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5.07.14 18:53 수정 : 2015.07.14 23:20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엊그제 씨앗나눔이 있었다. “몬산토 씨를 구매하면 서약해야 하는 게 있습니다. ‘거둔 씨를 나누지 않는다.’ 이 자리도 서약할 게 있습니다. ‘반드시 채종하고, 씨앗은 반드시 나누고, 팔지 않는다.’ 이건 제 사부님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장흥의 이영동 농부가 그 사부다. 그는 틈틈이 남도지방을 돌며 어머니의 씨앗을 찾아다녔다. 이제 그는 논과 밭에서 자연적으로 생기는 교잡종을 선택해 안정화시키는 데 많은 공을 들인다. 세상을 놀라게 했던 적토미나 반달미도 그렇게 탄생했다.

5월10일 마르셰 토종씨앗 나눔 행사엔 79종의 씨앗이 꼬마봉투 1231개에 담겨 있었다. 김혜영 농부가 ‘어깨가 뻐근하고 검지가 아리고 눈이 침침하도록’ 일일이 봉투를 접고 씨앗을 담아 가져온 것이었다. 꼬마단수수, 몽당수수, 까치수수, 점쟁이동부, 야생동부, 흰동부, 검은동부, 갓끈동부, 어금니동부, 개발동부, 그리고 단두, 강낭콩, 작두콩, 메주콩, 서리태, 땅콩, 팥, 옥수수, 기장, 조, 수수, 호박, 박, 여주, 아욱~. 6, 7월에 심을 작물들이었다.

씨앗을 나누는 날 그는 토종 찰쌀에 토종 팥고물을 얹은 시루떡과 토종 장콩 고물을 묻힌 인절미도 가져왔다. 집에서 손수 프라이팬으로 볶고 껍질을 벗긴 뒤 곱게 갈아 만든 것이었다. 참가자들은 빈손, 맨입으로 와 떡도 먹고 씨앗도 받고 파종 요령도 배워 갔다. 그의 바람은 하나. “씨앗과 함께 봉투에 담긴 건 토종 씨앗이 널리 널리 퍼졌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시집보낸 씨앗들이 자라는 사진을 이곳에 올려주시면 행복할 것입니다.” 선의와 헌신, 겸손과 신뢰, 사랑과 아름다움 등 따듯한 말들이 떠올랐다.

엊그제(7월12일)에도 씨앗나눔이 있었다. 씨앗 봉투 앞에는 산지와 채종한 농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완두 고양 맹추네농장, 재래중파 삼층거리파 청주 홍진희, 쌀귀리 호밀 시흥 강종은, 쪽파 시금치 장흥 김혜련…. 김장거리와 늦가을 뿌려 내년에 거둘 씨앗들이었다. “몬산토 씨를 구매하면 서약해야 하는 게 있습니다. ‘채종하지 않는다, 거둔 씨를 나누지 않는다.’ 이 자리에서도 서약할 게 있습니다. ‘반드시 채종하고, 씨앗은 반드시 나누고, 팔지 않는다.’ 이건 제 사부님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에게 ‘싸부’가 있다니….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 운주마을 약다산 기슭으로 이영동 농부를 찾아간 것은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농장은 작고 볼품없었다. 슬레이트 지붕의 작은 살림집, 스무 이랑 정도의 텃밭, 창고 겸 그늘막, 비닐하우스, 다시 텃밭, 그리고 집과 밭을 에워싼 논 2천여평. 그저 작은 체구의 깡마르고 검게 그을린 이 땅의 농부였고, 가난한 농가였다.

탁자엔 술빵, 고추, 상추, 더덕, 장아찌, 멸치젓과 막걸리 1병이 있었다. “이건 앉은뱅이밀로 빚은 술빵. 학교 갔다 오면 어머니가 주시곤 했죠. 밑에 깐 양하 잎은 어머니의 필수품이었고, 붕어초와 수비초, 청치마상추는 어머니의 밥상에 빠지지 않던 것이고….” 말끝마다 어머니의 기억이 따라나왔다.

‘저기 앞 고랑부터….’ 붕어초, 수비초, 사근초, 청치마상추, 조선가지, 그 너머에 흰고구마, 물고구마, 토종 당근, 그리고 양하…. 청치마상추는 당당한 풍채가 근위병 닮았다. 잎도 넓고 향기 맛 식감도 좋고 장마도 견디고, 숙면을 유도하고 스트레스와 암을 이기는 성분(시니그린, 락투신)도 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있다. 잎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조선가지는 개량종과 달리 껍질이 얇고 부드러워 날것으로 먹어도 맛있다. 토종 물고구마는 찌면 솥 바닥에 꿀이 진득하게 눌어붙을 정도로 달다. 저장도 쉬워 방구석에 놓아두면 봄까지 먹을 수 있다. 꽃이 핀 토종 당근은 어른 키보다 더 컸다. 어머니는 장독대 옆에 양하를 심어두고, 된장국 끓일 때나 빵을 찔 때, 떡이나 밥을 쌀 때 썼다.

