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조선에 전북 고창의 동리 신재효가 있었다면, 20세기 일제 치하엔 전남 담양의 효남 박석기가 있었다. 동리가 판소리 12마당을 정리해 민족의 소리를 지켜냈다면, 효남은 일제의 문화말살정책 속에서 소리의 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전 재산을 털어 후원했다.
예악은 조선 선비가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이었다. 예가 질서를 추구한다면 악은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효남은 소희에게 그런 덕목을 요구했다. 그러나 소희는 타고난 예인, 대중이라는 바다에서 떠날 수 없는 배였다. 효남은 그런 소희를 잡지 않았다.
소리꾼들 사이엔 이런 전설이 있다. 19세기 조선에 전북 고창의 동리 신재효가 있었다면, 20세기 일제 치하엔 전남 담양의 효남 박석기가 있었다. 동리가 판소리 열두 마당을 정리해 민족의 소리를 지켜냈다면, 효남은 일제의 문화말살정책 속에서 소리의 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전 재산을 털어 후원했다. 동리에겐 최초, 최고의 여성 소리꾼 진채선이 있었다면, 효남에겐 불세출의 가객 김소희가 있었다. 둘은 모두 비련으로 끝났다.
다만 동리는 지금도 판소리계의 위대한 주연으로 기억되지만, 박석기는 옛 국악인 사이에서 조연으로나 거론됐고, 김소희의 한때 남편으로만 기억된다. 국립국악원이 2015년 음악극 ‘박석기를 생각하다’를 무대에 올린 것은 그런 박석기에게 바치는 뜻깊은 헌사였다.
효남 박석기. 담양 창평의 거부 박진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춘강 고정주가 개설한 창흥의숙, 창평보통학교를 다니며 일찍이 근대 문물에 눈을 떴고, 경성보통학교(경기중고) 4년 때 일본에 유학해, 프랑스계 학교에 잠시 적을 두었다가 교토 제3고보를 거쳐 동경제국대학 불문과를 졸업한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인 인텔리였다. 교토 고보 시절 야구부의 주축이었고, 조선 유학생 야구단을 결성해 하와이로 혹은 조국으로 친선경기를 다니며 민족의 의분을 일깨우려 동분서주했던 열혈남아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지독한 결벽증과 내향성 탓에 사진 한 장 남기는 것조차 꺼렸다. 1953년 10월 5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을 때 유족들이 영정 사진을 구하지 못해 신분증 사진을 확대해 쓴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의 유품이란 그가 작사하고 안익태가 작곡한 조선유학생야구단의 응원가가 고작이었다. “원한과 분격뿐인 한국 남아야/ 고국산천 떠나서 이역천지에/ 누구를 위해 분투하느냐/ 한국반도야 잘도 있거라/ 우리는 너희 회포 풀으리라.” 첫 소절부터 ‘원한과 분격뿐인 한국 남아’라고 했으니 시대에 대한 그의 ‘분노’를 알 만하다. 이 응원가는 조선 청소년들의 애창곡이 되었고, 일제는 곧 금지곡으로 묶어버렸다.
일본에서 귀향한 그는 고향에 칩거했다. 동경제대 법문학부 출신으로 출세의 길을 택했던 형 석윤이나 대학 동창들이 그의 관계 진출을 위해 성화를 부렸지만 그는 두문불출했다. 이들 중에는 고교 및 대학 시절 절친이었던 기시 노부스케도 있었다. 일제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산업 및 통상 최고 책임자였으며, 도조 히데키 내각의 상공대신을 역임했고, 패전 후 1급 전범으로 구속됐다가 석방된 뒤 외무상을 거쳐 총리를 역임한, 지금의 아베 신조 총리의 외할아버지다.
중·고교 시절부터 그는 거문고를 즐겼다. 칩거하면서부터는 아예 당대의 명인 백낙준을 독선생으로 모셨다. ‘백낙준류’ 거문고를 어느 정도 전수받았을 즈음 청소년 한갑득이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그 그릇을 알아본 효남은 한갑득을 집안에 들어앉히고 자신이 배운 거문고산조와 영산회상 등을 그대로 전수했다. 7년간 그 밑에서 지낸 한갑득은 백낙준, 신쾌동을 잇는 거문고산조의 명인이 된다. 효남의 딸 윤초는 말했다. “어릴 적 아버지의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자고, 아버지의 거문고 소리에 잠에서 깼다.”
