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황과 권력자들은 도대체 납득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 안에 한울님을 모신 존귀한 존재라니…, 그것도 미천한 여자가!’ 그 때문에 그들은 살이 터지고 뼈가 부서지는 고문으로 그의 신념과 의기를 꺾으려 했을 것이고, 뜻대로 되지 않자 미치광이로 매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권력자들의 조소와 달리 그를 비롯한 수많은 이름 없는 여성 동학들은 봉건적 차별의 벽에 결정적인 균열을 냈다. 조선 조정은 이듬해 갑오개혁 속에 과부의 재가 허용을 비롯해 문벌·반상제도, 문무존비(文武尊卑) 구별 등 각종 차별정책을 철폐했다.
동학년(1894년) 12월27일(음력) 나주의 동학농민군 토벌군 대장 미나미 고시로 일본 육군 제19대대장은 장흥의 조선 토벌군 우선봉 이두황에게 지휘서신을 보냈다. “‘거괴 체포자’를 나주로 압송하라.”
나흘 뒤(1월1일) 이두황은 회신했다. “민(民)이 처형을 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초모관 백낙중에게 문초를 당해 살과 거죽이 진창이 되어 있고 지금은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입니다. 안정되면 압송하겠습니다.” 그러나 미나미의 명령이 부담스러웠던지 이두황은 그날 오후 이소사를 나주로 보낸다. “경유하는 각처는 각별히 호송하는 데 불편이 생기지 않도록 해주십시오.”(이두황은 을미사변 때 우범선과 함께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으며, 이토 히로부미 통감과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다.)
동학농민군 ‘거괴’(거물 괴수) 이소사. 장흥 전투의 선봉에 섰던 유일한 여성 동학농민군. 당시 토벌군은 농민군이 체포되면 주요 지휘관들 외에는 2~3일 안에 즉결처분했지만, 그에 대해서만은 체포 후 7~8일 동안 극렬한 고문을 가하며 심문했고, 일본군은 조선군에 압송을 거듭 지시했다. 당시 장흥 전투에는 이방언 대접주를 비롯해 이인화, 이사경, 구교철, 김학삼 접주 등이 있었지만 토벌군은 유독 이소사에 집착했다.
일본군 기록인 ‘동학당정토약기’는 그에 대한 고문이 얼마 그악스러웠는지 잘 그려져 있다. “…양쪽 허벅지의 살을 모두 잘라내어, 그 한쪽은 아예 살을 벗겨내어 뼈만 남고 다른 한쪽은 피부와 살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 여자가 압송되어 나주성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거의 송장 상태였다. … 상처 부위가 썩어 문드러져서 악취가 코를 찌르고… 그 참담한 꼴은 무참한 감을 느끼게 하였다.” 동학군 최고지도자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에 대해서도 이런 고문은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체포 당시 소문처럼 그는 장흥 부사 박헌양을 참시한 장본인도 아니었다. 거괴였다면 심문 기록이라도 남겼어야겠지만 그와 관련해서는 인적사항조차 남아 있지 않다. “장흥 민인(民人)들이 체포한 여동학(이소사)이 껄껄 웃으며 신이부인(神異夫人)이라 칭하며, 요상한 말을 외우며 쏟아냈다. 혹 어리석은 사람의 하나이거나 대요물인바….” 이두황의 보고처럼 미치광이이자 요물로만 매도됐을 뿐이었다.
이소사가 쏟아냈다는 ‘요상한 말’이란 것도 다름 아닌 동학의 21자 주문이었을 것이다.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 願爲大降)의 8자 강령주와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의 13자 본주문이 그것이다. 8자 주문은 천지에 가득 찬 한울님의 지극한 기운이 내게 임하여 나의 기와 하나 되소서라는 기원이고, 21자 주문은 한울님을 내 안에 모셨으니 모든 일을 바르게 헤아리는 한울님의 지혜를 영원토록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이두황과 권력자들은 도대체 납득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 안에 한울님을 모신 존귀한 존재라니…, 그것도 미천한 여자가!’ 그 때문에 그들은 살이 터지고 뼈가 부서지는 고문으로 그의 신념과 의기를 꺾으려 했을 것이고, 뜻대로 되지 않자 미치광이로 매도했을 것이다.
‘거괴’ 이소사를 둘러싼 이야기를 단편적이나마 중립적인 기록은 일본의 한 신문에 나온 다음의 기사가 고작이다. “동학당에 여장부가 있다. 나이는 꽃다운 22살로 용모는 빼어나기가 경성지색이고, 이름은 이소사라고 한다. 오랫동안 동학도로 활동하였으며, 장흥부가 불타고 함락될 때 그는 말 위에서 지휘를 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꿈에 천신이 나타나 오래된 제기를 주었다고 하며, 동학도 모두가 존경하는 신녀가 되었다.”(<국민일보> 1895년 3월5일치)
하지만 이 기록을 동학농민군 최후의 일전이었던 장흥전투에 대입하면 그의 용맹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언론인 최혁은 그런 상상력을 바탕으로 픽션 <갑오의 여인, 이소사>를 발표했다. 장흥전투는 과연 혈전이었다.
