 점포가 이어지고 맞은편엔 신발가게, 중구난방이다. 다시 맞은편은 전, 튀김도 파는 김광수베이커리고, 건너편엔 풍년정육점이 있다. 한집 건너면 30년 된 부산어묵. 주인은 지금도 좌판 뒤에 앉아 생선 갈아 밀가루 섞은 반죽을 마디만큼 떼어 기름에 튀겨낸다. 다시 닭집과 건어물 가게가 이어지고, 맞은편엔 두부 전문 수림상회다. 콩을 삶고 갈아 콩물 내고, 간수 섞어 두부를 응고시키는 공정이 모두 그곳에서 이뤄진다.

두부집 맞은편은 백마기름집. 기름과 고추는 이 시장의 대표 상품. 아직도 직접 기름을 짜는 집이 10여곳이나 된다. 사거리 대각선 건너편은 모래내정육점이다. 이 시장통엔 열집 건너 하나씩 정육점, 닭집이 있다. 정육점 좌판엔 족, 꼬리, 껍데기 그 뒤에는 양, 곱창, 대창, 막창, 수구레 등 각종 부속품이 진열돼 있다. 아무리 가난해도, 몸이 유일한 재산인데, 그걸 어찌 채소로만 지탱할까. 부속품은 가난한 몸의 지방과 단백질 공급원이다. 정육도 싸다. 모래내정육점에 딸린 천막식당에는 이런 메뉴판이 밖으로 걸려 있다. ‘특별할인’, 한우 특수부위 모듬한우 육사시미 육회 각 1만2000원, 등심 1만8000원.

시장을 탄생시킨 것은 가재울이었고, 가재울은 시장으로 말미암아 팽창했다. 처음엔 연탄, 쌀, 야채 등 생필품 가게들이 주택가 골목에 생기다가 그 주변에 노점이 하나둘 들어섰고, 마을이 커지면서 점포와 노점이 늘었다. 수색로가 확장되고, 버스가 통행하자 인근의 농민들이 도로 옆에 자리를 깔고 노점을 쳤다. 그런 시장통에 이름이 붙은 건 1966년이었다. 1969년, 간이역이던 가좌역이 정식 역으로 승격되면서 시장은 급팽창한다. 노점과 점포는 방죽(수색로4길)을 따라 벼락골모퉁이를 거쳐 앞냇골까지 뻗어갔다. 골목 교차로를 만나면 위로 아래로 확장했다. 시골집 뒤란 살구나무 가지 뻗듯 시장은 퍼져나갔다.

그 결과 동대문시장, 영등포시장, 청량리시장 등과 함께 서울의 4대 재래시장으로 꼽히게 됐다. 서울 서북부지역 유통의 중심이었고, 일산 능곡 고양 수색은 물론 연신내 홍제동 성산동 망원동 상암동 주민들의 생필품 공급처이자 생활 거점이 되었다. 가재울 뉴타운 공사와 함께 지금은 수색로4길 500여m 시장통으로 쭈그러들었지만, ‘모래내시장에선 물건값 깎지 말라’는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 그만큼 인심이 후하고 품질도 괜찮다.

다시 사거리를 지나면 쌀 고추 따위를 파는 화순상회, 그 옆엔 서울떡집, 개고기도 파는 금촌참기름집, 중원기름집이 이어진다. 작은 삼거리엔 건어물, 밑반찬, 떡집이 있고, 시장과 역사를 같이해온 강원닭집이 있다. 그 좌판엔 삼계탕 재료, 닭발, 모래집, 굴비, 양미리, 갈치포가 있다. 건너편엔 퇴락한 처녀돼지집이 있고, 입구엔 ‘내가 너희에게 명하노니 서로 사랑하여라’는 말씀이 걸려 있다.

저만치 골목 끝엔 가재울 뉴타운 공사장과의 경계인 높다란 가림막이 서 있다. 노점과 점포는 여전하지만, 인적은 더욱 한산하다. 옛 서중시장의 흔적들. 서중시장 외에도 모래내시장을 구성하던 삼거리시장, 일산시장, 복지시장, 중앙시장, 좌원시장 등도 모두 사라졌다. 좌원시장의 은좌상가는 노인네들이 저렴하게 회포 푸는 콜라텍으로 명맥을 유지한다. 마지막 남은 모래내 시장통이 억센 아낙네처럼 버티고 있지만, 이곳에도 27층짜리 주상복합 건물 3동이 들어선다. 1, 2층을 상가로 쓴다지만, 가난한 모래내 상인들이 들어설 공간은 없을 것이다. 모래내시장도 가재울도 사라지는가.

곽병찬 대기자
서울역사박물관은 2008년 자료집 ‘그리운 가재울’ 3권을 냈다. 인문지리와 역사 그리고 삶을 기록한 편찬팀은 이렇게 제안했다. “전통시장으로서 특징을 살린 건축적 공간정비를 통해 저렴하고 친숙하게 이용할 수 있는 재래시장의 기능과 경관과 공간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각종 문화 콘텐츠의 산실로서 기능을 지속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만 좇을 뿐 눈도 귀도 없다. 우리 현대사의 짙고 푸른 궤적들을 불도저는 쓸어버리고 있다. 아, 그리운 가재울, 모래내시장 그 사람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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