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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9.27 17:07 수정 : 2016.09.27 19:58

곽병찬의 향원익청

이토에게 상동청년회는 ‘턱밑의 폭발물’과도 같았다. 이토가 심혈을 기울인 을사5조약 체결에 대해 장안에서 내놓고 반대운동을 했던 게 바로 그들이었다. 청년회는 체결 추진 때부터 상동교회에서 매일 구국기도회를 열어 여론을 환기했고, 정순만과 이희간은 외부대신 박제순의 집에 침입해 칼을 들이대며 결사반대를 압박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고통받는 자에게 평안을!’ 전덕기가 스크랜턴에게 이어받은 복음의 사명이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라고 믿었다. 백범은 그런 그를 두고 이렇게 회고했다. “철저한 실천 신앙과 철저한 애국심을 강조했으며, 과제를 앞에 두고는 결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림 속 태극기 모양이 현재와 일부 다른 부분은 독립운동 당시의 태극기를 참조하였습니다.

1906년 여름, 서울 남창동 1번지 상동교회 담임목사 윌리엄 스크랜턴은 메리만 해리스 감독에게 이끌려 필동의 이토 히로부미 통감 관저로 갔다. 해리스는 미국 감리교 선교회의 한국과 일본 책임자로,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 것을 두고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떠벌리던 지독한 친일파였다. 이토는 해리스를 시켜 스크랜턴을 불러온 것이었다.

이토는 이렇게 스크랜턴을 추궁했다. “상동교회 (엡윗) 청년회는 무슨 목적으로 결성됐나?” “선교 목적이다.” “3천~4천명이나 된다는데 모두가 신도인가.” “아닌 사람도 있다.” “사업 목적과 다른데 신자가 아닌 사람을 내보낼 수 없는가.” 이토의 요구는 청년회를 해산하라는 것이었다.

이토에게 상동청년회는 ‘턱밑의 폭발물’과도 같았다. 이토가 심혈을 기울인 을사5조약 체결에 대해 장안에서 내놓고 반대운동을 했던 게 바로 그들이었다. 청년회는 체결 추진 때부터 상동교회에서 매일 구국기도회를 열어 여론을 환기했고, 정순만과 이희간은 외부대신 박제순의 집에 침입해 칼을 들이대며 결사반대를 압박했다. 조약 체결 후엔 엡윗 청년회 전국연합회 회장 전덕기는 총회를 소집해 덕수궁 대한문 앞 ‘도끼 상소’와 종로에서의 대중집회를 결의했다. 이와는 별도로 을사오적 처단을 위해 평안도 장사들로 암살단을 조직했다. 당시 청년회 황해도 책임자가 김구였다.

결국 상동청년회는 11월 해산됐다. 스크랜턴은 이듬해 미국의 선교본부에 해리스의 교체를 건의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선교사는 물론 목사직도 사임했다. 대신 전덕기를 상동교회 담임목사로 추천했다.

전덕기는 담임을 맡고 나자 더 큰 일을 벌였다. 청년회 열성 회원이었던 최남선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상동교회 뒷방에는 전 목사를 중심으로 이회영, 이상설, 이준, 이갑, 이승훈 등 지사들이 무시로 모여 국사를 모책하였는데, 그 방은 이준 열사의 헤이그 밀사 사건의 온상이었다.”

헐버트 선교사는 전덕기에게 1907년 6~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전했다. 전덕기는 이회영 등과 협의해 특사 파견을 상소하기로 했고, 처 이종누이인 김 상궁을 통해 고종에게 상소문을 전했다. 고종의 신임장은 헐버트를 통해 전덕기에게 전해졌다. 3인의 밀사 가운데 정사 이상설과 부사 이준은 청년회 회원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비를 마련해 건네준 정순만은 청년회 서기였고, 미국에서 통역사를 헤이그로 보낸 박용만은 부회장이었다.

상동청년회는 해산됐지만, 상동교회에는 청년학원이 있었다. 1904년 청년회가 세운 학교였다. 당시 다른 학교들은 대개 초등학교 과정이거나 일어나 영어, 측량기술 등만 가르치는 특수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상동학원은 처음부터 3년제 중등과정으로 출범했다. 교사도 각 분야 전문가들이었다. 국문학자 주시경이 국어, 동경물리학교 출신의 류일선이 수학, 스크랜턴 목사의 모친 메리 스크랜턴이 영어, 헐버트와 이동녕이 세계사와 국사, 김진호가 한문을 맡았다. 한국군 부교였던 이필주는 교련을 가르쳤다. 학생들은 목총을 메고 군가를 부르며 구보나 행진을 했고, 이는 일제에 대한 무언의 시위였다.