한갑득이 계기가 되어 그는 남면 지실마을 성산 산자락에 소리학교 지실초당을 지었다. 학생들이 먹고 자며 소리에 전념할 수 있도록 기숙사도 세웠다. 선생으로 담양 출신의 명창 박동실도 초빙했다. 기숙사엔 “항상 20명 이상이 숙식을 하며 배우고, 선생도 박동실 외에 서너 명 더 있었다.”(명창 박송희) 모두 무료였다. 집에 갔다 올 때는 여비까지 줬다. 그렇게 배운 이들이 김소희, 한애순, 한승호 형제, 김녹주, 박귀희, 박후성, 임춘앵, 임유앵, 박송희, 장월중선 등이었다. 가히 조선의 명인 명창 산실이었다. “(초당에는) 박동실 명창에게서 김소희 박초월 한애순 등이 판소리를 배웠는데, 노래하는 사람, 악기 하는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한갑득)
박동실과 효남은 특별했다. 동실은 세상이 아는 명창이었고, 효남의 예악에 대한 이해는 세상이 인정했다. 동실이 공연을 하고 작창을 하면, 효남은 그 길을 잡아줬다. 후대를 위해 동실은 치열하게 가르쳤고, 효남은 아낌없이 후원했다. 둘은 판소리의 맥을 잇는 질긴 동아줄이었다. 해방 후 동실이 판소리 <열사가 1~4> <해방가> 등을 창작해 역류하는 세상에 저항한 것은 효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동실이 6·25 때 월북해 판소리의 민족음악적 양식을 발전시켜 현대적 해방가극의 토대를 만든 것은 그 연장이었다.
지실초당은 중일전쟁을 전후해 일제의 압력으로 폐쇄됐다. 효남은 1938년 광주에서 화랑창극단을 결성했다. 박동실 총감독에 김소희 한갑득 한승호 박녹주 등 대부분 지실초당 출신들이 단원으로 뛰었다. 화랑창극단은 최초의 창작 사극 <봉덕사의 종소리>에 이어 <팔담춘몽> <망부석> 등 민족의 비애를 담은 창작극을 잇따라 무대에 올려 그 지향하는 바를 분명히 했다. 최남선 이보상 정노식 이광수 등 당대의 문장가들이 창작극의 사설과 고증을 지원했다.
총독부로서는 눈엣가시였다. 순회공연에는 고등경찰을 붙여 감시하고 제재했다. 창극단 운영은 힘들었다. 돈 안 되는 지방 순회공연도 강행했으니 살림은 더 힘들었다. 때론 단원들의 숙식비마저 충당할 수 없었다. 여관 빚을 갚지 못하면 창극단의 얼굴 김소희를 인질로 잡혀두고, 단원들은 다음 행선지로 떠났다. 그때마다 돈을 마련해 달려온 것은 효남이었다. 지실초당 시절 선생과 제자 사이였던 둘은 이 과정에서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예악은 조선 선비가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이었다. 예가 질서를 추구한다면 악은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효남은 소희에게 그런 덕목을 요구했다. 그러나 소희는 타고난 예인, 대중이라는 바다에서 떠날 수 없는 배였다. 게다가 가난한 친정 식구들은 그만 쳐다보고 있었다. 1944년 둘 사이에서 윤초가 태어나지만, 소희는 집안에 붙어 있을 수 없었다. 해방 후엔 박귀희와 함께 설립한 여성국극단을 이끄느라 더 바빴다. 효남은 그런 소희를 잡지 않았다.
수천 석에 이르던 재산은 일제 말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형 석윤의 맏아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 집 재산은 작은아버지가 다 썼다네.” 만주국에서 폴란드 대사, 포르투갈 영사 등을 역임하던 형 석윤은 아우에게 늘 미안했다. 부친으로부터 받은 막대한 유산은 동생이 마음대로 처분하도록 했다.
효남에게 해방 후에도 출세의 기회는 있었다. 초대 내무부 장관 윤치영은 효남을 중앙인사처장(옛 총무처장)쯤 되는 자리에 추천하려 했다. 효남은 이렇게 거절했다. “내가 들어가면 빗자루로 쓸어버릴 사람뿐인데, 내가 어찌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그가 꾸던 꿈은 창극단을 이끌고 미국 순회공연에 나서는 것이었다. 한국의 소리를 제대로 들으면 한국민을 보는 눈도 달라지리라….
효남은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갔다. 그곳에서 유치진의 연극대본 <가야금>을 창극으로 제작해 햇님국극단과 함께 무대에 올렸다. 주인공 배꽃아기에 김소희, 가실왕에 박귀희가 출연했다. 당시 7살이었던 딸 윤초는 학춤을 췄다. 유치진의 강권으로 이뤄졌지만, 오매불망 그리던 무대였다. 그러나 그게 마지막이었다. 효남은 휴전 3개월 뒤 54살의 나이로 급서했다.
주인이 떠난 담양 남면 지곡리 지실초당엔 돌덩이(하마비) 하나만 옛터를 지킨다. 초당은 개조돼 식당으로 쓰이고, 숙사는 흔적도 없다. 주변 대숲에 옛 모습이 남아 있다고 하나, 어찌 댓바람이 그 시절 그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을까. 그저 소희가 효남을 그리며 불렀음직한 소리 한 자락이 댓바람에 실려올 듯하여 위로를 삼는다. “갈까부다 갈까부네 님을 따라 갈까부다 … 우리 님 계신 곳은 무삼 물이 막혔간디 이다지도 못 오신가 차라리 내가 죽어 삼월동풍 연자 되어 임 계신 처마 끝에 집을 짓고 내가 노니다가 밤만 되면 임을 만나 만단정회를 풀어 볼거나.”(<춘향가> 중 ‘갈까부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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