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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0.25 18:27 수정 : 2016.10.26 10:34

1919년 3월17일과 22일 안동 예안에선 두 차례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57살의 할머니 김락은 만세운동에 나섰다. 일제 경찰과 헌병은 그런 김락을 찰거머리처럼 뒤쫓았다. 일제에 김락은 독립운동 정보를 무진장 캐낼 수 있는 광맥이었다. 그들이 김락의 두 눈을 빼앗을 정도로 혹독하게 고문을 했던 건 그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그가 가고 난 자리엔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았다. 일제가 남긴 <고등경찰요사> 중 ‘취조 중 실명한 이중업의 처’로만 남아 있다. 여느 여인이 그렇듯이 죽어서도 합장묘 비석에 ‘기암 진성 이공’의 처 ‘의성 김씨’로만 기록돼 남아 있다. 2001년 그가 독립유공자 명단에 오르기까지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 여자이기 때문일까?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고등경찰요사>를 살펴보던 김희곤 교수(안동대)는 뒤통수를 맞은 듯 아찔했다. <고등경찰요사>는 일제의 경상북도 경찰국이 독립운동의 ‘소굴’로 지목된 이 지역의 주요 사건과 인물에 대한 수사 과정과 결과 그리고 영향 등을 정리한 자료로, 일제 경찰의 극비문서이자 고등계 형사들의 필독서였다.

“…안동의 양반 고 이중업의 처는 대정 18년(1919년) 소요(만세운동) 당시 수비대에 끌려가 취조받은 결과 실명했고, 이후 11년 동안 고생하다가 소화 4년(1929년) 2월 사망했기 때문에 아들 이동흠은 일본에 대한 적의를 밤낮으로 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구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관장이기도 한 김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경북 특히 안동의 독립운동사에 대한 권위자다. 그러나 ‘일제에 두 눈을 잃은 이중업의 처’는 금시초문이었다. 부끄러웠다. 물론 기암 이중업은 잘 알고 있었다. 병탄과 함께 단식 끝에 순절한 향산 이만도의 맏아들로, 을미의병의 봉화를 올린 선성의진의 전사였고 대한광복회 독립자금 모금운동, 1차 유림단 의거 등에 연루돼 투옥됐던 지사….

이중업의 제적등본을 뗐다. 처는 의성 김씨 김진린의 딸이었다. 다시 김진린의 제적등본을 뗐다. 김진린의 4남3녀 가운데 막내가 김락이었다. 백하 김대락의 동생이었다. 후손에게 물었다. 돌아온 답은 간단했다. “선대 할머니 중에 일제 경찰에 끌려가 눈이 멀어 돌아가셨다는 분이 있다던데….” 알 만한 이들을 찾아다니며 수소문했다. 하지만 일화 한 토막, 기록 한 줄 없었다. ‘여자, 그것도 다른 집안에서 온 여자’여서 그런가?

1919년 3월17일과 22일 안동 예안에선 두 차례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57살의 할머니 김락은 만세운동에 나섰다. 일제 경찰과 헌병은 그런 김락을 찰거머리처럼 뒤쫓았다.

한반도에서 일제에 가장 비타협적이었던 곳이 안동이었다. 안동에서도 가장 저항하던 곳이 진성 이씨, 퇴계 후손의 집성촌인 하계마을이었다. 그 중심엔 자정 순국한 향산의 집안이 있었다. 김락은 그 집안의 안주인이었다. 본때를 보이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시아버지 향산은 1896년 예안의병을 창의하고 대장도 잠시 맡았다. 예안의병은 경북 상주 태봉의 수비대를 습격했고,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안동과 예안 일대 1천여가구를 방화했다. 그렇다고 향산을 잡아들일 수 없었다. 안동 사회와 영남 유림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너무 높았다. 벌집을 쑤시는 게 될 수 있었다.

1910년 국권이 박탈됐다. 향산은 죽음을 작정하고 단식에 들어갔다. 전국의 유림 지도자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러나 향산은 요지부동이었다. 단식은 24일간 계속됐다. 곁에서 수발을 들고, 손님들을 맞이하는 건, 제대로 먹지도 잘 수도 없었던 김락의 몫이었다.

향산이 순절하고 두달 만에 고향 내앞(임하면 천전리)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큰오빠 김대락이 66살 노구를 이끌고 12월24일 집안의 청장년은 물론 만삭인 손부와 손녀까지 데리고 서간도로 망명을 떠났다. 고향엔 단 한 오빠만 남겨두었다. 백하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태어난 손주의 태명을 ‘쾌당’이라 지었다. “통쾌하도다!”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 태어난 것만으로도 그렇게 기뻤다. 해가 바뀌면서 이번엔 큰형부 석주 이상룡이 문중 30여가구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김락은 졸지에 사고무친이 되었다.