그의 텃밭에서 자라는 것은 어머니의 맛과 기억이었다. “언제나/ 엄니손 곁엔/ 씨앗들이 있었고/ 봄이 되면 씨앗들은/ 울엄니 희망이었네/ 가을엔 수확의 기쁨/ 또는 한숨이었네/ 그리고 씨앗에는/ 우리들의 명이/ 달려 있었네.”(‘엄니의 보물’)

비닐하우스는 채종용으로 쓴다. 콩 조 기장 수수 보리 밀 옥수수 율무 깨 벼 토마토 등이 종류별로 한두 포기씩 자란다. 비닐하우스 너머 텃밭엔 앉은뱅이강낭콩, 남도장콩, 금두, 노랑준줄리, 그리고 꼬투리째 삶아 먹는 태두가 있고, 검은땅콩, 토종 땅콩도 자란다. 토종 땅콩은 알이 작아 콩나물용으로 쓰인다. 5월이면 어머니가 모래밭에 심고 시루를 엎어 놓은 뒤 사나흘 물만 주면 콩나물이 되어 나물도 국도 되는 것이었다. 참외도 개똥참외, 개구리참외, 쇠뿔참외, 호박참외, 수통참외, 깐치참외, 사과참외 등 열 종류 가까이 자란다.

그늘막 한켠은 작은 창고. 선반과 두 대의 냉장고가 있다. 씨앗 보관소이다. 벽면 하나를 가득 채운 선반엔 이듬해 심거나 나누게 될 것들이 보관돼 있고, 큰 냉장고는 1차 예비용 씨앗, 그리고 작은 냉장고는 2차 예비용 씨앗 저장고다. 크고 작은 병에는 28작물 150여종 씨앗이 담겨 있다. 벼가 35종, 콩이 58종, 팥이 13종, 조가 7종, 기장 4종, 수수 9종, 열무 3종, 보리가 5종, 밀이 2종, 들깨가 5종, 참외가 10종, 호박이 3종, 박이 5종이다. 오이 가지 무 배추 갓 부추 상추 마늘 시금치 쑥갓 파 생강 마늘…. 2013년 전남농업기술원은 이곳에서 원예작물 22점, 동부 등 두류 58점, 깨 등 특용작물 8점, 벼 등 식량작물 33점 등 총 28작목 121점을 받아갔다.

농부는 장흥에서 6남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집안에선 유일하게 초등학교를 나왔기에 지독하게 가난했던 부모님은 그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객지로 나가고 불과 6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고구마 감자 옥수수 개떡 밀죽 등 어머니의 맛이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씨앗 17가지만 남기고 돌아가셨다. 게다가 이씨는 경황 중에 그 씨앗마저 잃어버렸다.

‘어부는 혹돔 비늘 한 장 보고 백리를 가고, 농부는 씨앗 한 립 보고 천리를 간다’(김혜영 농부)고 했던가. 그는 틈틈이 강진 보성 영암 해남 등 남도지방을 돌아다니며 어머니의 씨앗을 찾아다녔다. 장터에서 콩 너덧 개 들고 나오다가 면박을 당하기도 했고, 강원도에선 농가를 기웃거리다가 간첩으로 신고를 당하기도 했다. 이제는 그를 아는 이들이 씨앗을 보내오고, 그의 씨앗을 받아간다. 이제 그는 논과 밭에서 자연적으로 생기는 교잡종을 선택해 안정화시키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인다. 한때 세상을 놀라게 했던 적토미나 반달미도 그렇게 탄생했다.

토종이란 특정 지역에서 수십 수백년에 걸쳐 생긴 변이종 가운데 농부가 선택하고 안정화시켜 얻은 종자다. 그런 농부의 노력은 이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중머리처럼 반질반질하다고 중조, 개발을 닮았다고 개발조, 노란색이라고 황금조, 은색이라고 은차조, 청색이라고 청차조, 북실을 닮았다고 북실조. 선비가 그 맛에 반해 과거시험을 포기했다는 남도선비잡이콩, 쥐눈을 닮았다고 조생속청쥐눈이, 다산쥐눈이, 속노랑쥐눈이, 우산쥐눈이콩, 키가 작다고 앉은뱅이강낭콩, 앉은뱅이밀이다. 색깔로는 흰깨 검은깨 누렁깨 청목깨 붉은깨 네줄박이깨가 있다. 양생꽈리참외 등 참외는 주로 모양과 무늬로 나뉜다.

누대에 걸친 안정화 과정에서 씨앗은 지역의 풍토와 기후에 적응한다. 병충해에 강하고, 잡초에 이기고, 가뭄 등 기후변화에 잘 견디는 건 그 때문이다. 토종 벼가 까락이 길고 잎이 뾰족하며 자연색을 띠는 건 동물들로부터 저를 보호하려는 것이고, 토종 콩이 무광택에 넝쿨지는 건 새나 잡초로부터 저를 보호하려는 것이고, 토종 밀이 키가 작은 건 바람에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다.

지난 2월 그가 회장으로 있는 남도토종자원보존연구회 회원들이 토종 씨앗 유료화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제안한 쪽은 “그래야 귀한 줄 알고 제대로 키운다”는 것이었다. 사실 씨앗을 받아가고는 제대로 심어 채종하고 나누는 이는 드물었다. 격론이 계속됐다. 회장 의견을 듣기로 했다. “씨앗은 내가 받았어도 내가 만든 게 아니다. 조상이 물려주고 땅과 하늘이 길러준 것이다. 팔아선 안 된다.” 그럼에도 논란이 계속되자 “내가 죽은 뒤 그렇게 하시든가…”라고 잘라 말했다.

곽병찬 대기자
장흥 방문 때 김혜영 농부가 밥을 내왔다. 흑미, 적미, 녹미, 현미(황), 백미에 선비잡이콩, 선비콩, 동부를 얹어 지었다. 밥은 차지고 고소하고 구수했다. “아들아, 씨앗엔 이 땅의 영혼이 담겨 있단다.” 그러시던 어머니의 향기가 배어나왔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곽병찬의 향원익청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