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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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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압해도 동백은 한겨울 만개한다. 붉음이 절정에 이르러 툭 떨어뜨리는 결벽의 결기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한겨울 칼바람 속에서 붉음을 토하다가 꽃잎을 후루룩 날려 보내는 것은 그 못지않은 결기다 압해도서 낙조는 비밀스런 제의라도 치르듯 진행된다. 제의를 온전히 지켜볼 수 있는 곳에 미술관 하나가 있다. 우암 박용규 화백이 자신의 대표작들을 모두 신안군에 기증하면서 세워졌다. 군은 1004개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골라 전시관을 지었으니, 그게 저녁노을 미술관이다 ‘워매, 사돈 저거 보세요, 저거.’ ‘아이구 예뻐라, 어쩜 저렇게 붉을까.’ ‘꽃무덤이네요, 빨간 꽃무덤!’ 요행히 때를 맞춰 서천 동백정에 갔을 때였다. 두 어머니가 터트린 감탄사는 꽃이 놀랄 정도로 붉었다. 이맘때면 두 분 마음은 동백 있는 남쪽으로 가 있다. 선암사에 차 꽃이 피어 있고, 거제도 구조라초교에 춘당매가 피었다지만 그 마음은 변함없다. 한 어머니는 아예 동백 두어 그루 분에 담아 집에 들였는데, 꽃이 피고나니, 오히려 설렘만 더 커졌다. 여러 차례 동백꽃 여행을 떠나긴 했다. 그러나 너무 서두른 탓인지 서천 동백정에서 한 번을 제외하고는 짙푸른 이파리만 훑어보다가 돌아오곤 했다. 작년 12월말 동백이 피었다는 소식에 거제도 남쪽 지심도로 떠났다. 그러나 선착장은 가파른 비탈길로 이어졌다. 다리가 불편한 두 분은 선착장 옆 휴게소에서 바다만 바라봐야 했다. 서둘러 돌아올 때 손녀가 떨어진 꽃 몇 송이 주워 왔다. 받아들었을 때 스친 미소와 반짝이던 눈빛이라니, 얼굴에 꽃이 피었다. “…어떻게 열어놓은 설렘인데/ 어떻게 펼쳐놓은 그리움인데// 혼자 깊어지다/ 뚝/ 저를 놓아버리는….”(‘동백꽃 지다’) 여수 오동도 산책길에 걸려 있던 신병은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지난해 연말엔 이해인 수녀가 시와 산문을 담아 <필 때나 질 때나 동백꽃처럼>을 펴냈다. 제목 속 ‘질 때나…’ 부분이 한동안 가시처럼 마음에 박혀 있었다. 시인은 암투병 중이었다. “하루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지만, 죽음을 묵상하는 건 삶을 아름답고 간절하고 뜨겁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 글들이 동백꽃 한 송이로 여러분 마음속에 희망과 기쁨으로 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산의 한 수도원에서 정양 중인 그는 이맘때 찾아오는 이들에게 동백꽃 한 송이를 가슴에 브로치처럼 달아준다고 한다. 동백은 10월부터 피기 시작한다. 겨우내 조금씩 피고 지다가 만개하는 건 3, 4월이다. 보길도, 여수 오동도나 부산 동백섬, 광양 옥룡사지 등 남쪽 바닷가는 3월이지만, 고창 선운사는 4월초, 충남 서천 동백정으로 올라가면 4월 중하순까지 기다려야 한다. 서두르다가 낭패를 당하는 건 그 때문이다. 동백이 아니라 춘백이다. 그런데 신안 압해도 분재공원의 동백은 한겨울이 제철이라는 기별이 왔다. 운만 따른다면 하얗게 눈을 덮어쓴 붉은 꽃을 볼 수 있다…, 홍보물에도 그 사진이 실려 있었다. 아뿔싸, 그곳의 만개 시기는 1월 중순이었다. 송공산 남사면의 산책로와 산기슭에 조성된 수천 그루 동백 군락엔 이미 떨어진 것이 핀 것보다 많았다. 송공산은 섬들이 에워싸 호수 같은 목포 앞바다를 한눈에 조망하는 압해도 남단에 있다. 도초 비금도 밖 바깥 바다에서 안바다로 들어오는 옛 뱃사람들에게 방향을 잡아주는 등대 구실을 했다. 영산강을 거슬러 영산포로 통하는 내륙 수로 앞에 버티고 있으니, 후삼국 시절 수달 장군이 그곳에서 왕권과 서남해의 제해권을 두고 각축했을 법했다. 그곳 동백이 한겨울에 만개하는 건 원예종 애기동백이기 때문이었다. 11월 중순부터 개화하기 시작해 붉은색 분홍색 흰색 3종류의 꽃을 2월까지, 노란 꽃술이 드러나게 겹꽃잎을 활짝 열어젖히고, 꽃잎을 한 장씩 흩어 버리는 것이 여느 동백과 다르다. 