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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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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둔옹(遁翁) 하면 12세기 중국 남송의 주희를 먼저 떠올린다. 불학과 노장 그리고 이학을 통섭해 주자학이라는 거대한 사상체계를 집대성했고, 1천년 가까이 동북아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이다. 유덕수라는 간특한 자가 있었다. 그는 조정에 상소해 과거에서 도학의 문장을 쓴 사람은 낙방시키고 주희가 저술한 4서도 금서로 묶어버렸다. 평생 연구하고 정리한 도학이 위학으로 단죄되고 보니 주희는 참담했다. 푸젠성 우이산 기슭 초막(우이정사)에 몸을 숨겼다. 중국의 염계와 주희, 조선의 둔옹이나 모렴당은 모두 현실에 좌절한 이상주의자였다.둔옹이 칩거하고 450여년 뒤 밀양엔 새로운 이상주의자들이 용약하기 시작했다. 백민 황상규, 일봉 김대지, 약산 김원봉, 석정 윤세주와 최수봉, 김상윤, 한봉조, 한봉인, 김병완 등, 일제와 그 부역자들을 떨게 했던 의열단의 결의 형제들이 그들이다.
최초 단원 13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밀양 출신이었다. 15세기 조선엔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다가 경남 밀양 부북면 전사포리의 산기슭에 칩거한 안엄경이 있다. 수양대군의 만행을 보고 권력의 그늘을 떠난 것이었다. 수양대군은 조카인 단종을 유폐하고, 복위운동에 나선 사육신을 능지처참하고, 뜻을 같이했던 안평대군과 안완경 등을 유배지에서 사사했다. 완경은 엄경의 동생이었다. 엄경은 자식들에게 ‘절대로 벼슬길에 나서지 말라’고 경계했다. 저의 호를 둔옹이라 하고, 머물던 곳을 둔옹정이라 이름했다. 둔옹의 증손자 안인은 천거가 잇따랐지만 가훈을 따랐다. 그는 인근 사포리에 재실을 짓고, 당호를 모렴당으로, 저의 호 역시 모렴당이라 했다. 염계 주돈이에 대한 흠모의 정을 담은 것이었다. 염계는 <태극도설>을 완성해, 주자학 구축의 토대를 마련했던 학자. 재실은 파격이었다. 건물이야 평범하지만, 마당을 아예 연지로 파버렸다. 맨땅이라곤 대문에서 재실로 들어가는 통로뿐이었다. 염계는 연을 가장 사랑했다. 오죽했으면 지금도 애창되는 ‘애련설’을 썼을까. 그가 은거한 곳도 연화봉 아래였다. 모렴당은 이런 정경을 글로 남겼다. “못의 물빛이 추녀와 달에 비치고, 연꽃 향이 안석과 문간에 스며들어, 말 없는 중에 주 선생과 합치하는 의사가 있었네.” ‘애련설’에는 연의 7가지 덕성을 담았다. ‘멀수록 그 향이 맑아진다’는 향원익청(香遠益淸)은 그중 하나다. 이이불염(泥而不染,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아니한다), 탁청련이불요(濯淸漣而不妖, 맑은 물에 씻어도 요염하지 않다), 중통외직(中通外直, 몸은 비어 있지만 줄기는 곧다), 불만부지(不蔓不枝, 함부로 넝쿨이나 가지를 뻗지 않는다), 정정정식(亭亭淨植, 바르고 깨끗하게 자란다), 하여 멀리서 바라볼지언정 함부로 희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군자의 덕목들이다. 중국의 염계와 주희, 조선의 둔옹이나 모렴당은 모두 현실에 좌절한 이상주의자였다. 지배 권력의 패륜을 뼈저리게 경험했기에, 권력의 억압과 폭력이 없는 이상 세계를 꿈꿨다. 그런 세상을 이루기 위해선 본인부터 한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마음의 상태(寂然不動, 誠)에 이르면(순수지선, 純粹至善) 5상(五常)의 덕(인 의 예 지 신)을 완성할 수 있다.” 성리학이 말하는 도인이요 군자다. 불교의 깨달은 자, 노장의 선인이다. 그들의 세상은 정토가 될 것이다. 모렴당이 ‘주 선생과 합치했다’는 의사가 이것 아닐까? 둔옹이 칩거하고 450여년 뒤 밀양엔 전혀 새로운 이상주의자들이 용약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현실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은둔하지 않았다. 불의한 권력에 제 몸을 폭탄 삼아 던지는 방식으로, 자유와 평화, 정의와 인도의 가치가 실현되는 그런 세상을 열어가려 했다. 백민 황상규, 일봉 김대지, 약산 김원봉, 석정 윤세주와 최수봉, 김상윤, 한봉조, 한봉인, 김병완 등, 일제와 그 부역자들을 떨게 했던 의열단의 결의 형제들이 그들이다. 최초의 단원 13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밀양 출신이었다. 