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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3.14 18:09 수정 : 2017.03.14 19:25

“한울 안 한 이치에 한집안 한 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를 건설하세요.” 그가 평생 온몸으로 살았던 평화의 철학이요 신앙이다. 그의 생가와 구도지 등이 복원된 소성리엔 달마산 초입 평화의 계곡이 있고, 교당에선 평화대학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304명이 죽어갈 때 얼굴 손질이나 하던 대통령은 그 땅에 사드를 배치하기로 했다. 사드 발사대가 한국에 도착한 3월7일은 원불교 교무들이 마을 주민들과 농성을 시작한 지 158일째 되는 날이었다. 허탈할 법도 한데 교무들의 표정은 단호했지만 평화로웠다. 평화를 지키는 일에 화를 내서야…. 정산은 말했던가? ‘강한 것은 부드러운 것이다. 쇠보다 물이 강하고, 물보다 공기가 강하다.’

1961년 가을, 철학자 안병욱 교수는 원불교 지도자인 정산 송규 종법사를 만났다. 그로부터 5년 뒤 그는 한 일간지에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기고했다.

“나는 황홀한 마음으로 그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품위와 예지와 성실의 빛이 흐르는 얼굴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것이었다. … 나는 하나의 경이를 눈앞에 보는 듯하였다. 보면 볼수록 마음이 공연히 기뻐졌다.”

당시 정산 종법사는 10년째 뇌졸중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부축을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게다가 온몸으로 암세포가 퍼져 지독한 통증을 겪어야 하는 말기암 환자였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은 안 교수의 표현처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모습’이었다.

얼마지 않아 정산은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수술도 받고 항암치료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만 보고서는 그가 말기암 환자임을 알 수 없었다. 시자는 궁금했다. “말기암은 통증이 엄청나다는데, 종법사님은 고통스럽지 않으세요?” 정산은 빙그레 웃었다. “바늘 한 쌈지로 마구 쑤시는 것 같구나.”

<마의상법> 등 관상서는 귀한 얼굴의 조건을 이렇게 정리한다. 이마, 턱, 광대뼈가 코를 바라보는 형태로 코는 높지도 낮지도 않다(오악조귀 五岳朝歸). 턱 끝에서 코밑, 코밑에서 눈썹, 눈썹에서 이마 끝까지 거리가 같다(삼정평등, 三停平等). 턱이 둥글고 원만하다(지각원만, 地閣圓滿). 눈빛이 호수처럼 빛난다(안광여수, 眼光如水). 귀가 얼굴보다 희다(이백과면, 耳白過面). 정산의 초상화를 보면 이런 기준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그러나 사람의 얼굴을 어찌 타고난 생김으로만 평가할 수 있을까.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얼굴은 정신의 초상”이라고 말했다.

안 교수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나는 정산 선생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저 청순과 화열의 표정이 깊이 조각되기까지에는 얼마나 정성된 노력을 하였을까 생각했다. 저 화열의 표정은 … 꾸준한 인간 수양의 결정이다.” 안 교수가 훗날 학생들에게 철학자답지 않게도 이렇게 단언한다. “여러분은 10년만 공부하면 나같이 될 수 있지만 나는 100년을 공부해도 그분과 같은 얼굴을 가질 수 없다.”

정산은 1900년 경북 성주 초전면 달마산, 형제봉, 연봉, 호봉 등에 첩첩이 에워싸인 소성리에서 태어난다. 아명은 송도군. 충숙공 야계 송희규의 후손으로, 영남의 대표적인 유림 가운데 하나다. 유년 시절 한집안인 공산 송준필로부터 경서를 배운다. 송준필은 19세기 말 대표적인 유학자로 1919년 1차 유림단사건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다. 당시 고산정에 살고 있던 야성 송씨 일문에선 10여명이 옥고를 치렀다. 사대부 집안 가풍은 그만큼 엄격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은 항상 허전했다. 신유학(주자학)으로는 당대의 모순과 민중의 고통을 해결할 수 없었다. 삶과 죽음의 일대사를 깨칠 수도 없었다. 생로병사를 넘어 천하 만민 모두가 화평할 수 있는 진리의 길은 없는 것일까? 때는 동학을 시작으로 대종교, 증산도, 보천교 등 민중종교가 우후죽순 일어서고 있었다.

13살에 결혼하면서 그는 인근 박실마을으로 이사한다. 멀리 바다를 꿈꾸는 거북이 형상의 바위가 옆에 있었다. 정산은 그 아래에서 수행을 시작했다. 집안에선 말렸지만, 오히려 그의 분심만 자극했다. 도인을 찾아 상주 백화산, 합천 가야산 등을 순력했다. 그의 치열함에 감복한 부친은 그의 후원자가 된다. 17살 그가 스승을 찾아 집을 나설 때 부친은 땅을 팔아 여비를 마련해주는가 하면, 달마산을 넘어 김천까지 60리 길을 배웅했다. 그는 전라도로 건너가 보천교의 차경석도 만나고, 증산 강일순의 여동생인 선돌부인과 함께 수행하기도 했다. 현실(선천)의 어둠과 고통과 갈등 넘어 빛과 평화의 세상이 열리는 이치와 도리를 설파한 증산의 후천개벽사상에 마음이 끌렸다. 증산의 딸 강이순으로부터 <정심요결>을 받았다. 증산이 ‘귀인이 오면 전하라’고 했다는 그 비서였다.

