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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9.22 18:44 수정 : 2015.09.22 20:37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내포 지방 천주교도들이 가장 많이 숨어든 곳이 공주 유구와 마곡 사이(‘유마지간’) 산골들이었고, 그 중심이 마곡사 주변이었다.
도망쳐 온 이교도들을 마곡사는 일거리 먹을거리를 주며 감싸 안은 것이다.

천주교도 다음으로 피난 온 이들은 동학교도.
유마지간에서 해월은 수련하고, 포교조직을 완성했다. 해월이 처형당한 그해 백범 김구가 숨어든다.
명성황후 시해 이듬해 황해도 안악에서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옥에 갇혔다가 탈옥해 피신한 것이다.

마곡사 고방 앞에는 가장 아름답다는 굴뚝 하나가 있다. 수키와를 쌓아 단을 삼고, 그 위에 황토와 기와 파편을 첨성대처럼 쌓아올렸다. 꼭대기엔 작은 기와지붕도 얹었다. 고방 낮은 담 뒤에 숨어 지붕만 살짝 드러낸 그 소박함과 수줍음이 따듯하다. 대광보전, 대웅보전의 웅장함과 7층석탑의 화려한 장식에 머물던 시선을 굴뚝으로 돌리면 등이 절로 따듯해지고,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굴뚝을 조성한 이들은 뜻밖에도 천주교 신도들. 신해박해에서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근 100년 동안 조선에서 문둥이와 같은 존재가 천주교도였다. 보이기만 하면 잡아다 가두고 고문하고 죽였다. 반반하면 노비로 삼았고, 가산은 권력자의 전리품이었다. 내포 지방 천주교도들이 가장 많이 숨어든 곳이 공주 유구와 마곡 사이(‘유마지간’) 산골들이었고, 그 중심이 마곡사 주변이었다. 그곳까지 도망쳐 온 이교도들을 마곡사는 일거리 먹을거리를 주며 감싸 안은 것이다.

당시 스님들 처지도 비슷했다. 노비 기생 무당 백정 광대 공장 상여꾼과 함께 8천민 가운데 하나가 ‘중’이었다. 그들은 관에서 부과하는 온갖 노역과 함께 세금도 감당해야 했다. 마곡사는 충청도에서 가장 큰 절이어서 나름 권세가의 비호를 받긴 했지만, 종이나 벽돌을 공물로 바쳐야 했고, 유람하는 사대부와 관리들의 뒷바라지까지 해야 했다. 그런 마곡사 스님들은 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도들에게 땅을 주어 교우촌을 형성할 수 있게 했고, 그들이 만든 옹기나 기와를 사들였다. 천민과 난민의 슬픈 만남이었고, 고방 앞 굴뚝은 그 아름다운 결실이었다.

조선 후기 3정의 문란 속에서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한 민중들의 가장 절박한 소망은 수탈과 억압에서의 해방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쓰인 것이 <정감록>이었고, 그중에서도 십승지는 특별히 주목받는 대목이었다. 난리도 피하고 수탈도 피하면서 역병도 피할 수 있는 땅, 게다가 부쳐 먹을 농지가 있는 곳. 무이구곡 등 동천이 선비들의 이상향이었다면, 승지는 해방을 꿈꾸는 민중의 복지였다. 대표적인 복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유마지간이었다.

마곡사는 경우가 다르다. 이미 1400여년 전 신라의 의상대사가 그곳에 마곡사를 지었고,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이 중창했다. 그들이 선택한 이유는 명당 혈처라는 것. 마곡사 주변은 명당과 피난처가 공존하는 곳이었다. 기이한 복지다.

백두대간 태백산에서 호남정맥이, 호남정맥 소백산에서 금북정맥이 분기하여 안성 천안 아산을 거쳐 공주에 이르러 그 기운이 크게 똬리를 튼 것이 태화산이다. 태화산은 주봉 나발봉에서 두 팔을 벌려 청룡과 백호를 내보내고, 그 사이에 정맥의 기운이 뭉쳐 혈처를 이루는 곳에 군왕대가 있다. 남쪽의 국사봉도 두 팔을 벌려 태화산의 청룡과 백호에 호응한다. 그 안에서 발원한 상원골, 구계리, 샘골 등의 계류는 군왕대와 마곡사 사이를 흐르며 수태극 암태극을 이룬다. 게다가 밖으로는 무성산, 철승산, 광덕산, 옥녀봉 줄기가 겹겹이 에워싼다. 마치 닭이 알을 품듯 혈처와 피난처를 감싼다.

지세가 그러하니, 그악스런 관리나 외적이라도 함부로 들어와 패악을 부리기 힘들다. 역병이라도 골과 골 사이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도선국사가 “삼재가 들지 못하고, 천인의 목숨을 살릴 만한 곳”이라고 장담한 것은 그런 까닭이었을 것이다.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은 마곡사로 들어서는 다리 위에서 그 형국을 보고는 춤을 추며 이렇게 찬탄했다고 한다. “신령스런 땅이 푸른 시냇물과 접해 있고, 금 구슬이 솔숲 사이로 흐르나니….”

