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의 향원익청
서북학회는 1908년 초 설립됐다. 조선의 지식인 민중 사이에선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해보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이를 이동휘는 ‘독립의 기초’라고 했고, 박은식은 ‘전국 동포의 무궁한 복지를 가져올 단합정신’이라고 평가했다. 서북학회 초대 임원은 이동휘 안창호 박은식 이갑 유동열 최재학 등이었다.
이제 낙원동 대학로는 사라졌다. 대신 오갈 데 없는 노인네들과 그들을 유혹하는 박카스 할머니, 어디서고 쫓겨나는 가난뱅이들과 성적 소수자들이 그곳을 차지하고 있다. 도로가 한산하고 추레하다 보니 쓰레기차들이 죽 늘어서 악취를 풍기기도 한다. 슬럼이다. 서북학회 건물도 1977년 도심 개발의 미명 아래 철거됐다. 교육구국의 다짐도 함께 철거됐다.
사시사철 바글대는 인사동 길 중에서도 가장 번잡한 곳이 인사동4거리다. 공평동과 낙원동을 잇는 길과 인사동길이 만나는 교차로여서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는 까닭이다. 다만 낙원동 쪽만은 한산하다. 몇 걸음만 옮겨도 풍경이 급격히 바뀐다. 천연색에서 무채색으로 바뀌면서 오가는 이들도 청년에서 중장년, 노년으로 변한다. 낙원상가 북단 삼일로에 이르면 돌연 암전, 낡은 흑백사진 속으로 빠져든다. 하지만 누가 알랴. 불과 60여년 전만 해도 그곳이 서울의 대학로였다는 사실을.
안국역에서 낙원상가를 거쳐 남산1호터널로 향하는 도로가 삼일대로다. 3·1독립만세운동을 기리자는 것이니 갸륵하긴 하지만, 이 그늘지고 한적한 거리를 ‘대로’라 한 것은 께름칙하다. 그러나 조금만 눈여겨보면 그럴 만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편도 4, 5차로의 광폭에 교통량도 적다 보니 보기 훤하다. 중앙분리대가 화단으로 되어 있는 것도 이채롭다. 서울에선 세종대로에서나 볼 수 있는 조경이다. 도로 양편 가로수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플라타너스다. 유럽의 풍광 좋은 길을 연상시킨다. 거기에 운현궁, 수운회관, 운현궁 양관, 박영효 옛집, 관립교동왕실학교, 덕성여대 옛 캠퍼스, 탑골공원 등 근대사의 명소들이 주변 곳곳에 박혀 있다. 거기에 서북학회 회관….
인사동4거리에서 낙원동으로 가다 보면, 금싸라기 땅에 난데없이 4층짜리 기계식 주차장이 나타난다. 종로 건국주차장이다. 표지석 하나가 ‘서북학회 회관 터’임을 알려준다.
서울 광진구 화양동 건국대학교 캠퍼스 안에는 근대 서양식 건물 하나가 있다. 건국대학교 설립자 상허 유석창 기념관이다. 크기는 작지만 붉은 벽돌을 쌓아 올리고 하얀 화강암으로 모서리를 장식하고, 중앙에 자그마한 돔을 세운 것이 나름 고풍스럽다. 유석창이 일제 말 매입했다가 해방 후 단국대, 건국대 등의 교사로 쓰고, 1977년 해체했다가 198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서북학회 회관이다.
서북학회는 1908년 초 설립됐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은 일본의 손아귀로 거의 다 넘어갔다. 조선의 지식인 민중 사이에선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해보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이상재 남궁억 민영환 등이 국민교육회를 조직하고 학교 설립과 신교육 보급 운동에 나섰다. 을사늑약과 함께 국민교육회는 해체된다. 이듬해 10월 평안도, 황해도 출신의 박은식 김병도 신석하 등은 서우학회를 설립하고, 11월엔 오상규 이준 이종호 등 함경도 출신들이 한북흥학회를 결성한다. 일제의 탄압에 맞서기 위해 두 학회가 1908년 1월 통합한 것이 서북학회다. 이를 이동휘는 ‘독립의 기초’라고 했고, 박은식은 ‘전국 동포의 무궁한 복지를 가져올 단합정신’이라고 평가했다. 서북학회 초대 임원은 이동휘 안창호 박은식 이갑 유동열 최재학 등이었다.
서북학회 출범 1년 전 비밀결사체 신민회가 결성됐다. 양기탁 박은식 등 당시 한국의 거의 모든 구국활동가들이 참여했다. 서북학회 임원들은 대개 신민회 발기인이었고, 서북학회 발기인 33인 역시 대부분 신민회 비밀회원이었다. 신민회는 창립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구국운동에 나선다. 국민교육회의 정신을 이어받긴 했지만, 체계화하고 전국화했다. 운동의 중점을 학교 설립과 함께 교사 양성에 두었고, 나아가 일제에 무력으로 맞서기 위해 국외에 무관학교를 세우기로 했다. 신민회는 비공개 결사이기 때문에 공개적인 대중조직이 필요했다. 그 역할이 서북학회에 맡겨졌다. 1911년 양기탁 등 신민회 지도부 16인이 보안법 위반 혐의로 피소됐다. 이들에 대한 판결문은 신민회의 교육구국운동 내용을 잘 설명해준다. “…학교 및 교회를 세우고, 나아가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문무쌍전 교육을 실시하여 기회를 타서 독립전쟁을 일으켜 구 한국의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서북학회는 창립과 함께 회관 건축에 나섰다. 청나라 건축가를 초빙해 건물을 세웠다. 굳이 르네상스 양식을 취한 것은 새로운 문예 및 학예 부흥의 진원지 구실을 하겠다는 의지에서였다. 그해 말 회관이 준공되자 서북학회는 협성학교를 설립했다. 교사 양성 학교였다. 전국에 분교 63개도 세웠다.
