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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5.23 18:15 수정 : 2017.05.23 20:29

녹천은 이미 목숨을 내놓은 터였다. 임진왜란 때 제봉, 준봉, 학봉이 그러했던 것처럼. 녹천은 또 ‘불원복’(不遠復, 광복이 멀지 않았다) 세 글자가 새겨진 태극기를 만들어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준봉 할아버지처럼 ‘가국지수’의 깃발을 들었다.

춘강 고정주는 녹천과 생각이 달랐다. ‘화승총 몇 정으로 어떻게 일제와 맞설 수 있을까.’ 춘강은 이듬해 상월정에 학당을 연다. 아들 고광준, 사위인 김성수 등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한 학당이었지만, 학생들이 늘면서 영학숙으로 개편했다.

자연의 속도와 리듬과 순환을 추구하는 슬로시티, 이 모임에 가입하려면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인구 5만명 이하에 주변 환경과 조응하는 주거 형태, 그리고 슬로푸드(유기농 식품) 생산 등이 그것이다. 이 조건을 완벽하게 구비한 마을이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삼지내 마을이다.

얼마나 자부심이 컸으면 창평은 면사무소 도로명 주소(‘창평면 돌담길 9’)에 ‘돌담길’을 썼을까. 월봉산 줄기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마을에 이르러 세 갈래로 나뉘어 흐르고, 돌담은 물길을 따라 이어진다. 자연의 흐름에 사람의 주거와 삶이 맡겨진 것이니, 개울의 속도는 삼지내 삶의 속도가 되었다. 마을 밖은 일망무제의 들판이지만, 돌담 안 텃밭은 가옥 구조의 일부가 되었다. 거기에 수백년 전통의 한과와 엿 그리고 창평국밥은 옛 맛 그대로이니, 창평의 속살은 옛것 그대로다.

그렇다고 창평을 돌담 밑 개울처럼 초탈한 은둔자로 보아선 안 된다. 월봉산 밑 유천리 너른 들판을 적시고 창평천으로 모여드는 개울 소리에 잠깐 귀 기울이면 그 사연을 들을 수 있다. 세상을 구하려던 활인검의 시퍼런 검광과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려던 향학의 열망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물은 월봉산에서 유래했으되, 이야기는 제봉 고경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의병장 제봉에게는 여섯 아들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왕이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피하자 광주에서 일으킨 의병에 부친과 함께 나섰던 아들이 첫째 준봉 종후와 둘째 학봉 인후였다. 둘째는 호남을 정복하기 위해 남진하려던 왜적에 맞서 벌인 금산전투에서 부친과 함께 순절했다. 피눈물을 뿌리며 퇴각한 준봉은 복수의 칼을 벼리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호남 의병장 김천일, 최경회와 함께 순절했다 하여 ‘진주 3장사’다. 제봉의 막내 동생 경형, 가노 봉이와 귀인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제봉의 또 다른 동생 경신은 제주도로 전마를 구하러 갔다가 풍랑을 만나 익사했다. 호남 최고의 명문가 장흥 고씨 종손 집안은 졸지에 난가(亂家, 돌볼 어른이 없는 집안)가 되었다.

몸이 약했던 셋째 준후는 어려서 세상을 떠났고, 다섯째 유후는 잇따른 비보에 가슴을 치다가 죽었다. 여섯째 용후는 아직 어렸으니 남은 건 20대 초반의 넷째 순후뿐이었다. 순후는 80여명에 이르는 식솔을 이끌고, 준봉의 처가(고성 이씨)인 안동 임청각으로 피난을 떠났다. 임청각은 99칸의 대저택이었지만, 이미 명군 지휘부가 장악하고 있었다. 오갈 데 없는 제봉의 식솔을 거둔 것은 학봉 김성일(고인후와 호가 같다)가를 비롯한 예안 이씨 등 안동 명문가들이었다. 특히 종손 학봉이 진주성에서 순절한 학봉가는 제봉 식솔을 제 식구처럼 받아들였다.

순후는 그곳에서 소작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가족을 보살폈다. 왜적이 철수하자 고향 광주 압보촌(지금의 광주 남구 대촌면 압촌마을)으로 돌아왔다. 막내 청사 용후는 안동에 남아 계속 공부를 했고, 1606년 대과에 급제했다. 그가 안동부사로 부임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학봉 김성일의 노부인과 장손 김집 등 학봉가의 어른을 부모님처럼 모시는 것이었다.

학봉 고인후의 다섯 아들은 창평 외가에 맡겨졌다. 사위와 딸을 왜적에게 잃은 외조부모는 사고무친의 외손들을 따듯하게 보살폈다. 훗날 호남 근대교육의 산실이 된 상월정과 많은 재산을 외손에게 물려줬다. 학봉의 후손들이 창평에 세거하게 된 이유다.

3부자가 순절하고 300여년 뒤 창평 유천리 학봉 종택에는 다시 대일항전의 기치가 높이 걸렸다. ‘가국지수’(家國之讐). 가족과 국가의 원수를 처단하라! 1895년 10월 명성왕후 민비 시해를 계기로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난다. 호남에서는 1896년 2월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이학상 등이 기병한다. 녹천 고광순은 학봉의 11세 봉사손이었다.