1907년에는 수업연한을 4년제로 하고 천문, 기하, 대수, 화학, 생물학, 경제학, 윤리학, 법학 등을 포함시켜 전문 지식인 양성에 주력했다. 전덕기는 성경 과목을 가르쳤다. 이승만이 잠깐 원장을 맡았고 애국지사 이회영, 남궁억, 조성환, 최남선, 장도빈, 노병선, 이중화 등도 학감 혹은 교사로 참여했다. 부설 야학도 설립해 일하는 이들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배화학교 교사였던 남궁억, 배재학당 부교장이었던 강매, 언론인 장지연 등 당대의 명사들이 교사였다. 청년학원은 이밖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지 <가정잡지>를 발간하고, 수학 전문지 <수리학잡지>도 냈다. 주시경 책임 아래 하기 국어강습회도 개설했다. 이들 교사진은 머잖아 구국운동과 독립운동의 거대한 뿌리 신민회 결성의 주춧돌이 되었다.

신민회는 1907년 4월 양기탁을 총감독, 이동녕을 총서기로 하여 출범했다. 안창호가 미국에서 귀국하고 불과 2개월 만이었다. 발족을 위한 논의와 준비는 1906년초 이미 시작되었다. 전덕기를 도와 청년회와 학원을 이끌던 김진호는 이렇게 전한다.

“상동청년회는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에 잠깐 예배와 기도를 드리고 시사논평이 있었는데 … 청년회의 간부 몇 사람이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따로 모여 결사구국을 목적하고 회를 조직하니 곧 신민회였다.” 발기인 7인 가운데 양기탁과 안창호를 제외한 전덕기, 이갑, 유동열, 이동휘, 이동녕 등은 청년회 회원이었다. ‘따로 모여 논의한 사람’ 중엔 이회영, 이승훈이 포함돼 있었다.

전덕기는 신민회의 재무와 서울 총감을 맡았다. 재무는 궂은일이었다. 신뢰가 없이는 맡을 수도 맡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일을 전덕기는 독립협회 시절부터 담당했다. 한번은 고종 황제가 청년학원을 위해 종로의 단성사 건물을 하사하려 했다. 전덕기는 관의 개입을 우려해 사양했다. 송병준이 사람을 시켜 거액을 희사할 뜻을 전해왔을 때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하지만 필요할 때면 그의 숙부 소유의 가옥까지 저당 잡히기도 했다.

일제는 전덕기의 ‘암약’을 눈치채고는 있었지만, 함부로 다룰 수 없었다. 상동교회는 정동교회와 함께 미국 감리교 선교회의 중심 교회였다. 이토가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절명했을 때에도 배후 세력으로 전덕기와 이른바 ‘상동파’를 지목할 정도로 위험시했지만, 억지로 조작까지 할 순 없었다.

1910년 말 안명근 군자금 모금 사건(안악사건)으로 신민회 조직이 드러났다. 기회만 엿보던 일제는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 사건’을 조작해 양기탁, 이승훈, 윤치호, 유동열, 안태국 등 신민회 회원 및 애국지사 600여명을 검거하고 122명을 기소했다. 1심 재판부는 105명에게 유죄판결을 했다. 이른바 ‘105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1913년 7월 대구복심법원은 105명 가운데 99명을 무죄로 석방했다. 조작이었음을 재판부는 인정한 것이었다. 전덕기도 체포했지만, 처벌할 순 없었다. 다른 사람처럼 혐의를 조작해 처벌했다가는 외교 문제로 비화할 수 있었다. 전덕기는 3개월여 만에 풀려났지만, 그때 당한 고초로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됐고, 3년 뒤 세상을 뜨게 된 원인이 됐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고통받는 자에게 평안을!’ 전덕기가 스크랜턴에게 이어받은 복음의 사명이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라고 믿었다. 백범은 그런 그를 두고 이렇게 회고했다. “철저한 실천 신앙과 철저한 애국심을 강조했으며, 과제를 앞에 두고는 결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전도에 나서는 후배 목사들에게 ‘나막신과 마른 쑥, 의지(약식 관)’를 상비하라고 충고했다. 당시 빈민가였던 회현동 남·북창동 일대엔 전염병 등으로 죽어 아무도 거두지 않는 주검이 곳곳에 있었다. 그는 이런 주검을 거두어 장례를 치러주곤 했는데, 그럴 때면 부패한 시체에서 흘러나온 체액 때문에 나막신을 신고 방 안에 들어가야 했고, 악취를 막기 위해 마른 쑥으로 코를 막아야 했으며, 의지에 시체를 담아 장례를 치러야 했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문> 1914년 3월23일치는 놀랍게도 그의 부음을 알렸다. “슬프다, 오늘날 세상을 떠난 전덕기씨여…”로 시작되는 기사는 비록 1단이었지만 23줄이나 되는 장문이었다. 총독부 기관지조차 외면할 수 없는 죽음이었던 것이다.

장례식에는 애국지사는 물론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장사꾼, 천민, 창기들까지 몰려와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그는 경기도 고양군 두모면 수철리 묘지에 묻혔다. 하지만 일제는 그에게 유택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장을 강요해 그의 유해는 화장돼 한강에 뿌려졌다. 착잡하게도 일제말 교단 지도부는 천황에게 교회를 봉헌했고,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그를 외면했다. 전덕기와 상동파 청년들이 실천한 공의는 상동교회 박물관에 흔적으로 조금 남아 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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