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헌은 구차한 삶을 극구 거절했다. “몸을 깨끗이 갖고 죽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어찌 구구한 짓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들은 말렸지만 부친은 막무가내였다. 그러자 이렇게 쐐기를 박았다. “죽으면 죽었지, 저들과 더불어 삶을 구한다면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아들의 넋을 떠나보내는 부친의 별사는 애를 끊는다. “이 제문은 오직 내가 너에게 전하는 고별사요, 이 술과 음식은 오직 너에게 권하는 바이니, 너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흠향하기 바란다. 오호! 가슴이 아프구나! 많이 들기 바란다.”
“사람으로 태어나 살았어도 그냥 왔다가 그냥 가게 됨은 온 천하 사람들의 일이라지만 만약 너같이 죽는다면 슬퍼할 것이 없다 하겠다.”
박시규는 아들의 삼년상을 탈상하면서 조촐한 제상을 차리고, 손수 지은 제문을 올렸다. 세로 30㎝에 길이 200㎝가 넘는 한지 두루마리를 빼곡히 채운, 한문 113행 2700여 자나 되는 장문이었다. 간혹 부인을 절구나 율시로 애도하는(‘도망’) 경우는 있지만, 먼저 간 자식(악상)의 영전에 제문을 올리는 건 드문 일이었다.
“네가 죽던 날 옥졸은 울먹이면서 ‘의인이 죽으니 천지가 깜깜해지고 시정은 점방 문이 모두 닫혔다’고 전하였고, 장사 지내던 날 길거리에 가득한 남녀들이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남모르는 나그네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모두들 ‘죽었어도 오히려 영광’이라고 하였다. …발인할 때 기마대가 길가의 늘어선 손님들을 휘몰아 쫓는 모습은 참혹했다.” 청나라 왕족 원헌은 “중국에서도 아드님의 의열은 자세히 보도되었다”며 만사를 써 주었고, 한 인도 사람은 “우리나라에서도 잘못된 자들을 처단하는 기풍이 일어나고 있다”며 향초값을 부의했다.
고헌 박상진. 1885년 1월22일 울산 북구 송정동에서 박시규와 여강 이씨 사이에서 태어나, 대한광복회 사건으로 1918년 2월 체포되어 1921년 8월11일 순국했다. 광복회는 1915년 8월25일 의병투쟁계열의 풍기광복단, 애국계몽운동계열의 조선국권회복단과 달성친목회 등의 의열파들이 결합해 탄생했다. 총사령 박상진, 지휘장 우재룡 권영만, 재무부장 최준, 사무총괄 이복우 등의 본부 조직 외에 경상(지부장 채기중), 경기(김선호), 충청(김한종), 전라(이병찬), 강원(김동호), 황해(이관구), 평안(조현균), 함경도(최봉주) 등 전국 조직을 갖추고, 만주에도 지부(길림광복회, 지부장 이진룡)를 둔 병탄 후 최초 최대 규모의 항일투쟁단체였다.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은 4대 행동강령이었다.
12월 경주 세금 마차 탈취를 시작으로 1916년 1월 보성의 양재학, 5월 낙안의 서도현 처단, 6월 데라우치 조선총독 암살기도, 1917년 11월 영남 갑부 장승원 처단, 1918년 1월 충청도 박용하 처단 등을 비롯해 운산금광 직산금광 상동중석광 습격사건이 잇따랐다. 모두 무장투쟁을 위한 군자금 확보를 위해 광복회가 일으킨 사건이었다.
장두환이 1918년 1월 검거되면서 고헌 등 지휘부와 1천여명이 체포되고, 36명이 기소되었으며, 5명이 사형을 당하면서 광복회는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지만, 그 정신은 3·1운동과 1920년대 의열투쟁으로 이어진다. 청산리대첩의 백야 김좌진은 운산금광 습격사건으로 처형된 이진룡의 후임이었다.
그런 고헌이었으니 처형은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부친은 아들의 구명에 필사적이었다. 심지어 일본 에도로 건너가 정한론의 대부 스에나가 미사오(말영절) 집에 머물며 정관계에 호소했다. 울산 출신의 조선 유학생 김천해 등으로부터 “의사에게 누를 끼칠까 두렵다”는 면박까지 당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고헌은 구차한 삶을 극구 거절했다. “몸을 깨끗이 갖고 죽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어찌 구구한 짓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들은 말렸지만 부친은 막무가내였다. 그러자 이렇게 쐐기를 박았다. “죽으면 죽었지, 저들과 더불어 삶을 구한다면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본래부터 이렇게 결정한 저의 마음을 왜 모르십니까?”
아들의 뜻은 알았지만 부친은 서운했다. “남쪽과 북쪽으로 수없이 쫓아다닌 것은 너의 목숨을 꼭 살려보려고 한 것인데, 너는 끝내 죽음을 당연한 일로 알고 그만 후회 없이 가버렸다. 이로 본다면 너의 죽음이 오히려 나의 산 것보다 낫다 하겠다.” 자책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왜 어리석은 사람처럼 마음속에 온갖 슬픔을 쌓아 마음의 병을 자초하는지 모르겠구나.”
