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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2.20 18:13 수정 : 2016.12.20 19:06

백기완은 초면에 다짜고짜 물었다. “힘깨나 쓴다며. 그래 몇 명이나 때려눕히는데?” “한 열 명쯤~.” 그 말과 동시에 눈에서 불이 났다. 따귀가 후끈했다. “사나이가 주먹을 쥐면 천하를 울리고 흔들어야지, 고작 사람이나 때려? 꺼져!” 어물어물 물러나왔다. 속에서 일어났던 열불은 차츰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며칠 뒤 백기완을 찾아갔다. ‘친구로 받아 달라.’ 둘은 평생지기가 되었다.

월간 <말>의 보도지침 폭로 사건으로 지명수배 중이던 김태홍(전 국회의원)을 광주로 피신시켰다. 이 일로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15일간 줄창 고문을 당하다 선우휘의 ‘빽’으로 풀려났다. 이근안이 미안했던지 대공분실 옆 찻집까지 따라나왔다. “2개월 뒤 제대로 붙어볼래? 내가 이기면 너 사표 내고 착하게 살아라. 됐냐!” 이근안은 멀뚱멀뚱 하늘만 쳐다봤다고 한다.

1953년 봄, 벚꽃이 한창일 때였다. ‘배추’는 친구들과 창경원에 놀러 갔다. 마침 북파공작부대인 ‘켈로’ 대원들이 밴드까지 불러놓고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거칠 게 없는 이들이었다. 객기가 동했다. ‘술 한잔 얻어먹읍시다.’ 나이 18살, 덩치는 컸지만 한눈에 봐도 애송이였다. 소대장으로 보이는 이가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총알 맛 좀 볼래?” 구경꾼들이 삽시간에 장사진을 쳤다. 이판사판이었다. “그럼, 일대일로 맞짱 떠봅시다.”

‘켈로와의 결투’ 후 ‘배추’의 주먹은 전국구가 되었다. 부산에서도 대구에서도 목포에서도 ‘배추’란 이름의 주먹이 나타났다. 이정재, 유지광, 임화수 등 당대의 조폭 보스들이 함께 일하자고 했다. 정치권과 줄 대고 주먹을 휘두르며 이권을 챙기던 정치깡패들이었다. 배추는 거절했다. 떼로 몰려다니면서 협박 공갈 폭력으로 ‘삥’ 뜯는 건 질색이었다.

객기는 1954년 겨울 친구의 소개로 백기완을 만나면서부터 빠졌다. 백기완은 초면에 다짜고짜 물었다. “힘깨나 쓴다며. 그래 몇 명이나 때려눕히는데?” “한 열 명쯤~.” 그 말과 동시에 눈에서 불이 났다. 따귀가 후끈했다. “사나이가 주먹을 쥐면 천하를 울리고 흔들어야지, 고작 사람이나 때려? 꺼져!” 어물어물 물러나왔다. 속에서 일어났던 열불은 차츰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며칠 뒤 백기완을 찾아갔다. ‘친구로 받아 달라.’ 둘은 평생지기가 되었다. 1992년 백기완이 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을 때 그는 경호대장이 되었다.

또 한 번의 고비가 있었다. 1956년 한여름 장충동 사건이었다. 채무자를 찾아갔는데 다른 남자가 막소주를 내놓고 숯불을 피우고 있었다. “배추 형님, 오셨소? 영광이외다.” 불길이 오르자 석쇠를 올리고는 느닷없이 칼로 제 허벅지를 찔렀다. “형편이 어려우니, 이 살이라도 구워 술 한잔 합시다.” 눈앞이 아득했다. 아, 가난이란 이런 건가.

그러나 ‘주먹의 의리’는 여전했다. 파독 광부 시절이었다. 죽기 살기로 일만 하던 당시 그의 별명은 ‘땅만 보고 다니는 바보’였다. 일행 중에는 광부를 감시하는 정보부 ‘끄나풀’이 있었다. 배추의 하숙집 주인 딸을 추근대는 문제로 싸움이 났다. 마침 그는 왼팔에 깁스하고 있었고, 상대는 회칼을 들고 있었다. 싸움은 싱거웠다. 상대가 찌르기 위해 예비동작을 취하는 순간 배추는 그의 복숭아뼈를 걷어찼다. 상대는 공중제비 한 바퀴 돈 뒤 나뒹굴면서 제 칼로 제 왼팔 동맥을 찔렀다.

광부 생활을 끝내고 파리에 있을 때는 조직원 400여명의 스페인계 조폭 두목과 붙었다. 주사가 심한 철학도 김씨가 데이트 중이던 그를 희롱한 것이다. 상대의 덩치는 엄청났다. 힘으로는 밀렸다. 깔리는 순간 박치기 일격으로 반전시켰다. 이후 조폭 두목과 친구가 됐고, 근처 레스토랑에서 커피며 위스키를 공짜로 즐겼다. 중동 건설노동자 시절에도 회사가 고용한 구사대 주먹들과 17 : 1로 붙었고, 그 일로 추방당했다.

1986년 여름이었다. 월간 <말>의 보도지침 폭로 사건으로 지명수배 중이던 김태홍(전 국회의원)을 광주로 피신시켰다. 이 일로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여기서 죽는구나 싶을’ 정도로 15일간 줄창 고문을 당하다 선우휘의 ‘빽’으로 풀려났다. 이근안이 미안했던지 대공분실 옆 찻집까지 따라나왔다. “나도 왕년엔 좀 놀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야 인마, 그런데 왜 사람을 묶어놓고 패! 2개월 뒤 제대로 붙어볼래? 내가 지면 평생 네 꼬붕이다. 내가 이기면 너 사표 내고 착하게 살아라. 됐냐!” 이근안은 멀뚱멀뚱 하늘만 쳐다봤다고 한다.

