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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5.19 19:07 수정 : 2015.05.19 19:07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농암이 지은 애일당 마루에 올라 되새기는 ‘애일’의 뜻에 ‘대보불설부모은중경’을 새겨본다. 부모님 은혜를 그 이상 곡진하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서술한 경전이다. 유교국조차 신앙화했던 것이니 위경 시비가 부질없다.

농암은 81살에 애일당을 중창했다. “자손이 놀고 즐기는 데 빠지게 할 우려가 있지 않은가?” 농암은 이렇게 답했다. “편액을 ‘애일’이라 한 것은 일신의 즐거움을 위함이 아니고, 어버이를 봉양할 날이 부족하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어버이가 자식을 향한 마음을 담은 한자가 친(親)이요, 어버이를 향한 자식의 마음을 담은 것이 효(孝)다. 친(親)을 파자하면, 나무(木)에 올라(立) 아들이 돌아올 길을 하염없이 바라보는(見) 것이다.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간절한 마음이다. 효는 자식(子)이 늙으신 어버이(老)를 업고 있는 형상이니 그 뜻이 간명하다.

봉건사회 최고의 덕목은 충이었다. 3강5륜 가운데 첫째 도리는 군신 간에 지켜야 할 충이다. 그러나 충의 근본은 효. 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 몽진에 수행했던 신하는 100명도 안 됐다. 그 많던 신하들이 하나둘 빠져나간 명분은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왕도 막을 순 없었다.

사대부들이 벼슬에 목을 맸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입신출세가 곧 효의 완성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효경>) 조선의 노래자, 농암 이현보가 부모 곁에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일흔여섯까지 울며 겨자 먹기로 왕의 부름에 따랐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돌아가리, 돌아가리 하여도 모두 말뿐이고 돌아가는 이 없네/ 고향의 논밭이 거칠어 가니 아니 가고 어쩔꼬/ 초당엔 청풍명월이 들며 나며 기다리는데.”(‘효빈가’)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향인 예안 부내마을 가까운 지방의 수령을 간청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충주, 안동 등 8개 고을을 돌며 수령을 역임했다.

부내마을은 안동댐 건설과 함께 지도에서 사라졌다. 농암의 생가와 사당, 서원 그리고 정자 등은 분강(부내)이 내려다보이는 가송리 언덕 위로 옮겨졌다. 지금의 농암문화단지다. 부내 마을은 그가 교우했던 모재 김안로가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신선이 살 만한 도원’이라고 했던 곳이었다. 영지산이 울타리가 되고 부내가 수태극 암태극을 이루며 감싸고 있었다.

벼슬에 큰 뜻이 없었던 농암은 32살 늦은 나이에 그나마 병과에 턱걸이로 급제했다. 사간원 정언에 오른 게 38살이었다. 정언에 오르고 불과 3개월 만에 연산군에게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 유배를 당했다. 소주도병이란 별명처럼 겉은 질병처럼 투박하지만, 속은 소주처럼 희고 투명했다.

다시 왕의 부름을 받아 42살에 영천 군수에 제수됐다. 충주 목사로 봉직하던 1512년 그는 하루라도 아껴 부모님 곁에서 효도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마을 뒤 영지산 기슭의 부내가 잘 보이는 너럭바위에 애일당을 지었다. 급한 여울의 세찬 물소리가 귀를 막아, 평소 귀먹바위로 불리던 곳이었다. 그 바위를 ‘농암’이라 이름하고, 저의 호도 농암이라 했다. 세상사의 소란에서 벗어나 오로지 부모 봉양하며 살고 싶다는 뜻이었다.

“명절마다 반드시 양친을 모시고 동생들과 더불어 때때옷을 입고 술잔을 올려 기쁘게 해드리기를 이 집에서 했다. 그러나 어버이의 연세가 더욱 많아지니 한편으로 기쁘면서 한편으로 슬픈 마음(喜懼之情)이 들지 않을 수 없어 집의 편액을 ‘애일’(愛日)이라 했다.”(‘애일당중신기’에서)

영천 군수 시절의 쌍춘당양로연도나, 안동 수령 시절의 화산양로연도에는 그의 이런 행적이 남아 있다. 화산연도에는 색동옷을 입고 술잔 앞에서 춤을 추는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농암이었다. “술동이 앞에서 색동옷 입은 것 이상히 여기지 마오/ 내 부모님도 그곳에 계시니.”(‘화산양로시’에서)

애일당 마루에 올라 되새기는 ‘애일’의 뜻에 ‘대보불설부모은중경’(이하 ‘은중경’)을 새겨본다. 지상에서 부모님 은혜를 그 이상 곡진하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서술한 경전. 산스크리트어 원전에 없다 하여 위경 시비가 있지만, 유교 국가에서조차 신앙화했던 것이니 시비가 부질없다.