비록 방법은 달랐지만, 둔옹이나 의열단이 꿈꾸는 세상은 비슷했다. 권력의 지배가 최소화되고, 인간의 자발성이 극대화되는 사회가 그것이었다. 연꽃 하나하나가 모여 이루는 모렴당 연지와 같은 그런 세상이다. 의열단 의백 약산은 아나키스트 우당 이회영 선생이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 출신. 의열단 선언문을 쓴 사람은 역시 아나키스트 단재 신채호 선생이었다. 이들은 허구한 날 분열과 파벌싸움에 여념이 없는 상해 임시정부에 지쳤고, 마찬가지로 패권을 추구하던 사회주의 계열에 실망했던 터였다. 단재의 의열단 선언서(조선혁명선언)는 이렇게 맺는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지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밀양의 주요 도로 3곳은 백민로, 약산로, 석정로란 이름을 가졌다. 백민로는 시청 앞 서문사거리에서 남쪽으로, 석정로는 교동사거리에서 남쪽으로, 약산로는 국립식량과학원사거리에서 동쪽으로 뻗어 있다. 백민은 밀양 민족운동의 대부. 의열단의 고문이기도 하고, 일선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 활동 중 체포돼 수감됐고, 출소 뒤에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일생 항일무장투쟁에 헌신한 석정은 조선의용군 시절 중국공산당의 주력 팔로군에 배속되어 싸우다 태항산 전선에서 사망했다. 약산은 의열단 의백(단장)이요 조선의용대 사령관이요,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였다. 일제가 백범 김구보다 더 많은 현상금을 내건 인물이었다. 해방이 되었다지만 일제 고등경찰이었던 노덕술이 자신을 체포해 고문하는, 그런 남쪽의 상황에 진저리가 나 월북했다. 그곳에서 노동상 등을 역임하다가 숙청당했지만 그는 월북자였다. 그런 그의 호를 밀양 시민은 도로명으로 삼았다. 밀양에서 300리 떨어진 함양엔 이런 교훈을 가진 중학교가 있다. “참되자, 일하자.” 야학도 공민학교도 아닌, 해방 후 두 번째로 인가받은 안의중학교의 교훈이다. 이 학교가 개교식 겸 입학식을 거행한 건 그해 10월5일. 6개월 전인 4월21일 안의에선 전국아나키스트대표자대회가 열렸다. 600여명에 이르는 참석자들은 독립노농당의 창당을 결의하고, 정부 수립의 원칙을 천명했다. 자유와 평화, 그리고 생산자에 의한 생산수단의 소유라는 아나키스트의 꿈과 이상 그리고 의지를 담은 것이었다. “각인은 만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무력은 인민의 자기 생활 보위의 한계를 넘어서는 안 되며…, 착취한 토지는 농민에게, 착취한 공장 광산 작업장은 노동자에게 무상으로 귀속시켜야 한다.” 이런 원칙과 함께 안의중학교 교훈은 당대 아나키스트의 신조이자 이념이었다. 사실상 학교를 세운 이진언 선생을 비롯해 하기락 최영준 최태호 이시우 하종진 등 창립자들은 아나키즘 조직가였다. 이 학교 역대 교장 중에는 안병준 선생과 시인 유치환이 있다. 안 선생은 둔옹과 모렴당의 직계손이고, 유치환 시인은 두 형제(유치진과 유치상)도 골수 아나키스트였다. 안의3동이라 하여 화림동, 심진동, 원학동이 있다. 세상의 소란에서 벗어나 이상세계를 꿈꾸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이 중에서도 진리삼매에 빠진다는 심진동은 특별하다. 서쪽으로 황석산과 거망산, 동쪽으로 기백산과 금원산 1200~1300m 높이의 산줄기 사이로 나 있다. 아나키스트 대회가 열린 곳은 바로 그곳 용추폭포 옆 용추사였다. 영남 제일이라는 용추폭포엔 네 산의 정혈이 모인다고 한다. 그러나 삼척 무릉계의 용추폭포 등 다른 용추폭포와 달리 비극적인 전설을 안고 있다. 그곳의 이무기가 오랜 치성 끝에 하늘로 오르려다 벼락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너른 물가에 둘러앉아 저마다 이상과 꿈을 토했을 그 젊은 아나키스트들이 그 전설을 모를 리 없다. 제 몸을 촛불처럼 태워 권력의 억압을 깨고, 아름다운 세상을 구현하려 했던 사람들. 그러나 우파나 좌파, 남쪽이나 북쪽 모두 배척했던 이상주의자들. 해방된 조국에서 그들의 승천을 반길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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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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