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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1.22 18:20 수정 : 2016.11.22 19:27

곽병찬의 향원익청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 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 이승만은 계엄령을 발동하고, 발포를 명령했다. 그러나 계엄군은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않았다. 이승만은 27일 하야했다.

꽃은 피고 졌지만 결실은 아직 맺지 못했다. 5·16 쿠데타, 유신 쿠데타, 12·12 군사반란, 5·17 쿠데타, 그리고 지금의 유신회귀 등 역사적 반동은 때마다 열매를 짓뭉갰다. 하지만 그때마다 4월의 제단은 마르지 않는 샘물로 민주주의를 일깨웠고, 정의의 불길을 지피는 활화산이 되었다. 5·18 항쟁, 6월 시민항쟁, 그리고 지금의 촛불항쟁.

4월18일 오전까지만 해도 시인 조지훈(고려대 국문과 교수)은 착잡했다. 그는 “연구실 창턱에 기대 앉아 먼 산을 넋 없이 바라보”며, 제자들의 비겁에 대해 선생들과 나눈 개탄을 곱씹었다. “요즘 학생들은 기개가 없다고/ 병든 선배의 썩은 풍습을 배워/ 불의에 팔린다고/ 사람이란 늙으면 썩느니라, 나도 썩어가고 있는 사람/ 늬들도 자칫하면 썩는다고….”(시 ‘늬들 마음을 우리는 안다’에서)

그럴 만도 했다. 한 달이 넘게 어린 중고교생들이 이승만 정권과 맞서 싸우다 흉탄에 쓰러져갔는데도 대학생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고교생들 입에선 “우리 선배들은 썩었는가!” “서울 대학생들은 죽었다” 등의 말이 나왔다.

실제 56년 전 저항의 물꼬를 튼 것은 고교생들이었다. 2월28일 대구에선 민주당 장면 후보 유세가 있었다. 일요일이었지만 각급 학교는, 심지어 토끼사냥 등을 핑계로 학생들을 등교하도록 했다. 학생들은 분노했다. 경북고, 대구고, 경북여고, 사대부고 등 고교생이 차례로 교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그들은 반월당에 집결한 뒤 중앙청4거리를 거쳐 도청 앞 광장까지 거리를 휩쓸었다. 대구 학생의거는 전국의 고교생을 일깨웠다. 3월2일 전주, 4일 광주를 거쳐 8월 대전에서 대전고생 등 1000여명이 나섰다.

바람은 국도를 따라 북상해 충주고, 수원농고, 청주고, 문경고, 원주고, 오산고 학생 시위로 이어졌고, 남쪽으로는 부산을 뒤흔들었다. 뒤늦게 불이 붙은 서울에선 대동상고, 균명, 강문, 중동, 배재, 선린상고, 경기, 보인, 중앙, 대신, 경동고 등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3월15일 정·부통령 투표 당일 분노는 마산에서 폭발했다. 투표도 하기 전 ‘4할 사전투표’ 사실이 확인되고, 곳곳에서 3인조 혹은 5인조 공개투표가 이뤄졌다. 민주당 선거참관인은 ‘완장’ 깡패들 때문에 투표소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민주당 마산시당은 10시 반 선거 포기와 선거 무효 선언을 했다. 시민들은 오동동 옛 민주당 마산시당사 앞으로 몰려들었다.

부정선거 폭로대회가 끝나고 시민들이 시청으로 향할 때는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시청 전방 400m 무학초등학교 앞 도로에 이르렀을 소방차 한 대가 시위대 쪽으로 굴러오다가 전신주를 들이받고 섰다. 대형 변압기가 터지면서 일대는 어둠에 갇혔다. 남성동파출소의 일제사격이 시작된 건 그때였다. 선두의 김영호(마산중 3), 김주열(마산상고 1), 김용실(마산고 1)군 등이 차례로 쓰러졌다. 곧 북마산파출소 앞에서도 총성이 울렸다.

그날 밤 경찰은 도립병원 시체안치소에 있던 김용실 학생 시신의 주머니에 불온삐라를 넣었다. 이튿날 마산경찰서는 전날 시위가 ‘좌익이 주도한 폭동’이라고 발표했다.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철저하게 배후를 규명해 의법 처단하라”고 했고, 내무장관 최인기는 “공산당이 개입됐다면 내란에 속한다”고 협박했다. 부통령 이기붕은 19일 “총은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한변호사협회 조사단의 조사 결과는 달랐다. 25일 조사단은 “오직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일어난 것으로, 무차별 발포와 인명 살상은 명백한 과잉진압으로 살인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이승만 정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민과 정권의 대치가 계속되던 11일 오전 11시20분 마산 신포동 중앙부두 앞 200m 지점에서 시신 한 구가 떠올랐다. 오른쪽 눈은 부릅뜨고 왼쪽 눈엔 추진체까지 달린 테러진압용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김주열 학생이었다. 집단발포가 있던 날 밤 사상자를 수습하던 경찰서 주임 박종표는 주검을 발견하고 몰래 중앙부두로 가져가 돌을 매달아 던져버렸던 것이었다.

