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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1.03 18:16 수정 : 2017.01.03 19:44

“열 번 맞고, 열 번 떨어져도 다시 일어나 상대방을 단 한 대로 녹아웃시킬 수 있는 게 권투입니다. 지금은 나라가 망했지만,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일어나 한 방에 일본을 녹다운시킬 수 있습니다.” ‘지하의 투사, 지상의 신사’였으며 따듯한 ‘인민의 벗’이었던 몽양 여운형. 그는 뜻밖에도 ‘조선 스포츠의 아버지’였다.

극좌와 극우가 매몰하려 했던 몽양을 필사적으로 되살려낸 건 몽양기념사업회였다. 그런 기념사업회였지만 지난해 12월말 양평군은 기념관 운영에서 배제했다. 대신 신원리새마을회 등에 운영권을 넘겼다. 몽양의 정신에 투철했던 기념사업회가 양평의 향반들에게는 불편했겠다. 하지만 이것이 몽양에 대한 또 다른 테러임을 왜 모르는 걸까.

1945년 11월, 우익 성향의 단체 신구회는 해방 후 처음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해 발표했다.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는?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 김일성 9%, 김규식 5%. 생존 인물 가운데 최고의 혁명가는? 여운형 20%, 이승만 18%, 박헌영 17%, 김구 16%, 김일성 7%, 김규식 5%. 얼마지 않아 미군정 장관 존 하지는 미국 정부에 극비보고서를 낸다. ‘지금 당장 대통령선거를 할 경우 1등은 여운형, 2등은 김구, 이승만은 3등.’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골 몽양여운형기념관은 지난해 11월부터 특별한 전시회를 열고 있다. 서거 70주기가 되는 7월까지 열리는 전시회의 표제어는 “한반도를 짊어지고 달려라!” 1936년 1월 조선인으로서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하는 손기정, 남승룡(이상 마라톤) 등 7명의 선수를 격려하는 ‘올림픽의 밤’에서 했다는 몽양의 축사 한 대목이었다. “제군은 비록 가슴에는 일장기를 달고 가지만 등에는 한반도를 짊어지고 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이성구(1936년 베를린올림픽 농구대표선수)의 육성이 들려온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스포츠 정신, 특히 권투 정신을 굳세게 지켜야 합니다. 열 번 맞고, 열 번 떨어져도 다시 일어나 상대방을 단 한 대로 녹아웃시킬 수 있는 게 권투입니다. 지금은 나라가 망했지만,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일어나 한 방에 일본을 녹다운시킬 수 있습니다.’” ‘지하의 투사, 지상의 신사’였으며 따듯한 ‘인민의 벗’이었던 몽양 여운형. 그는 뜻밖에도 ‘조선 스포츠의 아버지’였다.

구국운동의 큰 그늘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는 일제치하에서나 해방공간에서 조선 체육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1930년대 그는 조선체육회 이사이자, 조선육상연맹, 조선농구협회, 축구협회, 동양권투회, 고려탁구연맹의 회장이었고, 조선유도유단자회, 스포츠여성구락부의 고문을 역임했다. 한동안 사실상 조선인의 모든 경기단체를 이끌었다.

그는 치열한 독립운동의 와중에서도 스포츠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1918년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결성하고, 신한청년당은 해외 독립지사들의 무오독립선언과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그리고 잇따른 3·1독립만세운동의 중요한 계기가 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다. 그즈음 그는 상하이한인체육회를 결성하고, 동포 야구단과 인성학교 소년야구단을 설립했다. 1928년 푸단대학 축구팀과 야구단을 이끌면서 중국체육회의 종신회원이 되었다. 그가 조선으로 압송돼 3년형을 살게 된 것도 푸단대 축구팀을 이끌고 싱가포르, 필리핀 등지에서 친선경기를 하면서 아시아 민족의 단결을 촉구하고, 세계 제국주의의 침략성과 야만성을 성토한 연설 때문이었다. 체포된 곳도 야구시합이 열리던 상하이 원동경기장이었다.

출옥한 그는 1933년 2월 <조선중앙일보> 5대 사장으로 취임했고, 신문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각종 경기단체를 설립하거나 대표를 맡는다. 1934년엔 서울육상경기연맹을 창설했다. 그해 그가 대회장으로 개최한 제2회 ‘조선 풀 마라손 대회’는 베를린올림픽의 영웅 손기정과 남승용을 탄생시켰다. 손기정은 이 대회에서 우승한 이후 국내외 각종 대회를 휩쓸었고 전일본올림픽대표선발전에서 우승했다. 손기정은 몽양의 둘째 아들 홍구와 절친했으며, 몽양을 아버님처럼 모시던 터였다.

