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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6.05 10:00 수정 : 2013.06.19 14:15

김혜진 소설 <3화>



사 번과 오 번이 산길을 내려온다. 오 번이 앞서 걷고 사 번이 따라 걷는다. 한 손에 랜턴, 한 손에 헬멧을 들고 캄캄한 전방을 살피면서. 랜턴이 닿은 자리는 동그랗게 열렸다가 순식간에 닫힌다. 뜨거운 숨이 뿜어져 나왔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괜찮을까요? 아저씨?

사 번이 자꾸 뒤를 돌아본다. 오 번은 대답하지 않는다.

-괜찮겠지요?

사 번은 랜턴으로 오 번의 뒷모습을 쫓는다. 동그란 불빛이 오 번의 몸을 훑는다. 전투화와 무릎 보호대, 헬멧 위를 가쁘게 오르내린다. 마침내 오 번이 뒤돌아본다. 오 번은 땀으로 뒤범벅인 얼굴을 쓸어내린다. 시큼한 냄새가 묻어난다.

-조용히, 조용히 좀 하라니까. 이런 밤에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단 말이오. 누가 들으면 어쩝니까.

오 번은 불빛을 피해 걸음을 옮긴다. 길은 계속 이어진다. 불빛을 따라 없던 길이 자꾸 생겨난다. 아저씨, 아저씨.

-그렇게 부르면 내가 깜짝 놀란다니까. 내가 심장이 안 좋다고요. 아까 못 들었어요? 심장이 안 좋아요. 심장이 안 좋다고요.

-아저씨, 어떡해요.

-뭘 어떡해. 돈이 없는걸. 사실 수술을 해야 하는데 이러고 있어요. 조심하면 뭐 살 수는 있겠지.

-아니요. 여자 말이에요.

-무슨 여자?

사 번이 랜턴으로 걸어온 쪽을 가리킨다. 오 번이 어둠 속을 잠깐 노려보다가 입을 다문다. 그리고 걸음을 재촉한다. 아저씨. 괜찮을까요? 아저씨. 잘못되면 어쩌죠. 신고하면 어떡해요. 아저씨. 감옥 가면 어떡해요. 아저씨. 감옥 가봤어요? 아저씨. 내 말 듣고 있어요? 오 번은 입을 꾹 다물고 걷기만 한다. 뒤돌아보지 않는다. 뒤따르던 사 번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선다.

-아, 몰라요. 어쨌건 때린 건 아저씨니까요.

사 번이 목소리를 키운다. 난 몰라요, 난 모른다고요. 저만치 가던 오 번이 뒤돌아본다. 그리고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되돌아온다.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하면 되나. 그쪽이 하라고 해서 내가 한 거잖아요. 그렇게 말하면 어떡합니까.

-누가요? 난 그런 적 없어요.

오 번은 난감한 듯 말을 멈췄다가 그쪽이, 했다가 당신이, 했다가 다시 말을 꺼낸다.

-현장에서 선배가 시키니까 한 거지. 알다시피 나는 오늘 처음 온 초짜 아닙니까.

-선배라니요. 나 선배 아니에요. 나도 겨우 사흘밖에 안 됐단 말이에요. 선배는 누가 선배라고 그래요!

사 번의 목소리가 산속의 고요를 힘껏 떠밀었다가 가라앉는다. 사 번이 한기를 느낀 듯 어깨를 떤다.

-사흘이라고? 나한테는 그런 말 안 했잖아.

사흘이라고? 정말 사흘? 오 번이 다시 묻는다. 사 번이 고개를 떨어뜨린다.

-그래도요. 아저씨. 내가 그렇게 세게 때리라고 말한 적은 없잖아요.

-시켰잖습니까?

-겁만 주라는 거였어요.

-그럼 어떻게 겁을 주는지 가르쳐줬어야지.

-그건 나도 몰라요. 모른다고요.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사 번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되돌아온다. 둘은 눈을 맞춘다. 꼼짝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 번이 침묵을 깬다.

-근데요. 아저씨, 괜찮겠죠?

사 번과 오 번은 가만히 눈을 맞춘 다음 거의 동시에 뒤를 돌아본다. 보면 볼수록 어둠은 넓어지고 깊어진다. 둘은 어둠에 사로잡힌 것처럼 제자리에 붙박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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