병탄 후 일제가 이 불온한 단체를 가만둘 리 없었다. 1910년 9월 서북학회가 해산됐고, 신민회는 1910년 12월 안명근 사건을 계기로 일제가 조작한 데라우치 총독 암살모의 사건에 휘말려 해체됐다. 지도부와 회원 105인이 기소되는 초대형 조작사건이었다. 그러나 회관은 사라지지 않았다. 신민회의 약속도 서북학회의 정신도 회관과 함께 유지됐다. 협성학교는 일제의 압력으로 오성학교로 개명했다가 1918년 폐교된다. 빈 회관으로 재정난으로 허덕이던 보성전문학교가 들어왔다. 1921년 일제의 통제가 느슨해지자 최시준은 회관에 다시 오성강습소를 열었고, 오희원 허헌이 합류하면서 1927년 협성실업학교로 개편됐다. 회관은 1938년 화신백화점 주인 박흥식을 거쳐 1941년 유석창 민중병원 원장에게 넘어갔다.
해방이 되면서 회관은 독립지사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기치를 교육구국에서 교육입국으로 바꾸고, 우리 손으로 우리 대학을 설립하려고 했다. 일제 민립대학설립운동 때부터 꿈이었다. 회관은 교사이면서 동시에 사학의 인큐베이터였다. 유석창이 사설강습소 건국의숙을 거쳐 1946년 건국대의 전신 조선정치학관을 열었다.
두 달 전엔 해공 신익희와 국민대학설립기성회가 입주했다.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이 고문 혹은 명예회장을 맡고, 백낙준 이태규 주윤제 등 교육운동가 40여명이 기성회 임원으로 참여했다. 국민대학이라고 한 것은 지금의 ‘국민대학’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세운 대학교라는 취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당시 한국에는 일제가 세운 경성대학을 토대로 미군정청이 억지로 통폐합해 만든 서울대학교가 유일했다.
이사진 중에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장형이 있었다. 그는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대주던 대지주 박기홍의 부인 조희재로부터 대학 설립에 필요한 토지를 기증받기로 하고 있었다. 문제는 신익희가 김구를 떠나 한민당과 이승만 쪽으로 노선을 바꾸면서 불거졌다. 장형은 강점기 일제와 가장 처절하게 맞섰던 대종교 중진이었다. 북로군정서군 소속으로 사선을 넘나들던 그에게, 친일파와 타협해 단독정부를 추구하던 이승만은 민족배반자였다. 장형은 기성회에서 탈퇴해 별도의 대학 설립에 나섰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1947년 11월 해방 후 한국에선 처음으로 4년제 대학 설립 인가를 받은 단국대였다. ‘단군’과 ‘애국’에서 한 자씩 가져와 ‘단국’이라 하였다. 홍익인간에 바탕한 구국 자주 자립을 창학 정신으로 삼았고, 설립일을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인 11월3일로 하였다.
신익희의 국민대학설립기성회는 국민대학관을 거쳐 1948년 4년제 대학 설립 인가를 받았다. 유석창의 조선정치학관은 1949년에야 건국대 설립 인가를 받았다. 한때 회관엔 건국대, 단국대 그리고 국민대가 동거하기도 했다. 회관 건너편엔 1950년 초급덕성여자대학교가 들어섰다. 삼일로 일대는 이 나라의 대학로가 되었다. 최초의 근대교육시설이 들어섰고, 고등교육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우리 스스로 지은 대학이 처음 들어섰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동숭동 서울대학교 주변은 대학로일 수 없었다.
이제 낙원동 대학로는 사라졌다. 대신 오갈 데 없는 노인네들과 그들을 유혹하는 박카스 할머니, 어디서고 쫓겨나는 가난뱅이들과 성적 소수자들이 그곳을 차지하고 있다. 도로가 한산하고 추레하다 보니 쓰레기차들이 죽 늘어서 악취를 풍기기도 한다. 슬럼이다.
낙원상가를 향해 침을 뱉는다. 박정희 정권이 도심 재개발이란 이름 아래 1969년 세운 주상복합건물. 상가의 육중한 콘크리트 덩어리는 탑골공원과 서북학회 회관 사이에 걸터앉아 낙원동 대학로의 숨통을 조이는 형국이다. 서북학회 건물도 1977년 도심 개발의 미명 아래 철거됐다. 교육구국의 다짐도 함께 철거됐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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