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선산군에 딸린 한미한 면소재지였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대규모 공단이 들어서면서, 오히려 선산을 병합하고 인근 지역 일부를 흡수해 지금의 구미시가 됐다. 과거 선산은 ‘조선의 인재 절반이 영남에서 나왔고, 영남 인재의 절반이 나왔다’(이중환의 <택리지>)는 곳.
구미에는 이 네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왕산 기념관과 기념공원, 장택상과 김재규 생가, 그리고 동양 최대의 박정희 타운. 왕산기념공원은 후손들에 의해 조성됐고, 한때 거대한 장택상 생가는 절이 되었다가 이제는 음식점이 되었다. 한동안 흉가로 버려졌던 김재규 생가는 반듯하게 복원됐다.
경상북도 구미시 오태동 고샅에는 지주중류비가 있다. 고려의 충절 삼은 중 한 사람인 야은 길재를 기리는 비석이다. 물살이 거센 중국 허난성 황하 한가운데에 지주산이 있으니, 야은의 절의를 그 흔들림 없이 우뚝함에 비겨 지은 비명이다.
구미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선산군에 딸린 한미한 면소재지였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대규모 공단이 들어서면서, 오히려 선산을 병합하고 인근 지역 일부를 흡수해 지금의 구미시가 됐다. 과거 선산은 ‘조선의 인재 절반이 영남에서 나왔고, 영남 인재의 절반이 나왔다’(이중환의 <택리지>)는 곳. 야은의 뒤를 이어 조선 사림의 종장이라 불렸던 김숙자, 김종직 등이 그곳 출신이며, 이문리와 노문리는 장원급제를 많이 배출했다 하여 ‘장원방’이란 이름까지 얻었다.
근현대에는 풍운의 진원지였다. 구한말 13도창의군 군사장과 총대장을 역임한 왕산 허위, 이승만 치하에서 ‘빨갱이 사냥꾼’으로서 내무 외무장관, 국무총리를 지냈던 장택상, 지금도 기득권세력들에게 ‘반신반인’으로 추앙받는 박정희, 그런 박정희와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가 모두 이곳 출신이다.
1917년 10월, 대한광복회 총사령 고헌 박상진은 요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원래 그자는 이왕과 소송을 벌이고 소작인을 괴롭히고 경북의 유력자로서, 그를 살해함으로써 그 소문이 전도에 전파되면 광복회의 사업을 추진하는 데 편리할 것이오.” 여기서 ‘그자’란 당시 영남 최고의 친일 갑부였던 장승원이었다. 한 달 뒤인 11월10일 그는 오태동 자택에서 채기중, 이형락, 강순필에 의해 처단된다. 고헌의 스승이 바로 왕산 허위다.
장택상은 장승원의 셋째 아들이었다. 위로 두 형(장길상, 장직상)은 ‘조선공로자명감’(총독부 편찬)에 오른 친일파. 일제 때 청구구락부 사건 등으로 투옥되기도 했던 장택상은 해방 후 미군정청 경무부 수도경찰청장이 되어 독립지사들에게 보복했다. 심지어 백범 김구까지 검거하려 했고, 약산 김원봉을 체포해 능멸했으며, 몽양 여운형의 암살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
박정희는 장승원이 사망하고 이틀 뒤, 오태동 옆 마을 상모동에서 태어났다. 부친 박성빈은 장씨 집안의 머슴이자 소작인이었다. 그는 성주 태생으로 1895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동학 접주로 동학군을 이끌었다. 동학군이 패퇴하면서 그는 고향을 떠나 칠곡군 약목을 거쳐 1917년 구미 상모동에 정착했다. 훗날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서 1963년 10월 정읍 황토현에서 열린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준공식에 참여해 추도사를 한 것은 이런 집안의 내력 때문이었다.
셋째 형 상희는 투철한 독립운동가였다. 신간회를 거쳐 몽양의 건국동맹에서 활동하다가 구속됐다. 해방 후엔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하다가 1946년 10월 대구항쟁의 격랑 속에서 경찰에 사살당한다. 일제 말 박정희는 상희의 만류를 뿌리치고 ‘오로지 출세를 위해’ 일본군 장교가 된다. 해방이 되자 염치가 없었던지 남로당에 가입했고, ‘숙군’ 과정에서 체포돼 동료 200여명을 밀고하고 풀려났다.
장택상으로선 배알이 뒤틀릴 만했다. 그는 5·16 쿠데타 후 ‘박정희 타도’의 선봉에 섰다. 한일회담 때는 한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박정희와 맞섰던 김영삼은 그의 비서였고, 김대중은 한때 그의 대변인이었다.
왕산은 1854년 4월1일 오태동 및 상모동과 붙어 있는 임은동에서 부친 허조의 네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을미사변 이듬해인 1896년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김산의병). 셋째 형 허겸도 그와 함께했고, 맏형 허훈은 전답 3천 두락을 팔아 군자금으로 냈다.