마곡사 건너편 샘골엔 현재 주민이래 봤자 열서너 가구뿐이다. 그러나 50여년 전만 해도 700~800여명이 살던 큰 마을이었다. 마곡사는 떠밀려 온 이들에게 땅을 내준 것은 물론 절 밑 동네에 고등공민학교를 지어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6·25 전쟁 통에 피난 온 사람들, 혹은 휴전 뒤에도 언제 전쟁이 재발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이사 오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1968년 1·21 사태와 울진·삼척지구 무장간첩 침투사건 때도 적잖은 이들이 들어왔다.

천주교도들이 유구, 사곡, 신평 등 유마지간으로 이주한 것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때부터였다. 신해박해에서 신유박해를 거치고 병인박해에 이르러서는 교우촌이 30~40곳에 이르렀다. 당시 교우들이 예배를 보던 곳은 이제 공소로 지정돼, 공주엔 산골 공소가 29개나 된다.

천주교도 다음으로 피난 온 이들은 동학교도. 수운 최제우가 서교(천주교)에 대항하기 위해 창시했지만,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내면에 모시고 있다는 평등사상으로 말미암아 조정은 불온시했다. 수운은 동학 창시 4년 만에 사형당한다. 2대 교주 해월 최시형도 전법을 받은 뒤 평생 피신생활을 해야 했다. 그가 피신을 멈춘 것은 관헌에 체포되고부터였다. 그사이 34년간 그가 거쳐간 피난처는 무려 200여곳. 유마지간엔 서너 차례 다녀갔다. 그곳에서 해월은 수련하고, 교리를 정비하고, 제자를 기르고, 포교조직을 완성했다.

1884년 늦가을 국사봉 서남쪽 끝자락 가섭암에 숨어든 해월은 그곳에서 수제자 의암 손병희와 박인호(천도교 4세 대도주)를 길렀고, 교화조직인 육임제를 창설했다. 이듬해 6월 다시 마곡리에서 2개월간 은신했고, 1891년 2월 또 신평에 은신하며, 인즉천, 사인여천 등 동학의 핵심 교리를 완성한다.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기 3년 전의 일이다. 그가 이렇게 유마지간에 마음 놓고 찾아들 수 있었던 것은 창시자 수운이 1864년 처형당한 이후부터 동학촌이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1892년 교조 신원 운동 때 공주읍내에 모인 교도가 1만7천여명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동학촌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동학농민전쟁의 마지막 대회전이 벌어진 곳도 공주의 우금치였다.

해월이 처형당한 그해(1898년) 백범 김구가 숨어든다. 백범은 1893년 18살에 동학에 입문하여, 보은에서 해월 선생을 만나고 접주가 되어 농민전쟁 때 해주성 공격에 나섰다. 명성황후 시해 이듬해 황해도 안악에서 일본군 장교 쓰치다 조스케를 죽이고 옥에 갇혔다가 탈옥해 피신한 것이었다. 백범은 그곳에서 수계를 받고 샘골 백련암에서 잠시 수행했다. 백범은 이듬해 환속해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나서, 상해임시정부의 수반으로서 일제의 패망과 조국의 독립을 맞이한다.

당시 동학과 천주교 교리는 조선 민중에게 혁명적이었다. 천주교는 신 앞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했고, 동학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하여 신분질서는 물론 군신의 관계도 흔들었다. 특히 사인여천(事人如天, 사람 섬기기를 한울 섬기듯 하라) 사상은 보국안민(保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 등 변혁운동의 뿌리가 되었다.

처음 군왕대를 마주했을 때 피난처에 압제의 상징인 ‘군왕’의 혈처가 있다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어떻게, 왜 피난 왔는데 그 중심에 또 다른 군왕을 세우려 하는가. 그러나 유마지간의 군왕은 군림하고 억압하는 지배자가 아니었다. 해월이 그랬고 백범이 그랬듯이 억압과 수탈로부터 민중을 해방시키고, 자유와 평화로 이끄는 지도자였다. 그런 난민의 비원이 그곳에 새겨진 것이었다.

조카를 내쫓아 죽이고 왕좌를 찬탈한 세조가 훗날 이곳에서 한숨 쉬며 했다는 말이 새롭게 들린다. “내 비록 왕이지만, 이곳은 만세토록 변함이 없으리라.” 군림하고 억압하는 권력은 곧 사라진다. 변치 않는 왕도란 예수와 부처와 한울이 간 길이다. 새 시대의 군왕은 예수가 말구유에서 태어났듯이, 저 억압받는 이들 중에서 태어나리라. 세조는 타고 온 가마 대신 소를 타고 떠났다고 한다. 황금 칼과 수레란 얼마나 부질없는 존재인가.

곽병찬 대기자
마곡사에 머물렀다는 매월당 김시습은 제 묘비에 단 두 글자만 새기도록 했다. 몽사! ‘여기 꿈꾸다 죽은 늙은이 묻히다.’ 지금도 군왕대엔 세상의 권력과 영화를 탐하는 자들이 오르내린다. 매월당 묘비명은 그들에게 이렇게 경책한다. ‘아서라, 헛된 꿈속에서 죽을 자들이여.’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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