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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6.02 18:58 수정 : 2015.06.02 18:58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전투 사흘째, 왜군의 파상공세는 끊이지 않았다. 성안의 아낙들은 나뭇가지까지 주워 기름을 끓이고, 물을 끓였다. 나이 든 남정네는 돌과 끓은 물, 기름을 날랐다. 그러나 10배 이상의 잘 훈련된 병력과 화력 앞에선 중과부적이었다.

사서는 왜군 2만7000여명이 하루 만에 산성을 함락하고, 조선 병사 500여명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긍하기 힘들다. 성은 길이만 2.75킬로미터다. 그 숫자로는 방어 자체가 불가능하다. 중과부적의 숫자를 채운 것은, 공식 역사가 지워버린 백성들이었다.

정상 부근엔 산철쭉이 여전히 투명한 연분홍 꽃 무더기를 이고 있었다. 바람이 시원하다 싶었는데, 후두둑 꽃이 떨어졌다. 발밑엔 이미 떨어진 것들이 꽃무덤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생화의 아름다움에 혹해 낙화의 슬픔을 잊고 있었다. 418년 전 권력자들이 버린 이 땅을 지키려다 그곳에서 스러진 꽃 같은 이들의 순절을 잊고 살아온 것처럼.

전투 사흘째인 8월17일 자정 무렵, 왜군의 파상공세는 끊이지 않았다. 성안의 아낙들은 나뭇가지까지 주워 기름을 끓이고, 기름이 떨어지면 물을 끓였다. 나이 든 남정네는 돌과 끓은 물, 기름을 날랐고, 장정들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들에게 던지고 부었다. 병졸들은 화살을 쏘고 칼과 창으로 성벽을 기어오르는 자들을 찔렀다. 그러나 10배 이상의 잘 훈련된 병력과 화력 앞에선 중과부적이었다.

자정이 넘어가면서 군무장 유명개 거창 좌수에게 올라오는 보고는 절망적이었다. 무기고를 지키던 부인 정씨는 화살이 다 떨어졌다는 것이었고, 서문을 지키던 정언남에게선 전황 대신 ‘싸우고 싸워도 끝이 없다’는 탄식만 전해왔다. 북문과 동문을 지키던 성주 백사림은 “적은 저렇게 밀려오고, 병사들의 사기는 다해가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탄식을 했다. 한가위를 갓 지난 음력 18일 새벽 달빛으로 성안은 가득했다. 그러나 수천명 백성의 손에 남은 건 맨주먹뿐이었다.(의사공현보유명개연보)

축시 무렵 비보가 날아왔다. ‘동문이 열렸다!’ 장교 김필동이 군졸 20여명과 함께 문을 열고 왜군에 투항했다는 것이다. 동문이 뚫리면서 가까운 북문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혼란에 빠진 사람들은 성을 넘어 탈출하기 시작했고, 백사림은 전선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결국 백사림도 왜군 복장으로 변복을 한 채 탈출했다.

남·서문을 굳게 지키던 안의 현감 존재 곽준, 함양 군수 대소헌 조종도에게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가토, 구로다 등 왜군 최강의 장수들도 굴복시키지 못했던 이들이지만 이제는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무기고 옆 장석(지휘소 자리)에 모였다. 존재의 둘째 사위 강준이 말했다. “이미 적들이 성에 들어왔으니 피신해야 합니다.” 대소헌은 말했다. “북문을 열어 자식과 여자들이 오욕을 당하지 않게 합시다.” 대소헌은 한마디 덧붙였다. “존재와 나는 여기서 죽을 뿐.”

존재는 우선 무기고와 식량창고를 불태우도록 지시했다. “너희는 살길로 가라. 나는 여기에서 죽어야 한다.” 유 좌수도 피신을 종용받자 “구차히 살아서 무엇을 하리, 너희들은 나가서 후일을 도모하라”고 말했다. 대소헌은 산성으로 올라오기 전 이미 이런 절명시를 남겼었다. “성 밖에서 사는 것도 행복이었지만, 순원성을 지키다 죽는 것 또한 영광이로다.”

왜군이 밀려왔고, 장석 위에서 버티던 존재는 쓰러졌다. 대소헌과 유 좌수도 무너졌다. 존재의 두 아들도 죽었고, 딸과 며느리는 치욕을 당하기 전 자결했다. 대소헌의 부인, 유 좌수의 부인도 자결했다. 유 좌수의 두 아들은 이미 14일 북문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거창 현감 한형의 부인 이씨도 순절했다. 아녀자들은 남문 서쪽의 벼랑으로 내달았다. 그곳에서 떨어져 내린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벼랑의 거대한 바위(피바위)는 피로 붉게 물들었다. 여명이 틀 무렵 황석산성 나흘간의 전투는 끝났다.

임진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치하의 편지(감사장)에서 이렇게 썼다. “성내에서 조선군 353명과 계곡에서 수천명을 죽였다고 하니….” 황석산성에 올라 왜군과 결전을 치렀던 함양 안의 거창, 합천, 삼가, 초계, 산음 7개 현 백성들은 대부분 그렇게 순절했다. 많게는 7000여명에 이른다고 하지만, 이 나라 역사서에는 희생자를 7개 현에서 올라온 병졸 숫자만큼만 기록하고 있다. ‘왜적에 맞서 500여명이 순절….’