“배추 형님? 주먹, 그 이상이지. 주위에 북적대는 사람들을 봐. 흉내 못 낼 발상과 언행, 죽음을 불사하는 의리가 있기 때문이지.”(고 김태홍)

2005년 12월26일 인사동 이모집에 언론인 임재경 성유보, 정치인 이부영 유인태 김태홍 이재오, 문학평론가 구중서, 시인 신경림, 춤꾼 이애주, 화가 여운, 김용태 그리고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 등 당대의 명사 열댓명이 모였다. ‘방배추 취직 축하연’이었다. 나이 일흔에 경복궁 관람질서 지도위원으로 취직한 걸 축하하는 자리였다. 마침 그 자리엔 황석영의 딸이 와 있었다. ‘조선의 3대 구라’란 말을 탄생시킨 황석영이었으니, 저 대신 딸이라도 보낸 것이었다.

한 번은 황석영이 ‘라지오’를 틀었다. “배추 형님, 요즘 조선 3대 구라는 갔다고 합니다. 백구라(백기완), 방구라, 황구라 대신 신흥 구라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거예요. 으핫핫.” “신흥 구라? 맨 앞이 누군데?” “유홍준이 만만치 않습니다. 백만권 이상이 팔려나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해져 동네방네에 라지오를 풀고 다닌다는데….” “걔가 무슨 구라꾼이야? 글쎄, 교육방송쯤이면 딱이겠지. 인생이 없잖아.”

배추에게 최고의 구라는 백기완이었다. “스케일이 엄청나고 웅장하면서도 때론 비감”해 ‘대륙형 구라’라 했다. 황석영에 대해선 “육담으로 질척거리는” ‘뒷골목 구라’라고 했다. 본인은? 인생파 구라! 황석영도 인정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현대사의 압축판!”

10대에 돼지 장사를 했고, 채석장 인부, 파독 광부, 파리의 집시, 중동 노가다도 해봤다. 패션 양장점으로 성공하기도 했고, 중국집이나 신발 가게도 경영했고, 중국 청도에서 공장 사장도 했다. 박정희 정권 때는 간첩으로 몰려 수감됐다. “인생이 없는데 무슨 라지오냐, 교육방송이지.” 혹은 “몇 달이나 노동 해봤어?” 이 한마디에 당대의 ‘구라’ 유홍준도 황석영도 ‘깨갱’ 했던 이유였다.

그가 가장 행복했던 건 원시공동체를 꿈꾸며 시작한 노느메기 농장 시절이었다. 철원군 지포리 산골에서 땅을 파느라 하루에 삽자루 10개가 나갈 정도로 고됐다. 그러나 백기완이 있는 돈 없는 돈 털어 20만원 보태주고, 선우휘가 흑염소 20마리, 밤 호두 오동나무 묘목을 지원하고, 장준하 함석헌 등이 우정 방문하고, 김도현 김정남 등이 함께 일하기도 했다. 불과 1년 만에 ‘김일성과 교신한 간첩’으로 몰리면서 농장은 깨졌다. 하지만 그곳에서 어머니 소망대로 성악과 출신의 재원과 결혼도 하고, 딸도 얻었다.

어린 시절 개성에서 딱 두 대뿐인 ‘컨버터블’ 승용차를 굴리던 부자였다. 아버지는 맨날 사고 치는 아들 방동규를 위해 세계문학전집을 들여왔고, 읽었는지 여부를 꼭 점검했다. 읽을 리 없었다. 그러면 부친은 그에게 ‘유도를 가르쳤’다. 메치기, 누르기, 조르기~. 수련이 아니라 벌이었다. 그런 ‘수련’을 피하려고 그는 책을 읽었다. 그것이 훗날 구라에 결을 더해줄 줄이야.

81살이지만 요즘도 헬스클럽에 간다. 덤벨은 양손에 15㎏, 역기는 100㎏을 주로 이용한다. 몸 만들려는 게 아니다. 노가다에 필요한 힘을 기르려는 것이다. 이달 초까지만 해도 군산의 조선소에서 일했다. 지금은 부인의 부업을 돕는다. 나사못에 앵커를 조립하는 일이다. 한 개에 3원. 3만원을 벌려면 하루 15시간 꼬박 일해야 한다.

그렇게 3천만원 정도 모으면 석양이 아름다운 서해 섬으로 떠나고 싶다. 중동에서 노가다 할 때 거대한 태양이 아득한 모래언덕을 붉게 물들이며 떨어지는 광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곳에 박혀 있으면 그리운 사람들은 더욱더 그리워지리라.

반갑다는 인사가 어깨를 툭 치며 ‘한번 붙어볼까’였던 리영희. 말년에 간이 망가져 술 마시다가도 코피를 줄줄 흘리곤 하던 ‘대륙형 술꾼’ 김태선. 독재자들과 막역했지만 저를 친동생 이상으로 챙겨줬던 선우휘. 경기고등학교 출신 최고의 의리 주먹 박윤배, 문화계 재야 대통령 김용태…. 이젠 모두 떠났다.

평생 그의 그림자로 남고 싶은 백기완, 출소하던 날 두부 사들고 찾아왔던 김도현, 서대문구치소에서 통방하던 유홍준. 출소할 때 감방 창문으로 일제히 머리를 내밀고 ‘배추’를 연호하던 대학생들…. 무작정 상경해 펨프, 레지 등 온갖 짓 다 하다가 그와 노느메기 농장으로 갔던 박근서, 팔자에도 없던 시이오를 하게 했던 염무웅 그리고 주재환 신학철 오윤 여운 강요배 박재동 등 그림쟁이들과 광대 임진택….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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