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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9.08 18:38 수정 : 2015.09.09 10:01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남과 북에 세 친구가 있었다.
10대 후반 조국 독립을 위해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자던 친구들이었다.
북으로 간 세 친구는 독립투쟁의 전설이 되었고 남으로 내려온 세 친구는 민족의 시인, 불멸의 독립투사 혹은 민주화 기수로 또 다른 전설이 되었다.

불의한 권력은 세 친구들을 죽게 했고, 지금도 지우려 한다.
어찌 어둠이 빛을 가릴까.
비록 만남은 보잘것없었지만, 그들이 걸어간 길은 위대했다.
빗돌을 만지며, 이 땅의 두 ‘세 친구’ 별자리를 마음에 새긴다.

남과 북에 세 친구가 있었다. 10대 후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자던 친구들이었다. 북으로 간 세 친구는 독립투쟁의 전설이 되었고 남으로 내려온 세 친구는 민족의 시인, 불멸의 독립투사 혹은 민주화의 기수로 또 다른 전설이 되었다.

김원봉(1898년, 경남 밀양)과 이명건(1901년, 경북 칠곡)은 중앙학교 선후배. 열아홉에 이미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넘어갔던 약산이었고, 대구에서 중학교 때부터 요주의 인물이었던 여성이었으니 두 사람이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한 것은 운명. 그해 가을 휘문학교 문예반 행사에서 김두전(1893년, 경남 동래)을 만났다.

세 친구는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하고, 백민 황상규를 찾아갔다. 백민은 친일모리배 처단으로 유명한 대한광복단 단원이었다. 백민은 ‘조국을 잊지 말라’며 세 친구에게 이런 이름을 주었다. 약산(산처럼, 김원봉), 약수(물처럼, 김두전), 여성(별처럼, 이명건). 그 자신이 조국의 한 줌 흙이고자 했던 백민다운 작명이었다.

이듬해 이들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모색할 때 3·1운동이 일어났다. 민중의 거대한 힘은 세 친구를 전율케 했고, 일제의 악랄한 진압은 피를 끓게 했다. 약수와 여성은 “국내에서 인민 대중을 조직해 싸워야 한다”며 고국으로 돌아갔다. 약산은 “무장력을 갖추지 못하면 독립은 이뤄질 수 없다”며 길림의 의군부를 거쳐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한다.

약산은 6개월간 무기와 폭탄 제조 및 조작법과 군사훈련 등을 받고 백민의 지도 아래 의열단을 결성한다. 백민에 이어 약산은 일제의 고위관료, 장교, 매국자들이 그 이름만 들어도 몸서리치는 의열단 의백이 되었다. 이후 약산은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임시정부의 2인자인 군무부장을 역임했다.

여성은 대구에서 혜성단을 조직해 친일파들을 겁박해 독립자금을 갹출하려 하다가 체포돼 3년간 복역했다. 노동자 조직화에 관심이 컸던 약수는 조선노동공제회를 결성했다가 구속된다. 출소 후 일본으로 건너간 약수는 무정부주의를 거쳐 사회주의 노선을 걷게 되고, 여성은 민족통일전선 노선을 걷는다. 약수는 1924년 귀국해 조선노농총동맹을 창설하고, 이듬해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하다가 붙잡혀 6년간 감옥살이를 한다. 여성은 조선의 현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숫자조선연구>(1~5권)를 출간하고, 1936년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에 연루돼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된다.

해방이 되었다. 세 친구는 서울에서 만나, 따로 또 같이 완전한 해방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길을 나섰다. 형세는 또 다른 식민체제였고, 정세는 일찌감치 분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세 친구의 선택은 달랐다. 그러나 좌우합작이라는 중간목표와 완전한 통일국가라는 최종목표는 같았다.

약산은 좌우합작을 기피하는 임시정부 쪽에서 떠나 인민공화당을 창당해 합작의 고리 구실을 하려 한다. 여성은 몽양 여운형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사회노동당, 근로인민당 등 중도노선을 걸었으며 좌우합작을 위해 좌파 3당의 합당에 가담하지 않았다. 1947년 몽양의 암살과 함께 좌우합작 노선은 피살당했다. 약산과 여성은 좌절했다. 설상가상 약산은 일제의 고등경찰이었던 노덕술에게 체포돼 능욕을 당한다. 약산과 여성은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때 북으로 가 돌아오지 않았다.

약수는 우파인 한국민주당에 가담했다. 오른쪽에서 좌우합작의 불씨를 살리려 했다. 그러나 한민당은 좌우합작을 거부했고 약수는 당을 떠나 합작을 추구했던 김규식의 진보적 민족주의 노선에 합류했다. 5·10 총선 때 동래에서 당선되고 초대 국회부의장에 올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에 앞장선다. 그러나 이승만 일당이 조작한 남로당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엮여 투옥된다. 사실 약수는 박헌영의 남로당과는 물과 기름 사이였다. 6·25 때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출옥해 월북한다.

