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소설 <5화>
차가운 어둠 속으로 세 사람의 입김이 하얗게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완만한 경사는 계속 이어지고 멀리 내려다보이는 철거촌의 풍경이 담뱃불처럼 자그마하다. 검고 단단한 어둠 속에서 동네는 구멍 난 자리처럼 환하다. 누군가 필터를 힘껏 빨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동네가 빨갛게 타오른다. 여자를 끌고 가던 오 번이 아래를 내려다본다.
-아직 덜 끝났나 보네. 근데 우리도 빨리 내려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꾸물대다가 일당도 못 받고 그러면 어떡해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 번은 랜턴으로 산속 여기저기를 훑어본다. 나뭇가지나 돌멩이, 흙이나 자갈 같은 것들이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일회용 도시락, 찌그러진 깡통, 부러진 젓가락이나 과자 봉지들도 눈에 띈다. 사 번이 길 한가운데에 침을 탁 뱉는다.
-아저씨는 걱정도 팔자네요. -정말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아무도 모르면 어떡합니까? 우리가 일을 안 했다고 생각하면 어쩌지요? 돈을 안 줄지도 모르잖아요.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사 번은 대답하지 않고 걷기만 한다. 어둠을 꾹꾹 밟으면서. 사 번은 숨을 들이켜고 여자의 팔을 잡아당기고, 다시 숨을 들이켜고 여자의 팔을 잡아당긴다. 지친 여자의 몸은 자꾸 무거워진다.
-아, 아저씨. 저 더는 못 걷겠어요. 못 걷겠다고요. 여자가 주저앉을 듯 엉덩이를 뒤로 뺀다. 오 번이 안간힘을 써서 여자의 무게중심을 바로 세운다.
-얼마나,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아, 너무 힘드네요. 이런다고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근데 어디 아는 데가 있는 겁니까? 꼭 거기까지 가야 합니까? 오 번은 아예 여자의 한쪽 팔을 어깨에 걸고 끌어당긴다. 여자가 간신히 한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몇 걸음 더 못 가 다시 멈춰 선다.
-그럼, 여기 어디 묶어버려요. 여기 어디. 사 번이 여자의 손을 팽개치고 말한다.
-여기요? 여긴 그냥 산인데. 오 번이 랜턴을 들어 사방을 비춘다.
-어디서 하면 어때. 어서 묶어요. 묶으라고. 나도 더는 못 가. 사 번은 무릎을 짚은 채 숨을 고른다. 오 번이 여자의 엉덩이를 힘껏 떠민다. 흘러내린 땀으로 여자의 바지는 이미 축축하다. 오 번은 손바닥을 펼쳐 냄새를 맡은 다음 재차 여자를 떠민다.
-아가씨. 저쪽에 앉아요. 어차피 우리가 피차 다 지쳤으니까, 고집 피우지 말고. 아가씨도 쉬고 싶잖아요. 여자의 몸에서 큼큼한 땀 냄새가 배어 나온다. 오 번이 등에 메고 있던 파이프를 꺼내 흙 속에 박는다.
여자는 흙길을 약간 벗어난 나무 아래 묶인다. 앉자마자 여자는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고 긴 숨을 토해낸다. 오 번이 여자의 늘어진 두 손을 하나로 모은다. 여자는 나무를 뒤로 안은 자세로 결박된다. 아, 아, 신음을 뱉으면서도 여자는 저항하지 못한다. 오 번이 여자 앞에 털썩 주저앉는다. 멀찌감치 선 사 번이 담배를 꺼낸다. 곧장 불을 붙이고 필터를 빤다.
-저, 저도 그럼 한 대 피우겠습니다. 원래 근무 시간에 담배 피우면 안 되지만 우리끼리니까. 오 번도 서둘러 담배를 꺼낸다. 공중으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여자가 다시 입을 연다. 아저씨. 여자가 몸을 뒤챌 때마다 바스락거리며 낙엽들이 부서진다. 아저씨. 사 번과 오 번은 대답하지 않는다.
-근데, 여기 뭐가 있는 거 같아요. 돌멩이 같은데. 너무 아파요. 아프다고요. 여자가 몸을 뒤챈다. 아저씨. 여자의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저기, 미안한데, 나도 좀 쉬어야 할 게 아닙니까. 좀 참아요. 나도 한숨 돌려야지. 벌써 몇 시간째 걸어왔잖아요. 목도 마르고 죽겠어요. 나도. -아저씨, 다른 건 참겠는데, 이게 엉덩이를 찌르는 것 같아요. 아프다고요. -그럼 엉덩이를 좀 움직여 봐요. 요령껏. 그걸 내가 어떻게 빼줍니까. 여자는 이쪽저쪽으로 엉덩이를 움직이다가 다시 아저씨를 찾는다. 아저씨, 아저씨, 아저씨.
-청바지를 뚫을 거 같아요. 너무 무섭다고요. -아, 진짜 골 때리네, 저거. 아가리 안 닥칠래?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어. 사 번이 담배꽁초를 비벼 끄며 킥킥거린다. 여자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친다.
-그래, 이 개새끼들아! 죽여, 죽여 버려! 죽여 버려, 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갔다가 되돌아온다. 죽여, 죽여, 버려, 버려, 죽여 버려. 두 사람은 말을 멈춘 채, 어둔 산 속을 두리번거린다. 여자의 고함이 고요히 잠든 것들을 죄다 깨울 것만 같다. 오 번이 사 번 쪽으로 몸을 돌리고 소곤거린다.
-진짭니까? -뭐요? -진짜. 주, 죽일 수도 있는 겁니까? 사 번 대신 여자가 대답한다. 아저씨. 울먹이는 목소리다. 아저씨.
-정말 돌멩이 때문에 죽을 거 같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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