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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재씨 딸 윤지양이 복숭아 농장을 찾아와 아빠의 일손을 거들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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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부다] 복숭아 농사 짓는 이충재씨
“식구들한테 미안하죠 뭐, 나만 좋은 데 있으니까. 혼자 행복한 거잖아요….”
충북 음성군 감곡면 문촌4리에 사는 이충재(54)씨. 그는 나이 쉰을 넘어서자 직업뿐 아니라 사는 곳과 노동 형태, 그리고 생활방식까지 모두 바꿨다. 2011년 8월 귀농해 복숭아 농사를 시작한 ‘신참 귀농인’이다. 서울에서 학원을 운영하다가 땀 흘려 일하는 육체노동을 하고 싶어 농촌으로 들어갔고, 가족과도 떨어져 독신생활을 한다. ‘기러기 아빠’는 원래 자식과 아내를 외국에 보내고 홀로 사는 아빠를 뜻하지만, 이씨는 가족을 서울에 남겨두고 스스로 ‘나홀로 귀농’을 택해 ‘기러기 아빠’가 된 것이다.
이씨는 원래 아내와 함께 중·고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을 운영했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그가 과학을 담당하고 아내는 수학을 맡았다. 학원이 한창 잘될 때는 150여명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가 몰아닥쳤고, 학부모들은 가장 먼저 교육비 지출을 줄였다. 경영난에 허덕이던 이들 부부는 끝내 학원 문을 닫았다. 3~4년 뒤 부부는 중국에서 학원을 꾸려볼 생각으로 현지에 건너가 장소까지 물색하며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학원도 나이가 있으니 안되겠더라고요. 아이들을 좋아해서 학원 운영이 즐거웠지만 하루 종일 서서 강의를 하는 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힘들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귀농을 생각했지요.”
50대에 퇴물 취급을 받는 서울과 달리 노후에도 보람을 찾고 건강을 지키며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시골생활에 매료됐다. 귀농을 결심한 뒤 그는 아내와 농촌마을을 둘러보고 다녔다. 아내는 부산 출신으로 한번도 시골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 처음부터 시골생활을 겁냈다. 하지만 이씨의 설득으로 강원도 영월 등지를 함께 둘러보고 나서 생각을 바꿨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낙후된 시골만은 아니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인생 2막을 시작할 보금자리만 잘 선택하면 될 일이었다.
이씨는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우연히 연락이 닿은 고등학교 선배 덕에 조금은 수월하게 귀농생활을 시작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내려와 같이 농사를 지어보자”는 한마디에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음성으로 내려왔다.
학원 운영 접고 50대에 귀농농업인대학 청강하며 실습하고
농사짓기 전 작물 연구에 심혈
자리 잡을 때까지는 홀아비로
“귀농인이라는 생각 버리고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어야” 처음 1년은 본격적인 귀농을 위한 연습기간으로 삼았다. 1년 동안 음성군 농업기술센터에서 진행하는 농업인대학 ‘복숭아 과정’을 청강하며 선배의 농장 옆에 작은 땅을 빌려 시험삼아 농사를 시작했다. 농사로 이익을 얻겠다는 생각보다 복숭아에 대한 지식 습득과 실습에 무게를 둔 기간이었다. 그는 귀농을 시작할 때 섣불리 결정해 이주하지 말고 일정 기간 농사를 지으려는 작물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과감히 ‘나홀로 귀농’을 결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농사는 지을수록 어려워요. 농업기술센터에서 원론을 배우지만 실제 농사는 또 다르거든요. 2~3년 정도 직접 부딪혀 봐야 하고, 작물도 몇년 자리가 잡혀야 제대로 돈이 되죠. 요즘 귀농 붐이 불어 터만 봐두고 무작정 시골로 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랬다간 실패하기 십상이에요.” 이씨는 귀농한 지 3년이 다 돼가지만 아직도 아내에게 금전적으로 손을 내밀어야 할 때가 있다. 귀농인들 사이에는 ‘100명이 귀농하면 5명만 성공하고 나머지는 다 실패해서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그는 “준비 없이 귀농해 농사에 뛰어들었다가 소득이 안 나와서 그런 경우가 많다”며 본인은 앞으로 길게는 3년쯤, 농사가 자리를 잡고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수입을 손에 쥘 때까지는 가족과 떨어져 ‘홀아비 생활’을 이어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내와 19살 딸(이윤지)도 가끔 음성에 내려와 일손을 돕는다. 딸은 이씨의 귀농을 적극적으로 응원해왔다. 요즘은 고3이라 자주 내려오지 못하지만 틈만 나면 아빠 곁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한다. 도시 소녀답게 처음에는 시골 분위기와 허름한 집을 낯설어했지만 날이 갈수록 조용하고 아늑한 농촌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가지치기 등 일을 할 때는 초보 농부인 아빠가 교관이 된다. “봐봐, 햇볕을 너무 가린다 싶은 가지는 이렇게 대범하게 딱 자르는 거야. 왜 아기 다루듯 어쩔 줄 몰라 하니. 아빠가 봐줄게 다시 한번 해봐.” 그러자 사다리에 올라서서 어정쩡하게 자세를 취하고 있던 딸이 허리를 쭉 펴고 팔을 뻗어 다른 가지 하나를 쳐냈다. 손길은 서툴지만 눈빛만큼은 사뭇 진지했다. 딸을 바라보는 이씨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여유롭고 아늑한 농촌생활이 도시생활에 견주어 좋은 점도 많지만, 마냥 만족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하루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도 직접 밥을 짓고 방을 치우고 빨래를 하는 등 집안일을 해야 하는 그 시간이 육체적으로 조금 힘들다고 했다. 지난해는 농사일이 바쁠 때 아침을 거르고 점심도 찬물에 밥을 말아 김치 하나만 놓고 끼니를 때운 적도 많았다. 그랬더니 진짜 쓰러질 것 같아 이후 밥 하나만큼은 꼬박꼬박 챙겨 먹고 아주 힘들 때는 혼자 음성에 나가 보양식을 사먹기도 한다. 몸이 아플 때는 ‘내가 왜 혼자서 이 고생을 하나’ 하는 후회가 밀려오기도 한다. 시골은 하루 일이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피곤하기도 하지만 사생활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남의 집 방문을 삼간다. 그런 점들이 평소에는 홀로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지만 몸이 아파 누워 있어도 누구 하나 방문하지 않으니 힘들고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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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비어 있던 농가에 월세 10만원을 주고 거처를 마련했다. 그는 일을 마치고 귀가할 때 가끔 쓸쓸함을 느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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