1899년 관계에 첫발을 디딘 그는 성균관박사, 중추원의관, 평리원서리재판장(법원장서리)을 거쳐 1904년 8월 의정부 참찬에 올랐다. 참찬 시절 장승원이 경상북도 관찰사를 매직하러 찾아왔다. 이미 요로에 손을 써놓았던바, 의정부 추천만 받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오랜 세교가 있던 터라 내쫓지 못하고 있을 때 제자(박상진)가 한마디 했다. ‘저 사람의 행태로 보아 반드시 그 뜻을 관철할 것이니, 추천은 해주되 돈은 훗날 필요할 때 받기로 약조하십시오.’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제는 곧 조선을 집어삼킬 게 분명했다. 다시 의병을 일으킬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왕산은 김산의병을 이끌면서 군자금의 필요성을 절감했었다. 그는 장승원의 청을 들어준다. 훗날 고헌이 장승원을 처단한 것은 왕산과의 약조에 따라 20만원을 독립군자금으로 내놓으라고 하자, 장승원이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일제에 밀고하려 한 정황 때문이었다.
왕산은 1905년 1월 배일통문 사건으로 일제 헌병대에 구금됐다. 고종은 3월 그를 비서원승(비서실장)에 임명했지만 일제의 방해로 7월 강제 낙향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행되자 영호남, 경기, 강원도를 밀행하며 의병 규합에 나섰고,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함께 구한국군이 해산되자, 경기도 북부지역에서 다시 의병을 기병한다. 그해 11월 각 지역 의병장들의 뜻을 모아 통합의병사령부(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했고, 12월 양주 회의를 통해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서울진공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이듬해 1월 그는 군사장으로서 선발대 300여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공했다. 그러나 후발 부대의 도착이 늦어져 진공작전은 허무하게 실패한다.
이에 굴하지 않고 왕산은 흩어진 의병을 수습해 임진강 한탄강 유역에서 항전을 계속하지만, 6월11일 포천군 일동면 유동리에서 체포됐다. 왕산 허위를 심문한 자는 일본군 헌병대장 겸 경무총장 아카시 모토지로였다. 아카시는 비록 적장이지만 고매하고 강직한 허위의 인품에 매료되어 그를 ‘국사’(國士, 나라의 으뜸 선비)라고 말했다. 그는 1908년 10월21일 경성형무소 1호 사형수로 순국했다.
“만세 강상을 홀로 세웠으니…”, 심산 김창숙은 왕산의 죽음으로 민족이 살아났다고 추도했다. 실제로 1년 뒤(1909년 10월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는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9년 뒤엔 왕산의 제자 박상진이 부일매국노 장승원 박용하 등을 처단했고, 그 정신은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으로 이어졌다.
이토가 사살당하고 꼭 70년이 되던 1979년 10월26일, 또 한 사람이 피살당한다. 박정희다. 상모리 태생의 박정희와 이문리 태생의 김재규는 둘도 없는 고향 선후배였다. 쿠데타에 반대했던 김재규는 정변 후 체포당하지만, 박정희의 도움으로 석방돼 호남비료 사장, 국회의원,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 등으로 승승장구한다. 김재규는 그런 박정희를 큰형처럼 따랐다.
하지만 유신체제는 김일성 체제를 닮아갔고, 경호실장 차지철은 나치스의 친위대장 힘러 노릇을 하며 박정희를 히틀러로 만들었다. 김재규는 10월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유신의 심장’을 쐈다. 그가 박정희를 쏜 이유 중에는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도 있었다. 그 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박근혜는 38년 뒤 대통령직에서 파면당했다. 10·26과 함께 유신체제는 종언을 고했고, 김재규도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처형당했다. 김재규는 이런 말을 남겼다.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
구미에는 이 네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왕산 기념관과 기념공원, 장택상과 김재규 생가, 그리고 동양 최대의 박정희 타운. 왕산기념공원은 후손들에 의해 조성됐고, 한때 거대한 장택상 생가는 절이 되었다가 이제는 음식점이 되었다. 한동안 흉가로 버려졌던 김재규 생가는 반듯하게 복원됐다. 이들 흔적은 소박하지만, 박정희의 흔적은 거창하다. 기존의 생가, 민족중흥관, 동상에 1200억여원을 들여 새마을테마공원, 기념공원, 역사자료관이 건립되고 있거나 추진되고 있다. 반신반인의 성지로 꾸며지는 것이다. 북한의 유일신 김일성 시신이 있는 금수산 궁전과 비슷하다.
과연 무엇이 탁류이고 무엇이 지주산이며, 무엇이 혹세무민의 우상이고 무엇이 살아 있는 정신일까. 역사가 우리 시대에 던지는 물음이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