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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1.08 18:30 수정 : 2016.11.08 19:07

곽병찬의 향원익청

김시현의 싸움은 해방 후에도 계속됐다. 일제하에서 민족해방투쟁이 해방 후 민주화를 위한 투쟁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친일 모리배와 결탁한 독재자 이승만, 학생의 피로 집권했지만 권력투쟁에 여념 없었던 장면 정권,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 김시현에게 이들은 민족과 민중을 배반한 적이었다.

“전쟁에 지고 부산으로 쫓겨온 자가 … 무슨 군왕처럼 날뛰고, 법을 무시해가면서 대통령을 더 해보겠다고…, 그래서 없애버리려는 것일세.” 6월 대구로 가 의열단 동지 유시태와 만나 거사를 결의했다. 저격을 자청한 유시태에게 권총을 넘겼다. 거사 전날인 6월24일 부산 영도 하숙집 근처에서 유시태와 마지막 술잔을 나눴다.

1952년 8월22일 오후 1시 부산지방법원 4호 법정. 이승만 대통령 저격 음모 사건의 주범 김시현 피고인은 ‘살해의 동기’를 묻는 김용식 재판장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이 대통령은 동란이 발발하자 승용차를 타고 도망가 버리고, 백성들보고는 안심하라고, 뱃속에도 없는 말을 하고, 한강철교까지 끊어 선량한 시민들로 하여금 남하조차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동아일보>)

두 달 전 6월25일 임시수도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열린 ‘6·25 멸공통일의 날’ 기념대회에서 대통령 저격 사건이 있었다. ‘불행하게도’ 독일제 권총이 불발돼 미수에 그쳤다. 현장에서 유시태가 체포됐고, 또 국회의원 김시현은 이튿날 자택에서 체포됐다.

“… 그 후에는 또 (국민)방위군 사건이며 거창(양민학살) 사건 등으로 민족 만대의 역적이 된 신성모를 죽이기는커녕 도리어 주일대사까지 시켰으니, 그런 대통령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일국의 원수로서 의당 할복자살을 해도 용납이 안 될 것임에도 한마디의 사과조차 없으니 그게 대통령이란 말인가.” 그의 목소리는 당당했지만 발음은 짧고 어눌했다. 혀가 보통 사람보다 4분의 1쯤 짧은 탓이었다.

영화 <밀정>의 막바지 장면. 주인공 김우진은 일제 통치기관을 파괴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폭탄과 무기를 밀반입했다가 체포된다. 온갖 고문을 당하던 중 울컥 피를 쏟아낸다. 피 속엔 잘린 혀의 일부가 섞여 있었다. 스스로 혀를 깨물어 버린 것이다. 그 김우진이 바로 김시현이었다. 김시현은 실제로 고문을 받다가 자신의 혀를 잘라 ‘본의 아닌 자백’을 스스로 봉쇄했다.

김시현의 싸움은 해방 후에도 계속됐다. 일제하에서 민족해방투쟁이 해방 후 민주화를 위한 투쟁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친일 모리배와 결탁한 독재자 이승만, 학생의 피로 집권했지만 권력투쟁에 여념 없었던 장면 정권,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 김시현에게 이들은 민족과 민중을 배반한 적이었다.

무기반입 사건으로 1923년 3월 투옥된 김시현은 1929년 1월 출옥하자 한 달 뒤 중국 지린으로 망명한다. 1931년 의열단장 김원봉 등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간부로 생도 모집에 나섰다. 1934년엔 동지에서 밀정으로 변신한 한삭평을 처단했다가 체포돼 5년간 실형을 살았다. 출소 후 다시 탈출해 1941년 창춘과 지린 일대에서 항일투사를 규합하다가 또 체포됐다. 1년여 동안 감금됐다가 건강이 극도로 악화돼 보석으로 풀려난다. 다시 베이징으로 탈출하지만, 1944년 4월 검거돼 일제의 패망과 함께 자유를 찾았다.

해방 후 김시현은 권력의 길이 아니라 헌신과 봉사의 길을 택한다. 조국이 해방됐으면 됐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안재홍, 여운형, 송진우 등의 정치활동 제의를 모두 뿌리쳤다. 해외에서 유리걸식하는 동포들의 구제가 우선이었다. 일본 거류 동포를 위한 고려동지회, 중국 동북지역의 동포를 위한 재중국동북동포구제회를 결성했다. 독립운동사를 정리하기 위해 오세창, 김창숙, 홍명희, 허헌, 권동진 등과 함께 조선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도 결성했다.

그러나 역사는 역류했다. 미군정의 비호 아래 친일 부역자들이 권력의 중심에서 독립지사들을 배척하거나 제거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주도했다. 그는 1947년 6월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원세훈 등이 결성한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했다. 한 달 뒤 여운형이 암살되고 합작위원회가 흔들리자 민족민주세력이 결집한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듬해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의 극우공포정치가 극성했다. 그가 국회의원 출마를 결심한 1949년 6월, 그달에만 반민특위 습격 사건(6일), 김구 암살 사건(19일), 국민보도연맹 결성 및 강제가입이 잇따랐다.