1차 의병은 고종의 명에 따라 허무하게 해산한다. 녹천은 을사늑약 체결 이듬해인 1906년 11월 다시 장성의 기우만, 광양의 백낙구 등과 함께 기병한다. 이번에도 순천성을 공략하다가 패하면서 호남의진은 흩어진다. 모두 물러섰지만, 녹천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듬해 1월 창평에서 다시 기병한다. 나이 예순, 제봉 할아버지가 순절한 나이였다.

녹천의 목숨은 이미 나라에 내놓은 터. 창평의병을 일으키면서 그는 부인에게 부탁했다. “내 옷섶에 이름 석 자를 붉은 실로 새겨주시오.” 왜적이 전리품으로 수급(머리)을 베어가도 신원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임진왜란 때 제봉, 준봉, 학봉이 그러했던 것처럼. 녹천은 또 ‘불원복’(不遠復, 광복이 멀지 않았다) 세 글자가 새겨진 태극기를 만들어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준봉 할아버지처럼 ‘가국지수’의 깃발을 들었다.

창평의병은 한때 화순을 점령하기도 했지만 동복에서 관군에게 패한다. 녹천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9월18일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거듭된 패배를 거울삼아 의병을 정예화해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곳에서 지리산 포수들을 모집하는 한편 영호남 각지의 의병장에게 격문을 보내 지리산에서 연합전선을 구축하자고 호소했다.

일제는 초장에 뿌리를 뽑기로 했다. 진해에 주둔하던 해군 중포병대대 1개 소대와 광주의 육군 1개 중대, 그리고 진주경찰서의 순경 등으로 토벌대를 편성해 연곡사를 습격했다. 1907년 10월16일이었다. 당시 의병 본진은 화개의 일본군을 기습하려고 떠난 터여서, 연곡사엔 의병 스물댓 명밖에 없었다. 녹천은 13명의 의병과 함께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다. 비록 적장이지만 일제는 이 불굴의 의병에게 ‘호남의병의 선구자’ 혹은 ‘고충신’이라고 불렀다.

을사늑약 후 유천리 종가에서 의병 기병 움직임이 한창일 때, 아랫마을 삼지내엔 학봉 10세손인 규장각 직각(국립도서관장)이던 춘강 고정주가 관직을 내놓고 돌아온다. ‘국권이 사실상 일본에 넘어갔는데, 남아서 무엇 할 것인가.’ 춘강 고정주는 그러나 녹천과 생각이 달랐다. ‘화승총 몇 정으로 어떻게 일제와 맞설 수 있을까.’

춘강은 이듬해 상월정에 학당을 연다. 아들 고광준, 사위인 김성수 등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한 학당이었지만, 학생들이 늘면서 영학숙으로 개편했다. 외국인 선교사를 모셔 영어와 일어, 한문, 산술 등을 가르쳤다. 이때 송진우, 백관수 등이 함께 공부한다. 영학숙은 창흥의숙으로 커지고, 이때 입학생이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였다. 김병로 외가도 창평이었다. 김성수의 경우 모친은 물론 아내와 두 며느리도 장흥 고씨 학봉파였다. 이들은 동학혁명이 전라도 전역을 휩쓸 때 창평 외가로 피난했다. 당시 농민군은 고씨 문중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1909년 창흥의숙은 학교 인가를 받아 창평학교로, 병탄 뒤에는 창흥국민학교로 개편됐다. 한미한 시골 소학교였지만, 창평학교는 걸출한 인재들을 배출했다. 고재청 국회부의장, 고재호 대법관, 고재필 보사부 장관, 고재종 전남교육감, 고중석 헌법재판관, 이한기 전 국무총리, 이회창 전 총리의 외삼촌인 김홍용 문용 성용(전 국회의원) 등….

춘강은 이밖에 창평상회를 설립해 각종 잡화를 팔거나 급전을 빌려줬다. 당시 일본인들은 전국 각지에서 고리대로 가난한 농민들의 주머니를 긁어내고 있었지만, 창평상회로 말미암아 일본인들의 고리채가 창평에는 발을 붙이지 못했다.

혹자는 창평학교를 일러 대한민국 민족주의 우파의 산실이라고 한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진보적 교육의 발상지라고 해야 옳다. 민족주의 우파의 적통은 칼로써 일제와 맞서던 녹천으로 이어졌다. 춘강은 낙향할 때 이미 단발을 했고, 서양 학문을 가르쳤으니 향리에서는 친일파 논란까지 당했다. 녹천이 가문의 전통인 보수주의 본령을 강고히 지켰다면, 춘강은 여기에 진보적 날개를 단 것이었다.

다툼이란 없었다. 오히려 창평의병은 군량미를 만석꾼 춘강 창고에서 가져다 썼고, 춘강은 못 본 척했다. 제봉가의 충절이 수백년 견고했던 것은 이런 건강한 좌우의 날개 때문이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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