11월 중순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군은 금구 원평, 태인에서 반전을 꾀하지만 실패하고, 11월말 해산을 결의한다. 그러나 농민군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죽음이거나 노예의 삶이었다. 그들은 쫓기고 쫓겨 한반도 서남단까지 간다. 마침 장흥 보성 등 서남단에선 남도동학군이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남도동학군은 장흥의 남단 회진포를 함락하고 여세를 몰아 장흥부를 에워쌌다. 퇴각한 농민군들이 합류한다. 그 숫자는 3만여명을 헤아렸으니 우금치 전투의 농민군 2만여명과 비교하면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그들의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도망가거나 숨어 있다가 잡혀 죽는 건 얼마나 추레한가. 정수리에 말뚝이 박힌 채 짚불에 불태워져 죽느니 포탄이나 총알을 맞고 죽는 게 얼마나 깨끗한가.”
농민군은 벽사역, 흥양현에 이어 12월5일 장흥부 장녕성을 함락했다. 이때 ‘말을 타고 선두에서 농민군을 지휘한’ 이소사가 등장한다. 장녕성 함락은 농민군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농민군은 7일 강진현 그리고 10일 병영성을 함락했다. 병영성은 반도의 서남단 53주 6진을 통할하는 육군 지휘부였다.
농민군은 곧바로 전라도 서남부 행정과 군사의 중심 나주로 진격하려 했다. 이때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김인배 등 농민군 지도부가 차례로 체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0일엔 농민군 주력을 연파한 일본 육군 19대대와 조선 토벌대가 나주를 거쳐 남진한다는 정보가 접수됐다.
농민군은 강진 병영성을 떠나 장흥의 유치면 조양촌, 부산면 유양동, 용산면 어산리 등 산간지역에 포진했다. 12일부터 조양촌, 유앵동 부근에서 토벌군과 두 차례의 전투가 있었다. 하지만 화력의 열세와 작전 미숙으로 패배했다. 잇단 패배에 농민군은 전열이 흔들렸다. 지도부는 지체할 수 없었다. 14일 일전을 벌이기로 하고, 남외리 석대들로 나온다.
그러나 수적으로 우세하지만 농민군에게는 소량의 화승총과 죽창뿐이 고작이었다. 조일토벌군은 신형 야포와 회전포(미제 개틀링 기관총) 그리고 1분에 12발을 발사할 수 있는 신형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석대들 전투는 장렬했지만 처참했다. 14일 동학군은 적진으로 돌격했다. 그러나 비 오듯 쏟아지는 기관총탄 앞에서 추풍낙엽으로 쓰러졌다. 15일 낮 다시 정면돌파를 시도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최혁의 소설 속에서 이소사는 단기필마로 기관총 진지를 습격하지만, 누구도 활로를 뚫을 수는 없었다. 석대들 전투에서 농민군은 1천여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를 남기고 퇴각했다. 당시 들판은 쓰러진 농민군의 흰 바지저고리로 눈에 덮인 듯했고, 탐진강은 농민군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농민군은 퇴각하면서 추격해온 토벌군과 16일 고읍면 옥산촌에서, 그리고 17일 대흥면 월정마을에서 반전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갑오의 여인, 이소사>에서 이소사는 관산면 송현리 송천마을 고향집으로 피신한다. 관산에서 구전됐다는 “송현리에 한울을 모시는 여자가 나타나고, … 용천검과 갑옷이 있다 하여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다”는 설화에 기대어 구성한 것이었다. 소설은 그가 다시 회진을 통해 덕도로 탈출하려다 민병에 체포되는 것으로 나온다. 물론 근거는 없지만, 당시 농민군 500여명은 덕도로 건너갔고, 소년 뱃사공 윤성도의 도움으로 생일, 금일, 약산 등 완도의 작은 섬으로 은신할 수 있었다.
‘민병’에 체포된 이소사는 능멸되고 난자된다. “신녀라고? 그럼 신통술을 부려 이곳에서 빠져나가 보라.” 로마군이 예수에게 그랬듯이 능멸했을 것이고, 프랑스를 구한 잔 다르크를 화형대에 세운 권력자들이 그랬듯이 그의 몸을 갈가리 찢었을 것이다.
하지만 권력자들의 조소와 달리 그를 비롯한 수많은 이름 없는 여성 동학들은 봉건적 차별의 벽에 결정적인 균열을 냈다. 조선 조정은 이듬해 갑오개혁 속에 과부의 재가 허용을 비롯해 문벌·반상제도, 문무존비(文武尊卑) 구별 등 각종 차별정책을 철폐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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