학생과 시민들은 오열했다. 저녁 무렵 시위대는 3만여명으로 늘었다. 경찰은 그날 밤 또 시민을 향해 총질을 했다. 이튿날 오전 마산고, 마산상고, 마산공고, 마산여고, 마산제일고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다. 이제 학교장과 교사들이 학생들을 보호하며 시위에 참여했다.

그러나 신임 홍진기 내무장관은 담화를 통해 “배후조종에는 적색 마수가 개재된 혐의가 있어 수사 중”이라고 했고, 이승만은 13일과 15일 잇따라 “난동 뒤에는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이라고 협박했다. 14일부터 16일까지 사흘 동안 마산에선 1000여명이 체포되고, 32명이 구속됐다.

그러나 ‘빨갱이 협박’은 통하지 않았다. 대학생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18일 고대생 3000여명이 태평로 의사당에 진출했다가 귀교하던 중 정치깡패들에게 집단테러를 당했다. 국무회의는 이날 밤 ‘강경 진압’을 결의했다.

19일 아침부터 서울에선 동풍이 거셌다. 8시반 신설동 대광고교생 1000여명이 교문을 나섰다. 동대문을 거쳐 혜화동에 이르렀을 때 동숭동 동성고 고교생 1000여명도 교문을 나섰다. 마침 시위를 준비하던 서울대 문리대생 4000여명이 이들을 보자 모든 일정을 생략하고 뛰쳐나왔다. 오전 10시엔 고려대생 4000여명이, 10시20분 건국대 2000여명, 성균관대 3000여명이 교문을 나섰다. 집결지는 태평로 옛 국회의사당.

동국대생들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법대생들은 바로 ‘경무대로’를 외치며 내달렸다. 그 뒤를 서울대와 동성고 고교생들이 따랐다. 중앙청 앞 1차 저지선을 뚫은 이들은 최후 저지선까지 육박했다. 경무대 100m 전방, 옛 효자동 전철 종점이었다. 낮 1시반 시위대가 경찰 저지선 10m 전방까지 다가섰을 때 경찰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동국대 법대 2년생 노희두에 이어 서울대 문리대생 김치호가 쓰러졌다. 학생들은 물러서지 않고 5시까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그날 그 자리에선 21명이 사망하고 17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광화문 4거리는 일대 혼전중이었다. 수송초 6학년 전환승군은 아카데미극장(지금의 동화면세점 옆 자리)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단지 시위대에 박수를 쳤을 뿐인데,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 두 방이 그의 얼굴과 머리를 정확하게 관통했다.

나흘 뒤 강명희(수송초 4)양의 시 한 편이 신문사에 전달됐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 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오빠와 언니는 왜 총을 맞았나요’)

유혈사태는 서울 시내 전역으로 확산됐다. 오후 2시50분 중앙청 옆 경찰 무기고 앞에서 최정규(연대 의대) 등 8명이 사망했다. 3시반 소공동 특무대 건물 주변에선 이종량(경기고 2)군 등이 희생됐고, 서대문 이기붕 집(지금의 4·19도서관) 앞에서도 윤장현(배문고 3) 등이 희생됐다. 최기태(경성전기공고 3)군은 깡패들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해 숨졌다. 4시20분 을지로 입구 내무부 건물 주변에서도 김태년(중앙대 약대 3) 등 7명이 희생됐다. 같은 학교 서현무(법대 2·여)는 그곳에서 체포돼 처참하게 짓밟힌 후유증으로 7월2일 병상에서 숨졌다. 두 사람은 1995년 11월19일 영혼결혼식을 하고, 국립 4·19민주묘지에 합장됐다. 6시40분엔 동대문경찰서와 성북경찰서 앞에서도 10여명이 희생됐다.

7시께 미아리 고개로 향하던 시위대 버스 속 한성여중 2학년 진영숙양이 북선파출소(지금의 돈암1동)에서 날아온 총탄에 절명했다. 그는 버스에 오르기 전 시장에 장사 나간 어머니에게 편지 한 통을 남겼다.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잘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희생자 186위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유서였다.

이승만은 계엄령을 발동하고, 발포를 명령했다. 그러나 계엄군은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않았다. 이승만은 27일 하야했다. 28일 이기붕 일가는 집단 자살을 했다. 3·15 의거 후 37일 만이었다.

피의 화요일을 지켜본 조지훈은 시를 이렇게 맺었다. “붉은 피를 쏟으며 빛을 불러놓고/ 어둠 속에 먼저 간 수탉의 넋들아/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하늘도 경건히 고개 숙일 너희 빛나는 죽음 앞에/ 해마다 해마다 더 많은 꽃이 피리라.”

꽃은 피고 졌지만 결실은 아직 맺지 못했다. 5·16 쿠데타, 유신 쿠데타, 12·12 군사반란, 5·17 쿠데타, 그리고 지금의 유신회귀 등 역사적 반동은 때마다 열매를 짓뭉갰다. 하지만 그때마다 4월의 제단은 마르지 않는 샘물로 민주주의를 일깨웠고, 정의의 불길을 지피는 활화산이 되었다. 5·18 항쟁, 6월 시민항쟁, 그리고 지금의 촛불항쟁.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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