붉음이 절정에 이르러 툭 떨어뜨리는 결벽의 결기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한겨울 칼바람 속에서 붉음을 토하다가 꽃잎을 후루룩 날려 보내는 것은 그 못지않은 결기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라던 시인 최영미의 절창은 ‘선운사에서’만 뽑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압해도 애기동백 또한 마찬가지였다. 눈에 덮인 꽃은 없었지만, 꽃들을 덮은 붉은 노을과 조우한 건 망외의 소득이었다. 해가 온종일 저를 태워 피어나지만 소멸은 한순간인 저녁놀. “…천 길 절벽 위로 뛰어내리는 사랑/ 가장 눈부신 꽃은/ 가장 눈부신 소멸의 다른 이름이라”는 문정희 시인의 ‘동백’은 저녁놀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것이었다. 하나 노을이야 어디라고 특별할 리 없다. 강화도 장화리 낙조마을의 낙조나, 여수 여자만 갯벌 노을이나, 영광 백수도로 앞 칠산바다 저녁노을이나, 서산 간월암 낙조나 특별할 리 없다. 화인들이 꿈꾸는 진도 셋방낙조도 그렇고, 선승들을 적멸에 젖게 하는 변산 월명암 낙조, 목포 입암산 입암반조 노을도 그렇다. 세상의 노을은 정토를 향하되, 각자 제 마음속으로 지는 것. 서러움이 깊으면 놀빛 또한 더욱 붉다. ‘완화삼’에서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라고 읊은 조지훈 선생이나 ‘나그네’에서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로 화답한 박목월 선생의 노을이 그렇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귀천’에서 천상병 시인이 노래하던 것이나 “…강가에 가면/ 흐르는 물은/ 나보고 왼통 눈물이 되야/ 살구꽃 닢처럼 져오라” 하지만 저는 “산접동새 우는 나룻목 가에/ 선연히 타는 저녁놀처럼”(‘저녁노을처럼’에서) 딴 데로 가겠다던 미당의 놀도 다를 게 없다. 그러나 다르지 않다고 같은 건 아니다. 압해도에서 낙조는 비밀스런 제의라도 치르듯 진행된다. 북쪽의 증도 지도 임자도 고이도 매화도 마산도, 남쪽의 외달도 달리도 율도 장산도 상태도 시하도가 문인석 무인석처럼 늘어서 있고, 해지는 서쪽의 비금도-도초도 자은-암태-팔금-안좌도는 5000만평의 바다정원 위에 제기처럼 놓여 있다. 송공산은 떨어지는 해를 향해 고유문을 읽는 대축관 혹은 초헌관의 자리이고, 남북으로 길게 누운 압해도는 그 뒤로 늘어선 제관의 형국이다. 제의는 5000만평 드넓은 바다정원이 붉게 물들 때 시작하고, 축관은 천변만화의 놀빛으로 하늘과 땅과 사람의 수고를 칭송하다가, 동쪽에서 땅거미가 파발마처럼 밀려올 즈음, 해는 비금도 너머 거대한 돔이 되었다가 곧 어둠 속으로 툭 떨어지고, 하늘과 구름과 섬과 바다는 ‘골고루 쳐다볼 틈도 없이’ 졸지에 사라진다. 잔물결 위 산란하던 빛도 한 조각 남김없이 소멸한다. 그런 제의를 온전히 지켜볼 수 있는 곳에 미술관 하나가 있다. 서울미대 학장을 지낸 김병종 교수가 ‘경관으로는 세계 3대 미술관에 꼽힐 것’이라고 책임질 수 없는 말을 남겼다는 곳이다. 그의 권고대로 신안군은 미술관에 ‘저녁노을’이라는 이름을 줬다. 미술관은 우암 박용규 화백이 자신의 대표작들을 모두 신안군에 기증하면서 세워졌다. 그는 남종화의 조종인 소치 허련 선생의 외손. 한미한 도서벽지의 화공으로서 그는 할아버지들처럼 지독하게 시리고 맵고 신 삶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겨울 칼추위 속에서 매화는 그 향을 깊게 하고 동백은 붉음을 더하는 법. 신산한 삶은 그의 작품에서 오탁을 씻어내고, 청향을 더욱 맑게 했다. 그런 작품 중에서도 특별히 아끼는 것을 우암은 세상에 내지 않고 제 곁에 두었다. 언제나 비좁았던 집안, 그는 그림들 틈에서 잠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백이 꽃을 툭툭 떨어뜨릴 때쯤이었을까, 우암은 그것들을 한번에 몽땅 던져버렸다. 무엇이 아쉽고, 무엇이 안타까우랴. 그것을 받아든 신안군은 1004개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골라 전시관을 지었으니, 그게 저녁노을 미술관이다. 궁벽한 섬마을의 연건평 425평의 작은 건물이지만, 그 만남이 특별히 아름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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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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