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의 언어로 벼랑 끝에서 벼랑으로 훌쩍
리듬과 선율 속에 녹아들면 무한감동 밀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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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치는 기형도. 사진 출처 http://www.youtube.com/watch?v=RmZHMgG4Y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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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시에는 수많은 식물들의 비유법이 꽃피어 있습니다.
“아주 추운 밤이면 나는 이불 속에서 해바라기 씨앗처럼 동그랗게 잠을 잤다.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소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가계(家系)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저 동지(冬至)의 불빛 불빛 불빛.” (‘위험한 가계(家系) 1969’ 중에서)
위의 시에서처럼 ‘추운 삶’ 속에서 희망처럼 따뜻한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 그 씨앗으로 은유된 기형도 시인의 꿈들은 그의 글들 곳곳에서 반짝반짝 반딧불이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죠.
다른 훌륭한 시인들의 시에서처럼 기형도 시인의 시에서도, 비유법은 언어로 쓰였으되 언어의 다리가 끊어진 길 저 건너편의 형언할 수 없는 인식과 감정 상태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듯 합니다. 그의 시들을 읽다보면 어떨 때는 마치 막다른 벼랑 앞에서 용수철처럼 훌쩍 튀어올라 언어 저편의 세상으로 착지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더군요.
애끓는 짝사랑으로 밤새워 쓴 연애편지에 스스로도 감동 받았는데, 아침에 일어나 우체통에 부치기 전 다시 한번 읽었다가, 그 유치함에 너무 놀라 편지를 북북 찢어버렸던..., 그러다 문득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눈물 뚝뚝 흘리던 그 때처럼 말이죠.
기형도 시인의 비유를 보면서 문득문득 불교 인식논리학의 하나인 ‘인명론(因明論’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위한 인명론의 체계인 삼지작법(三支作法)에서의 삼지(三支)는 종, 인, 유(宗, 因, 喩)를 말하는데, 여기서 유(喩)와 시의 수사법인 비유(比喩)에서의 유(喩)는 ‘깨달음’이라는 뜻을 가진 같은 한자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나면 연기가 난다 (1단)
앞 산에 연기가 난다 (2단)
그러므로 앞 산에는 불이 났다 (3단)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비롯된 서양의 삼단논법이 위와같이 논리적 연결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반면,
앞 산에 불이났다 (宗)
연기가 나니까 (因)
아궁이에 불을 때면 연기가 나듯이 (喩)
동양 불교의 삼지작법에서는 위에서처럼 논리적 연결에 더해 비유까지 깨달음의 한 방법으로 사용하는 데요. 여기서 시(詩)라는 한자 자체가 사(寺)+언(言)이 결합된 말, 즉 시가 절의 언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기형도 시의 비유와 불교 인명론이 비슷한 느낌으로 가슴속에 성큼 다가옵니다.
기형도처럼 시인이기도 했던 만해 한용운 스님은 ‘님의 침묵’을 비롯한 많은 훌륭한 시들은 물론 불교개혁 이론서인 ‘조선불교유신론’을 쓰기도 했는 데요.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을 지으며 불교계 대표로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수많은 강연을 하는 등 논리적 달변을 가능하게 한 배경에는 만해의 숱한 ‘인명론’ 탐독이 있었던 것이죠.
일간지 기자로서 논리적인 기사 쓰기와 시 쓰기를 병행했던 기형도 시인의 필력 또한 인명론과 결코 무관치 않은 시의 비유가 가진 힘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불교 인식논리학인 인명론을 더 살펴보면, 삼지작법은 종, 인, 유와 더불어 현량(現量)과 비량(比量)을 통해 깨달음을 가능하게 합니다. 종은 증명되어지는 것이고, 인은 종을 성취시키는 이유이며, 유는 종을 증명하기 위하여 도와주는 비유인데요. 비량은 인과 유의 두 가지를 비교하여 종을 알게하는 추리를 말하고, 현량은 직관을 의미합니다.
불교의 현자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언어로 쓰여진 논리와 인식의 한계를 넘은, 사유뿐만이 아닌 실체로서의 깨달음을 추구하게 됩니다. 언어로는 결코 다할 수 없는 절대적 사랑을 얘기하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도 물론 마찬가지이구요.
그런 깨달음들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전혀 동떨어진 것이리란 법은 없습니다. 좋은 시 속에서, 그 시 속의 논리적이고 초논리적인 아름다운 비유 속에서, 그러한 시의 비유가 심장을 뛰게 하는 리듬과 가슴을 울리는 선율에 녹아 흐르는 음악 속에서, 우리는 비록 짧은 순간이더라도 도저히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느끼고 깨달으며 너나 없이 깊은 감동 속으로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때론 슬프게, 때론 아이러니칼하게, 때론 아름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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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 ‘빈집’ 백창우 작곡 백창우 노래. http://www.youtube.com/watch?v=ggoHBxj4L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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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 ‘빈집’ 민찬홍 작곡, 소프라노 김은주 노래. http://www.youtube.com/watch?v=1kfJg-G9p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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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기형도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 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 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銃身)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김형찬기자 chan@hani.co.kr
▶김형찬의 앱으로 여는 음악세상 http://plug.hani.co.kr/appsong/1935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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