“죽어서 이별이야 말할 것도 없고, 살아서 생이별 또한 고통스러운 것. 자식이 집 떠나 멀리 나가면, 낮이나 밤이나 자식 뒤쫓는 마음, 흐르는 눈물은 천 갈래인가 만 갈래인가.” 유교가 당위로서 효를 강조했다면, 은중경은 부모의 은혜를 과학적으로 샅샅이 따진다. 한자 친(親)의 뜻이 은중경의 열가지 은혜 가운데 여덟번째에 포함되는 건 그 때문이다. 한때 국민가요였던 ‘어머니의 마음’의 노랫말은 양주동 박사가 은중경을 요약한 것이었다.

시작부터 충격적이다. 부처가 만행을 하던 중 한 무더기 뼈를 발견하고는 오체를 던져 예를 올렸다. “너희는 이 뼈 무더기를 둘로 나누어 보아라. 만일 남자의 것이라면 희고 무거울 것이며, 여인의 뼈라면 검고 가벼울 것이다.” 남자라면 편하게 지냈을 것이기에 그 뼈가 희고 무겁겠지만, 여인은 아들딸 낳을 때마다 서말 서되의 피를 흘리고, 여덟섬 너말이나 되는 흰 젖을 먹이는 까닭에 뼈가 가볍고 검다는 것이었다. “출산함에 있어 어머니의 아기집을 깨트리고, 심장과 간을 움켜쥐며, 골반을 힘주어 밟고 서서 버티는 것이, 어머니로 하여금 일천개의 칼로 배를 쑤시고, 일만개의 칼로 심장을 저미는 고통을 주”고 태어나는 게 바로 자식이다.

그런 어머니는 열달 동안 온 생명을 바쳐 배안의 자식을 품고 지켜주며(懷耽守護恩·회탐수호은) 죽음을 각오한 고통 속에서 아기를 낳는다(臨産受苦恩·임산수고은). 출산 후엔 평생 자식 걱정에 노심초사하며(生子忘憂恩·생자망우은) 쓴 것은 삼키고, 단것만 골라 먹인다(咽苦吐甘恩·연고토감은). 마른자리만 골라 자식을 눕히며(廻乾就濕恩·회건취습은) 여덟섬 서말의 젖을 먹여 기르고(乳哺養育恩·유포양육은) 손발이 닳도록 보살핀다(洗濁不淨恩·세탁부정은). 자식이 집을 나서면 걱정 속에서 기다리며(遠行憶念恩·원행억념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나쁜 짓도 마다하지 않고(爲造惡業恩·위조악업은) 숨이 다하도록 자식 연민을 버리지 못한다(究竟憐愍恩·구경연민은).

그 은혜를 어떻게 갚을 것인가. 은중경은 단호하다. “어떤 사람이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모시고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모시고, 피부가 닳아서 뼈에 이르고, 뼈가 닳아서 골수에 미치도록 수미산을 백천번 돌더라도 부모님의 은혜는 갚을 수 없다.” 자식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오로지 공경하고, 기도로써 그 은혜를 기억할 뿐.

신유학 곧 성리학이 나라의 통치이념이요, 규범이었던 조선에서 은중경이 필독서가 되었던 것은 바로 그런 지극함 때문이었다. 나라에선 한자본과 한글 언해본으로 은중경을 펴내고 그 내용을 풀이하는 그림(변상도)까지 곁들였다. 현존하는 조선의 은중경 언해본만 33종이나 되는 건 그 때문이다. 특히 정조는 화성에 부친의 묘소(융릉)를 조성하면서 은중경 목판본을 능침사찰 용주사에 하사했는데, 변상도는 섬세한 필치가 산수화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지금은 잊혀진 경전이다. 구한말 이래 새로운 판본 하나 나오지 않았다. 효행사찰을 자처하는 용주사조차 정조의 판본을 홍보용으로나 이용할 뿐이다. 그나마 위로를 삼는 건 곽영권 교수(서울시립대 미대)의 판본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2002년 고려 때부터 내려온 변상도의 기본 꼴을 완전히 바꿔 13폭 병풍 형태의 화첩으로 은중경을 제작했다.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는 고 장용훈 한지장의 음양지로 제작한 지극히 한국적인 판본을 출품해 주빈국으로서 체면을 살렸다. 2007년엔 어린이용 판본을 냈고, 2014년엔 변상도 13폭을 다시 개작해 전시회를 열었다.

농암은 1548년 81살에 애일당을 중창했다. 그 뜻을 모르는 이들은 의아했다. “자손으로 하여금 놀고 즐기는 데 빠지게 할 우려가 있지 않은가?” 농암은 이렇게 답했다. “당의 편액을 ‘애일’이라 한 것은 일신의 즐거움을 위함이 아니고, 어버이를 봉양할 날이 부족하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늙은이의 자손 역시 이 마루에 올라 이름을 돌아보고 그 뜻을 생각하여 어버이를 가까이하면서 오직 효성만을 본받도록 하고자 하려는 것입니다.”(‘애일당중신기’에서)

곽병찬 대기자
평생 자식을 돌보다 늙고 병들면 버려지는 게 요즘 시류다. 부부는 자식을 낳지 않고, 때론 핏덩이조차 버리고, 국가는 그런 부모와 자식을 이간질하고, 세대 갈등을 즐기기도 한다. 애일당에 올라 은중경을 되뇌어도 장탄식만 나온다. 부내의 물줄기처럼 하염없이 길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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