정산은 1918년 4월 정읍 북면 화해리에서 소태산 박중빈을 만난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던 ‘고요한 해변에서 온 원만하신 용모’의 어른이었다. 소태산 역시 그동안 ‘체격이 작은 얼굴이 깨끗한 소년’을 고대했다. 소태산은 어느 날 무언가에 끌려 정읍 화해리로 왔다가 그 소년을 본 것이었다.

소태산은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현실적 도덕의 훈련을 통해 정신의 기운을 확장해 물질의 기운을 이겨내는 길을 열고자 했다. 무아봉공(無我奉公)의 삶을 통해 실생활 속에서 대중과 함께, 모든 생령이 조화롭고 아름다운 한 생명을 이루는 일원상의 진리를 이 땅에 구현하려 했다. 사람은 ‘없어서는 살 수 없는 힘’의 관계(恩) 속에서 존재한다. 천지, 부모, 동포, 법률(사회제도) 등 4은이 그것이다. 은혜를 자각하고 감사하며 보은한다면 어떻게 세상이 불화할 수 있을까. 사은에 보답하는 길이 자력양성, 지자본위, 타자녀교육, 공도자숭배 등 4요(四要)다.

소태산은 1917년 동지들을 모아 저축조합을 꾸리고, 숯장사를 통해 경제적 기초를 세운 뒤 영광의 버려진 갯벌을 간척해 2만6천여평의 옥답을 개간했다. 이어 8명의 제자와 함께 교화단을 꾸렸다. 훗날 그를 만난 도산 안창호는 “나는 말로 일을 했지만 선생은 온몸으로 민족운동을 한다”고 말했다.

1943년 소태산의 후계자가 된 그는 가람 이병기의 말마따나 ‘작은 키에 둥그런 얼굴을 가진, 특별한 학벌이나 문장도 없는’ 사람이었다. 평소에도 만나는 이들에게 그저 ‘공부 잘하라’고 당부하는 평범한 어른이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인재와 학자들이 그 앞에서 공손히 머리를 숙이는”(이병기) 스승이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생을 가꾸었으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스레 감화를 받게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비단 김일상(정산 송규 종사 평전 지은이)만의 것은 아니었다. 독불장군에 음모가요 개신교 장로인 이승만마저 “우리나라에 이처럼 훌륭한 분이 초야에 계실 줄이야”라고 찬탄했다.

그에게 특별함이 있다면, 지극한 평범이었다. 꽃을 가져온 교도에게는 “세상 어디나 도량입니다. 핀 곳에 그대로 있다면 더 많은 대중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겠지요”라고 했다. 새나 물고기를 가져오면 “새의 집은 숲이요, 물고기가 사는 곳은 물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그가 1960년 회갑을 맞아 철학자 박종홍마저 찬탄한 특별한 법을 세운다. ‘3동윤리’다. “모든 종교의 진리는 하나이므로 서로 화합하고(동원도리, 同源道理), 모든 생령이 모두 한 기운으로 연계된 동포로 서로 화합하고(동기연계, 同氣連契), 모든 사업과 이념은 더 좋은 세상을 도모하는 것임을 알아서 서로 화합하라(동척사업, 同拓事業).” 1962년 1월22일 이런 게송을 남기고 이틀 뒤 세상을 떴다. “한 울 안 한 이치에 한집안 한 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를 건설하세요.” 그가 평생 온몸으로 살았던 평화의 철학이요 신앙이다. 그의 생가와 구도지 등이 복원된 소성리엔 달마산 초입 평화의 계곡이 있고, 교당에선 평화대학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304명이 죽어갈 때 얼굴 손질이나 하던 대통령은 그 땅에 사드를 배치하기로 했다. 사드 발사대가 한국에 도착한 3월7일은 원불교 교무들이 마을 주민들과 농성을 시작한 지 158일째 되는 날이었다. 허탈할 법도 한데 교무들의 표정은 단호했지만 평화로웠다. 평화를 지키는 일에 화를 내서야…. 정산은 말했던가? ‘강한 것은 부드러운 것이다. 쇠보다 물이 강하고, 물보다 공기가 강하다.’

그날 교당에서 저녁상을 받았다. 김치, 무장아찌, 미나리무침이 놓여 있고 잔치국수가 올라왔다. 둘러앉은 이들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고 얼굴이 달덩이처럼 환해졌다. 가난한 밥상 앞에서 온종일 수고한 이들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란 얼마나 평화로운가.

정산은 당부했다. “화평하고 고운 얼굴을 갖고 싶거든 아무리 어려운 역경을 당하더라도 화를 내지 말고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을 하지 말라.”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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