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소설 <2화>
사 번과 오 번은 봉고차에서 만났다. 자정 무렵이었고 봉고차가 서울역, 영등포, 구로에 잠깐 정차했다. 사 번이 서울역에서, 오 번이 구로에서 탔다. 오 번은 허리를 굽히고 맨 뒷좌석에 가 앉았다. 사 번의 옆자리였다. 봉고차는 톨게이트를 지나며 속도를 높였다. 예측할 수 없는 관성 때문에 오 번의 몸이 거푸 사 번의 몸을 때렸다. 창밖을 응시하던 사 번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미안합니다.
오 번은 사과하기 위해 몸을 틀었고, 다른 사람의 팔꿈치를 건드렸고, 이마를 쳤고, 무릎을 때렸다.
-이거, 정말. 미안합니다.
사 번은 이어폰을 꽂은 채 몸을 옹송그렸다. 창 너머로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사 번의 얼굴이 잠깐 드러났다가 곧장 컴컴해졌다. 쉽게 켜지고 쉽게 꺼지는 촛불처럼. 사 번은 창 위로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자신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곁에 앉은 오 번이 소곤거렸다.
-본의 아니게 미안합니다.
사 번은 대꾸하지 않았다. 낡은 봉고 엔진 소리를 제외하면 차 안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사람들은 마스크에 얼굴을 묻고 말이 없었다. 말을 걸어도 대꾸하지 않았다.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잠을 청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실어놓은 물건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 번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감았다가 떴다가, 완전히 눈을 감아버렸다.
봉고는 한참을 더 달린 후에야 완전히 멈췄다. 서너 개의 컨테이너가 환한 창을 달고 서 있는 공터였다. 사 번이 가장 먼저 내리고, 오 번이 맨 마지막에 내렸다. 사람들이 줄지어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 오 번은 사람들의 뒤를 따라갔다. 문 열린 컨테이너 앞에서 한 사내가 머리 위로 손을 흔들었다.
-거기, 신참이죠?
사 번이었다. 사 번은 오 번의 어깨를 치고 알은체를 했다. 오 번이 일렬로 늘어선 줄 끄트머리에 섰을 때였다.
-이거 미안합니다. 장인수입니다. 소개가 늦었네요. 안 그래도 아까 사과를 하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오 번이 손을 내밀었다. 사 번은 손을 맞잡지 않고 오 번의 얼굴만 빤히 내려다보았다. 사 번은 오 번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아저씨, 그런 건 됐고. 그냥 나한테 피해나 주지 마요. 그런 거 싫으니까.
-그래야죠. 그래야지요.
오 번은 다만 고개를 끄덕였다. 사 번이 돌아섰다. 그리고 오 번이 뒤돌아선 사 번의 팔뚝을 살며시 찔렀다. 검지를 세우고 아주 가볍게. 팔목에서부터 뻗어 나간 그림 탓이었다. 새까만 대나무가 사 번의 팔목을 붙잡고 어깨 위로 자라나는 중이었다.
-근데 그거 문신입니까?
오 번은 검지와 엄지를 비빈 다음 손끝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줄기나 이파리, 마디나 꽃잎 같은 데를 쓱 문지른 다음 손끝을 살피는 거였다.
-문신이네요. 요즘 젊은 애들은 이런 걸 많이 한다죠?
-아, 진짜 이 아저씨 안 되겠네. 이봐요. 애라뇨? 이래 봬도 내가 이 일을 얼마나 오래 했는지 알아요? 어쨌든 현장에선 내가 선배라고요. 알아들었어요?
오 번은 다만 예, 했다. 예. 예. 한 번 더. 예. 그래도 선배님, 이라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나자 사내 둘이 조를 나누기 시작했다. A조, B조, C조, D조, E조. 사 번과 오 번은 D조에 배치되었다. 일 번, 이 번, 삼 번, 사 번, 인원을 셀 때마다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사 번, 사 번이 손을 들고 오 번, 오 번이 손을 드는 식이었다. 순서대로 공평하게 나눠 갖는 이름. 이름은 충분했다.
-깨끗하게 하자고. 깨끗하게.
배치된 구역으로 떠나기 전에, 팀원을 관리한다는 부장이 몸소 야구 배트를 휘둘렀다. 볼을 기다리는 타자처럼 그는 오래 허공을 노려보다가 힘껏 방망이를 내둘렀다. 이건 일이라고, 일. 다들 일하잖아, 일. 그는 배트를 세워 사람들의 어깨를 콕콕 찌르기도 했다. 실적이 좋으면 보너스를 두둑이 챙겨주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일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나. 스윙. 잘하는 거야. 스윙. 잘하려면. 스윙. 열심히 해야지. 부장은 배트로 바닥을 짚고 숨을 고른 뒤 사람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라고, 다들 자기 일을 하는 거니까. 우리는 우리 일을 하고 지들은 지들 일을 하는 거지. 스윙. 그리고 뭐든 열심히 하면 잘하게 되어 있거든. 스윙, 스윙. 머리를 쓰라고. 머리를.
오 번은 대충 치수가 맞을 만한 보호 장비를 골랐다. 손목과 무릎 보호대, 전투화, 헬멧 따위가 뒤섞인 바구니 앞에서였다. 멀리서 보면 멀쩡했지만 모두 어딘가 뜯어지거나 찢어지고 구멍이 난 상태였다. 오 번은 사람들 사이로 손을 뻗어 헬멧을 집었고 전투화를 골라냈다. 그런 다음 간신히 쇠파이프를 거머쥐었다. 사 번이 막 나무 배트를 골라 들었을 때였다.
-아무래도 나무는 빨리 부러질 거 같은데요. 그렇지 않나요?
오 번이 매끈한 쇠파이프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사 번이 대꾸했다.
-저기, 나한테 충고 같은 거 하지 말고 본인이나 잘해요. 그래도 내가 훨씬 베테랑이니까. 그리고 너무 단단하면요. 오히려 휘두르기가 어렵다고요.
사 번이 배트 끝을 매만지며 실소했다. 스윙, 스윙, 스윙. 모두 각자 고른 연장으로 두어 번쯤 공중을 가격해보았다. 허공이 벌어지면서 바람 소리가 빠져나왔다. 귀를 기울이면 연장의 굵기나 재료, 무게에 따라 미세한 차이가 느껴질 법도 했지만, 다시 들으면 그저 쉭쉭, 숨을 몰아쉬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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