고헌은 경성형무소 1호 사형수였던 스승 왕산 허위의 뒤를 따라 한순간도 곁눈질하지 않았다. 양정의숙 법률경제과에 입학해 1909년 판사 시험에 합격하고 1910년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지만, 일제의 주구가 될 수 없다 하여 임용을 거부했다. 의병장 신돌석과 의형제를 맺고 김좌진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했으며, 1910년 1월 순종의 남서순행 때 친일파 수괴 송병준 암살을 시도했다.
1910년 말 만주에서 왕산의 중형인 허겸을 비롯해 손일민, 김대락, 이상룡, 김동삼 등 1세대 독립지사들을 만나고 연해주, 함경도를 거쳐 돌아온 고헌은 경천어동지회를 결성했다. ‘바람이 부신다’ ‘비가 오신다’ 등 천지만물에 경어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조직원끼리 소통하기로 한 데서 나온 이름이었다. 유세단 수백명은 보부상으로 위장해 만주 이주를 설득했다. 만주 독립지사들의 둔전병 육성 계획을 지원하려던 것이었다. 결과는 괄목할 만했다.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1911년까지 11만7천여명이던 만주 이주가 1912년에는 23만8천여명으로 급증했다.
1912년 상하이를 방문해 신해혁명을 경험한 뒤 조선 혁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돌아오자마자 상덕태상회를 세우고 전국에 자본금 1만원 규모의 잡화상 100곳 설립을 추진한다. 이들 조직은 중국 안동의 삼달양행이나 장춘의 상원양행 그리고 중국 단둥과 신의주의 안동여관과 함께 국내외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이밖에 양제안으로부터 소몽 채기중(풍기광복단 단장)을, 소몽으로부터 다시 백산 우재룡을 소개받는다. 1915년 1월엔 대구에서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정운일 등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을 설립한다. 그해 8월 결성된 광복회는 그런 노력 위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그사이 집안은 영락했다. 전답 7천 두락(마지기)에 임야 100만여평 등의 가산은 허물어져, 그가 순국한 이후엔 처가에서 준 논 5마지기에 생계를 의탁해야 했다. 부친은 이렇게 하소연했다. “일곱 집안 100여명의 식구가 갑자기 모두 거지가 되어 사방으로 떠돌아다니고, 나도 혼자 옛집을 지키고 있다가 며칠 동안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며, …형님(고헌의 양부)은 남에게 얹혀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비참한 신세다.”
고헌은 1907년 왕산 허위에게 당시 신문사 두 개를 세울 수 있었다는 5만원을 제공한다. 1912년 상덕태상회를 세울 때는 전답 1천여 마지기를 팔았다. 1914년 내외물산을 세울 때는 남은 전답 900여 마지기를 저당 잡혔다. 그가 투옥되면서 이 전답마저 소유권이 남에게 넘어갔다.
1961년 3월5일치 <부산일보>엔 이런 기사가 실렸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썩지 않은 정신만을 단 하나의 재산 삼아 …어머니 최영백씨는 얼음처럼 싸늘한 방바닥에 누렇게 부은 몸을 의지하고, …가족들은 때로 보릿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는 것으로 빈 창자를 메워가고 있다.” 부인 최영백과 아들 박경중 등 가족과 후손 이야기였다. 최영백은 조선인 갑부 경주 최씨가의 작은댁 맏딸이었다.
고헌은 박용하를 처단한 장두환이 체포되자, 안동 도산면 하계마을의 이동흠 집으로 피신한다. 유림단 사건의 기암 이중업의 아들이요, 애국지사 향산 이만도의 손자였다. 그곳에서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귀가는 곧 체포요 죽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경주 녹동 집으로 돌아간다.
고헌은 1921년 8월11일 오후 1시, 대구형무소 교수대에 올라 13분 만에 절명했다. 그는 순국 전날 이런 시를 남겼다. “어머님 장례 마치지 못한 채/ 군주의 원수도 갚지 못했고/ 빼앗긴 강토마저 되찾지 못했으니/ 이내 몸 무슨 면목으로 저승엘 갈까.”
그런 아들의 넋을 떠나보내는 부친의 별사는 애를 끊는다. “이 제문은 오직 내가 너에게 전하는 고별사요, 이 술과 음식은 오직 너에게 권하는 바이니, 너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흠향하기 바란다. 오호! 가슴이 아프구나! 많이 들기 바란다.” 그것은 아들이 절명시에서 토로한 자괴감을 달래는 위로이기도 했다. “…이룬 일 하나 없이 저 세상에 가려하니/ 청산이 조롱하고 녹수가 비웃는구나.”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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