그러나 북한 권력도, 세 친구의 꿈이 두려웠다. 외세로부터 완전한 독립과 평화통일! 게다가 셋은 김일성에게 전쟁 도발 책임도 물으려 했다. 약산은 국가검열상, 내각 노동상 등을 역임했지만, 결국 1958년 11월 숙청당했다. 김일성대 역사강좌장을 역임했던 여성도 약산과 함께 공식 역사에서 사라졌다. 두 사람은 무덤조차 모른다. 약수는 평화통일을 촉구하다가 1959년 반당반혁명분자로 몰려 숙청됐다.

윤동주(뒷줄 오른쪽부터), 문익환, 장준하, 정일권(앉은 이)이 함께 찍은 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남행한 ‘세 친구’에겐 한 장의 사진이 있다. 교복을 입은 윤동주(1917년 12월생), 문익환(1918년 6월생, 호 늦봄), 장준하(1918년 8월생, 별칭 장공)가 나란히 서 있다. 그 앞에는 생뚱맞게도 정일권이 앉아 있다. 평생 영달의 길(일제 관동군 장교에서 유신체제의 국무총리)만 달렸던 인물. 장준하특별법제정위원회는 지난해부터 ‘세 친구의 꿈’을 주제로 콘서트를 이어가고 있다. 8월엔 서울 은평문화예술회관에서 숭실중 후배들의 합주와 합창 속에서 열렸다.

동주와 늦봄은 중국 연변자치주 용정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함께 명동소학교를 다녔고, 은진중학교와 평양 숭실중학교를 거쳐 용정 광명중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릿쿄대로, 늦봄은 일본 니혼신학교로 유학을 갔다. 장공은 평안북도 의주 고성면에서 태어나 숭실중학교를 거쳐 신성중학교를 졸업했다. 목회자가 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먼저 온 늦봄과 함께 니혼신학교에서 수학했다.

불운은 동주에게 먼저 찾아왔다. 그는 1943년 ‘재쿄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에 걸려들어 후쿠오카감옥에 수감됐다. 그곳에서 생체실험이 의심되는 주사를 지속적으로 맞던 끝에 1945년 2월 옥사했다. 장공은 요시찰 대상인 부친에게 피해가 우려돼 학병에 입대했고, 중국 전선에 배치되자마자 탈출해 6천리 장정 끝에 중경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해방 후 장공은 목회자의 길을 가려 했지만 이승만, 박정희 독재 체제는 그냥 놔두지 않았다. 장공은 이번엔 이승만, 박정희에 맞서 민주화의 장정에 올랐다. 결국 1975년 8월 경기 포천 이동면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저명한 신학자가 되었던 늦봄은 장준하의 죽음 소식을 듣고는 강단에서 내려왔다. “이제 내가 죽을 차례”, “네가 가다가 못 간 길을 가겠다”는 것이었다. 1994년 1월 별세하기까지 19년 동안 그는 모두 8차례 11년간 수감됐다. 1989년엔 죽음을 무릅쓰고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회담까지 했다. 그러나 북쪽은 범민련 남쪽본부 재편 문제를 놓고 그를 안기부 프락치라고 몰아세웠다. ‘통일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는 그의 신념도 그렇게 남과 북에서 거부를 당했다.

그래도 남행한 세 친구는 다행히 유택이라도 마련했다. 동주는 용정의 동산 기독교인 묘지에 안장됐다. 장례예배를 집전한 이는 늦봄의 부친 문재린 목사였다. 학교 동창들은 아쉬움을 이렇게 비명에 새겼다. “춘풍도 매정하여라, 열매도 맺기 전에 꽃이 지었네….” 늦봄은 일흔을 앞두고 이런 글을 보냈다. “…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 너마저 늙어간다면 / 이 땅의 꽃잎들 /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동주야’에서)

늦봄은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됐다. 그의 작고 소식을 듣고 이번엔 고은 시인이 주저앉았다. “…오로지 당신은 조국과 겨레가 하나됨을 위하여 온몸의 세월을 다 바쳤으니 당신의 이름은 어느덧 겨레의 가슴이 되어, 이윽고 먼동 트는 아침으로 열리고 있거니….” 찢어지게 가난했던 장공은 고 김수환 추기경의 도움으로 경기도 파주 천주교공원묘지에 유택을 마련했다. “…비록 말 못 하는 돌부리 풀뿌리여, 훗날 반드시 돌베개의 뜻을 증언하리라.” 지인들은 사고 현장에 세운 추모비에서 이렇게 속울음을 삼켰다.

곽병찬 대기자
불의한 권력은 세 친구들을 죽게 했고, 지금도 지우려 한다. 그러나 어찌 어둠이 빛을 가릴까. 비록 만남은 보잘것없었지만, 그들이 걸어간 길은 위대했다. 그들의 운명은 비극적이었지만, 우정은 창연하다. 빗돌을 만지며, 이 땅의 두 ‘세 친구’ 별자리를 마음에 새긴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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