그는 1936년 8월9일 손기정의 올림픽 마라톤 제패 이후 지면을 통해 연일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0일치 호외 뒷면에 실린 심훈의 축시는 대표적이다. “~나는 외치고 싶다!/ 전 세계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총독부는 거듭 주의를 줬지만 몽양은 무시했다. 당시 담당 기자 유해붕은 이렇게 전했다. “붓대가 꺾어질 때까지 마음껏 민족의식을 주입할 것이며, 그놈들의 주의를 들을 필요가 없다.” 13일치는 1판에서부터 일장기를 말소한 채 손기정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 시상식 사진을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2판(지방판)에서부터 일장기를 말소했다. 이후 몽양은 사장직을 사임하고, 신문은 자진 휴간을 거쳐 폐간했다. 사죄하느니 차라리 붓을 꺾었다.

몽양의 영향력을 이용하기 위해 일제는 회유 공작에 나섰다. 1940년부터 1942년까지 5차례나 일본을 방문했다. 유력 정치인을 만나는 과정에서 몽양은 오히려 일제의 패망을 확신했다. 이런 생각을 주변에 알렸고, 이로 말미암아 유언비어 날조 등의 혐의로 다시 투옥된다. 1943년 가출옥 뒤 조동호 이상도 이상백 장권 등 체육인들을 주축으로 해방에 대비한 조직 결성에 나서 1944년 8월엔 ‘건국동맹’을 결성했다. 1945년 3월 일제의 부평 조병창 공장장인 채병덕 중좌(해방 후 육군참모총장 역임)로부터 유사시 무기 인수를 약속받았다. 채병덕과 접촉했던 인물이 손기정이었다.

8월15일 오전 8시 총독부 정무총감 관저에서 엔도 류사쿠를 만난 그는 엔도로부터 치안권을 위임받았다. 엔도는 일본인의 신변 안전을 보장해줄 사람이 몽양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날 오후 몽양은 건국동맹을 토대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결성했다. 16일엔 건국치안대를 조직했다. 해방 이후 가장 중요한 것은 무정부 상태의 극복이었다.

치안대의 주력은 체육인들이었다. 치안대장 장권은 1910년대 초 몽양이 와이엠시에이(YMCA) 체육부장으로 있을 때 간사였으며, 유도계 원로 석진경 방영두 이제황 등의 스승이었다. 정상윤(사무국장, 농구) 장일홍(사무차장, 사이클) 송병무(총무부장, 육상) 조영하(지역동원본부장, 수영) 석진경(경리부장, 유도) 이규현(학도부장, 역도) 방영두(소방대장, 유도) 안대경(감찰대장, 농구) 등이 실무를 책임졌다.

치안대는 열흘 만에 전국 162개 지부를 두었고, 중요 시설물이나 기계를 보호하고, 수원지와 전기·철도 시설을 경비했다. 일본인이나 친일파에 대한 사적인 복수와 약탈을 막았고, 이들이 조선에서 긁어모은 재산이나 문화재 따위를 빼돌리는 것을 막았다.

9월6일 미군정이 치안을 장악하면서 치안대는 해산됐다. 체육인들은 곧 조선체육동지회(위원장 이상백)를 결성해 조선체육회 재건에 나섰다. 동지회는 11월2일 조선체육회로 전환하면서 초대 회장에 몽양을 만장일치 추대했다.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서 몽양은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하는 한편 체육회 재건과 올림픽 참가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데 올림픽 참가만큼 좋은 기회는 없다고 판단했다. 1946년 3월 올림픽 대책위원회를 두었고, 1947년 4월 육상 축구 농구 레슬링 네 종목을 국제경기연맹에 가입시켰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가입 요건을 갖춘 것이다. 국제올림픽위원회는 6월20일 가입을 승인했다. 정부는 없었지만 1948년 런던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7월19일 올림픽참가기념경기대회가 옛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다. 대회장인 몽양을 태운 차가 혜화동로터리를 돌아서는 순간 흉탄을 맞고 절명한다. 해방 후 12번째 테러였다. 범인은 한지근. 배후에는 이승만 장택상 등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극우테러조직 백의사가 있었다.

경기는 취소되었고, 거국적 잔치는 졸지에 거국적 ‘인민장’으로 바뀌었다. 체육인들은 장례위원이 되었고, 손기정 이상백 김성집 이성구 석진경 이제황 정상윤 김유창 이순재 등 체육인들이 운구를 맡았다.

몽양은 서거 후 58년이 지난 2005년에야 건국훈장 대통령장(2급)이 추서됐다. 2008년 대한민국장(1급)으로 승급됐으며 기념관도 세워졌다. 극좌와 극우가 매몰하려 했던 몽양을 필사적으로 되살려낸 건 몽양기념사업회였다. 그런 기념사업회였지만 지난해 12월말 양평군은 기념관 운영에서 배제했다. 대신 신원리새마을회 등에 운영권을 넘겼다. 몽양의 정신에 투철했던 기념사업회가 양평의 향반들에게는 불편했겠다. 하지만 이것이 몽양에 대한 또 다른 테러임을 왜 모르는 걸까.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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