1950년 5월 2대 총선 민주국민당 후보로 경북 안동 갑구에 출마했다. 그의 연설은 특별했다. “나는 들어가 싸우기 위해 국회로 가려 합니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가 한번 보내놓고 봐 주십시오. 여기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건방지다 하여 표를 안 주시면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표를 달라는 게 아니라, 무언가 각오를 천명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2년 뒤 현실화된다.

6·25전쟁이 터졌다. 이승만이 줄행랑친 부산 임시수도에서 하는 짓이란 재선을 위한 정치공작뿐이었다. 전쟁중이었지만 북한이 아니라 국회와 전쟁을 벌였다. 당시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했는데, 2대 국회는 무소속이 126석, 이승만 일파는 기껏해야 57석에 불과했다. 이승만의 재선은 불가능했다.

이승만은 1951년 11월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제출했다. 국회는 개헌안을 부결시켰다(1952년 1월). 이승만은 대한노총, 대한청년단, 대한부인회 등 어용단체는 물론 백골단, 민중자결단, 땃벌떼 등 백색테러 조직들을 총동원해 국회와 국회의원들을 협박하고 테러했다. 5월24일 부산과 경상, 전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이틀 뒤 국회의원 50여명이 탄 통근버스를 강제로 견인해 헌병대로 끌고 갔다. 일주일 뒤 국제공산당에 연루됐다며 국회의원 10명을 구속했다. 6월10일 폐기된 직선제 개헌안을 일부 자구만 수정해 다시 국회에 상정했다(발췌개헌안). 그리고 7월4일 경찰과 헌병이 국회의사당을 겹겹이 에워싼 가운데 기립표결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재판장이 물었다. “언제부터 살의를 갖게 됐는가?” “1951년 10월께.” 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기 직전이었다.

당시 그는 동향의 의열단 동지가 운영하는 안동한약방에서 동지들과 자주 만났다. 만나기만 하면 “(이승만을) 반드시 죽이겠다”고 했고, “그런 말씀 하지 마시라”고 충고하면 이렇게 답했다. “전쟁에 지고 부산으로 쫓겨온 자가 … 무슨 군왕처럼 날뛰고, 법을 무시해가면서 대통령을 더 해보겠다고…, 그래서 없애버리려는 것일세.”(박진목) 이렇게도 말했다. “전선에선 젊은이들이 씨가 마르게 죽어가고, 민생에선 민중이 죽어가고, 유치장과 감옥엔 정치범이 넘쳐나는데, 대통령과 총리와 내무장관이란 자들은 장기집권 흉계에 여념이 없으니….”(수행비서 권오상)

6월 대구로 가 의열단 동지 유시태와 만나 거사를 결의했다. 저격을 자청한 유시태에게 권총을 넘겼다. 거사 전날인 6월24일 부산 영도 하숙집 근처에서 유시태와 마지막 술잔을 나눴다.

수감 중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김시현은 4·19 혁명이 일어나고서야 꼬박 8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쳤다. 일제 때까지 합치면 21년의 감옥살이였다. 출소할 때 그는 이런 각오를 밝혔다. “생명을 내놓고 일을 하여, 순의된 학생들 넋을 이을 것이며, 그 뒤를 따르겠다.” 의례적인 치사가 아니었다.

그는 7월29일 실시된 5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민주당의 행태가 역겨워 무소속을 선택했다. 77살의 나이에, 건강도 말이 아니었지만 4·19 학생수습위원회가 도왔다. 학생 대표들은 안동을 휩쓸고 다녔고, 당시 최고의 웅변가라는 신순범을 상주시켜 돕도록 했다. “선생은 만주벌판의 고드름을 반찬 삼아 눈물로 밥을 말아 먹으며 평생을 독립운동에 풍찬노숙하시고, 이승만 독재와 4·19 같은 비극이 올 것을 선견하시어 8년 전 부산의 충무동에서 독재와 부패를 씻어낼 거사를 하셨으니….” 시민은 다시 그를 선택했다.

당선되고 언젠가 김시현은 박진목에게 1천만환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 용처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지금 온 친일파가 장면 정권 밑에 다 모여 있네. 내가 지금 국회의원이니 이 신분을 가지고 저놈들 국무회의장에 들어가 폭탄 하나 터트리면 모두 종말을 고할 것 아닌가.”(권광욱 저 <권애라와 김시현>) 그의 이런 의기는 5·16 군사쿠데타로 접어야 했다.

쿠데타 후 군사정권은 관변조직인 재건국민운동본부(본부장 유달영)를 통해 그를 모시겠다며 사람을 보냈다. 그는 손사래 치며 돌려보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의열의 불꽃, 남미에 체 게바라가 있었다면, 우리에겐 김시현이 있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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