백하와 석주는 전 재산을 팔아 조성한 자금으로 서만주에 독립의 터전을 일궜다. 경학사를 세우고, 부설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류인식, 김동삼이 실무책임자로 경학사를 이끌고, 신흥강습소를 신흥중학교, 무관학교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백하는 4년 만인 1914년 주검으로 비밀리에 귀향했다. 아버지처럼 따르던 오빠였다. 그러나 대문 앞에 초소를 세우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일제 경찰 때문에 김락은 통곡할 수도 없었다.

그즈음 남편도, 맏아들 동흠, 사위 김용환도 독립운동에 뛰어들고 있었다. 30대에 태봉전투에 참여했던 이중업은 1914년 봉기를 유도하는 ‘당교격문’을 예안과 봉화에 뿌렸다. 동흠은 1918년 대한광복회 일원으로, 친일 갑부에게서 군자금을 확보하다가 4월 체포됐다. 그의 집은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 피신처이기도 했다.

김용환은 이미 3차례나 감옥을 드나들고 있었다. 의성 김씨 학봉 김성일가의 종손인 그는 1907년 이강년 의진에 입진해 안동 영양 예천 문경 등의 전투에 참전했고, 1909년엔 김상태 의병과 함께 봉화 서벽전투에 참전했다. 1909년엔 비밀독립운동 단체인 용의단을 조직해 매국노 일진회 간부들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다. 1919년 1월엔 만주로 망명하려다 신의주에서 체포돼 압송됐다.

일제에 김락은 독립운동 정보를 무진장 캐낼 수 있는 광맥이었다. 그런 김락을 만세운동 현장에서 체포했으니 얼마나 쾌재를 불렀을까. 그들이 김락의 두 눈을 빼앗을 정도로 혹독하게 고문을 했던 건 그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지난해 제작된 창작오페라 ‘김락’(부제 ‘민족의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온갖 고문에도 김락은 자백은커녕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는다. 오히려 고문 경관 요시다를 꾸짖는다. “사쿠라야, 사쿠라야, 이른 봄의 햇살을 만끽하라, 찰나에 사라지는 너의 운명이 가련하고 불쌍하구나.” 화가 난 요시다는 달군 인두를 들이댄다. 김락은 굴하지 않는다. “간절히 원하면, 꿈은 현실이 되는 법. 기필코 내 눈으로 찬란한 광명의 아침을 보리라.” 요시다는 결국 그의 두 눈을 빼앗는다. 세상의 빛, 찬란한 광명의 아침을 지져버린다. 상상력이 빚어낸 허구다. 하지만 ‘수비대의 취조 결과 (김락이) 실명했다’고 일제의 기록을 보면, 전체적인 맥락은 진실과 맞닿아 있다.

더 큰 시련은 그 뒤 닥친다. 남편은 3·1만세운동 직후 파리 베르사유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을 하는 1차 유림단 의거에 가담한다. 승전국들은 외면했다. 남편은 다시 심산 김창숙 등과 함께 중국의 손문 등에게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2차 청원서를 갖고 중국으로 떠나기 직전인 1921년 세상을 뜬다. 아, 이제 남편마저 사라졌다.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살아서 아들의 길을 막고, 며느리에게 짐만 지워서야 되겠는가? 김락은 자결을 시도한다.

맏사위는 1920년 다시 의용단을 조직해 만주의 독립군에 보낼 군자금 모금에 나섰다가 1922년 4번째로 구속된다. 출소 후 맏사위는 안동 최고의 파락호로 변신한다. 노름판에 뛰어들어 종가의 전답 250여 마지기와 임천서원 및 위토 250여 마지기, 그리고 300년 가까이 내려오던 학봉종택을 3번이나 처분했다. 그가 날린 종택을 문중에서 되사서 주면 또 팔아 노름 밑천으로 쓰기를 3번이나 거듭한 것이다. 문중에선 종손을 내쫓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맏사위의 파락호 짓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군자금을 조성하고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얼마나 감쪽같았는지 가족들도 몰랐다. 눈멀고 귀 어두운 장모 김락으로선 가슴만 쥐어뜯을 일이었다. 둘째 사위 유동저도 안동 청년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얼마지 않아 두 아들 동흠과 종흠이 수감된다. 동흠은 1925년 동생 종흠과 함께 만주에 독립군기지 설립을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이듬해 함께 체포된다. 그가 두 번째로 자결을 시도한 건 이때쯤이었을 것이다. 봉사로 7년간 앞길을 막았으면 됐지….

그는 1929년 세상을 뜬다. 그가 가고 난 자리엔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았다. 시아버지와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두 아들이 감옥에 갇혔을 때 지팡이에 의지해 홀로 배회하던 하계마을도 안동댐 건설과 함께 흔적도 없이 수몰됐다. 그는 일제가 남긴 <고등경찰요사> 중 ‘취조 중 실명한 이중업의 처’로만 남아 있다. 여느 여인이 그렇듯이 죽어서도 합장묘 비석에 ‘기암 진성 이공’의 처 ‘의성 김씨’로만 기록돼 남아 있다. 2001년 그가 독립유공자 명단에 오르기까지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 여자이기 때문일까?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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