임진년 그렇게 참화를 겪고도 조선의 왕실과 조정은 여전히 무능했고 안이했다. 1597년 1월 울산과 부산 일원에 상륙한 왜군이, 그해 7월 칠천량 전투에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킬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조정의 무능 때문이었다. 7월 말 왜군은 전군을 좌우로 나눠 우선 호남 정벌에 나섰다. 우군은 밀양, 창녕, 고령, 합천, 거창, 함양, 장수, 진안을 거쳐 전주성으로 가고, 좌군은 김해, 고성, 사천, 하동 등 물길을 따라 이동한 뒤 구례 남원을 거쳐 전주성에 입성하려 했다. 좌군은 4만5000여명, 우군은 7만5000여명. 우군이 많았던 것은 전주성 함락 후 북진의 주력부대였기 때문이다.

우군은 곽재우의 의병이 버티는 창녕 화왕산성은 비켜갔다. 그러나 황석산성은 그럴 수 없었다. 안의에서 전주로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게 육십령이고, 육십령으로 가는 중간에 버티고 있는 게 황석산이었다. 비켜가는 것은 등을 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군은 14일 산 밑에 도착, 정찰을 끝내고 15일 전투배치를 완료한 뒤 남문부터 공략했다. 그러나 군신으로 추앙받던 가토 기요마사가 치명상을 입고, 그의 부대가 퇴각할 정도로 저항은 거셌다. 16일 병력을 총동원해 공성에 나섰다. 이번에도 죽기를 각오한 조선 백성의 저항 앞에서 물러서야 했다. 17일에도 파상공세는 이어졌다. 늙은 부모의 목숨을 앞세워 투항을 유도하는 심리전도 병행했다. 성안 군민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운도 떨어지고 돌도 화살도 기름도 바닥을 드러내고, 심지어 화목도 떨어졌다. 해가 떨어지면서 다시 총공세가 펼쳐졌고, 동문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황석산성이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고 함부로 승패를 단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감사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앞으로 좌군과 협동하여 실수 없게 작전하시오. 마에다 겐지 등에게 잘 말해 두겠소.” 그건 치사가 아니었다. 치명적 손실을 입은 우군 장수들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실제 이 싸움 이후 왜군의 조선 정벌 계획은 근본적으로 수정됐다. 우군은 좌군보다 3~4일 늦게 전주성에 입성했다. 전주성에서 북진할 때 우군의 병력은 2만7000여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우군은 충청도 천안 근처의 직산 전투를 제외하고는 전투다운 전투 한번 벌이지 않고 퇴각했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으면, 일제는 한반도를 병탄하자마자 황암사를 불태웠다. 숙종이 산성전투 때 순절한 이들을 배향하기 위해 지은 사당이었다. 안의군을 아예 폐군시켜 면으로 강등시켰고, 현청은 헐어버렸다.

지금까지 우리 사서는 왜군 2만7000여명이 단 하루 만에 산성을 함락하고, 조선 병사 500여명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긍하기 힘들다. 그 이유는 산성에 한번 올라가 보면 안다. 험준한 능선을 잇는 산성은 길이만 2.75킬로미터에 이른다. 500명이 늘어선다 해도 6미터에 한명꼴이다. 그 숫자로는 방어 자체가 불가능하다. 중과부적의 숫자를 채운 것은, 공식 역사가 지워버린 백성들이었다. 군무장 유 좌수의 신도비 연보를 보면 산성엔 거창, 함양, 안의에서만 각 1000명 이상의 백성이 올라와 있었다고 했다. 대부분 산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이들이었다.

황암사는 2001년에야 황석산성 기슭에 다시 세워졌다. 황석산순국선열추모위원회 등 순전히 민간이 노력한 결과였다. 사실의 잘잘못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도 박선호 황석산성연구소 소장 등 역시 순전히 민간의 노력 결과였다. 황암사에 봉안된 위패에는 특별한 신위가 있다. 중앙에 3위, 좌우로 3위, 4위가 모셔져 있는데 정중앙에 있는 것이 ‘황석산성순국선열제위’다. 무명의 희생자 곧 백성을 중앙에 모신 것이다. 다른 배향시설에서 백성은 언제나 권력자의 들러리일 뿐이었다.

곽병찬 대기자
충혼비 비문엔 이런 내용이 있다. “우리는 어느 때 어느 싸움에서 이런 충의와 충용과 충절에 빛나는 호국의 충혼을 찾을 것인가.” 시인 구상 선생이 별세하기 전 남긴 문장이다. 권력자들이 버린 전장에서, 장렬하게 싸우다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천명의 민을 기리는 마음이 절절하다. 그러나 언제나 그 잊혀진 충혼, 잊혀진 이름을 되찾아줄 것인가. 추모의 염이 아니라 부끄러움으로 고개가 꺾인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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