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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01 18:40 수정 : 2006.06.02 16:43

허우하이 호수가에 있는 콩이지 주점. 허우하이는 베이하이(北海)와 중국 수뇌부가 살고 있는 중난하이(中南海) 뒤쪽에 있는 호수를 가리킨다.

‘샤오쯔하는’(돈 쓰며 즐기는) 이들이 찾는 허우하이
뜻밖에도 루쉰의 단편소설 ‘쿵이지’를 만났네
모순 가득한 그의 무거운 행보 떠올라
‘샤오쯔’처럼 가볍게 소흥주 한잔 걸칠 수 없었네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③

베이징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꼭 들러보고 싶던 곳이 있었다. 바로 허우하이(後海)라는 곳이다. 이른바 샤오쯔(小資)에 속하는 젊은이들이 즐겨 찾기 때문에 근자에 새롭게 부상한 곳이다. 샤오쯔란 원래 문자 그대로 소부르조아의 준말이지만 의미가 점차 변해서 요즘은 일정한 학력과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생활의 ‘격조’를 추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로 젊은이들을 지칭할 때 쓴다. 동시에 그들이 추구하는 생활방식이나 정취를 지칭하기도 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심지어 동사로도 쓰이기도 한다. 가령 샤오쯔하자!(小資一下)라고 하면 돈 좀 쓰면서 즐기자! 라는 정도의 뜻이다. 짧은 일정에 이곳저곳 다니느라 바빴기 때문에 종로에서 볼 일 마치고 잠시 인사동의 찻집을 들러보는 심정으로 허우하이를 찾았다. 그래 나도 잠시 샤오쯔 좀 하자!

생활 격조 찾는 젊은이 ‘샤오쯔’

허우하이는 베이하이(北海)와 중국 수뇌부가 살고 있는 중난하이(中南海) 뒤쪽에 있는 호수라는 말이다. 스차하이(什刹海)라고도 하는데 다시 치엔하이(前海), 허우하이, 시하이(西海)로 나뉜다. 전체적으로 베이하이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34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상당히 커다란 호수다. 해질 무렵에 찾았는데 정말 운치가 있었다. 강추! 가서 보니 예전에 한번 와 봤던 곳이었다. 이 일대는 고궁의 뒤쪽이어서 과거엔 사실 웬만한 권력을 갖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쑨원의 부인 쏭칭링(宋慶齡), 유명한 역사학자 꿔모러(郭沫若)의 옛 집, 전형적인 쓰허위엔(四合院)으로 유명한 꽁왕푸(恭王府) 등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번에 가서 보니 예전에 없던 술집이나 카페들이 ‘샤오쯔하게’ 호수 주변으로 꽉 들어차 있었는데 가끔 외국 관광객을 태우고 후퉁 투어를 하는 자전거 인력거가 10여대 씩 줄지어 호수 주변을 도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나도 아무 카페에나 들어가 맥주 한 잔 하면서 천천히 저 멀리 호수 너머 시산(西山)에 지는 석양을 바라볼까 하다가 그냥 걷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손님이 많지 않아 혼자 들어가기가 좀 멋쩍은데다가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호숫가를 걷다 보니 한 모퉁이에서 서민들이 한적하게 산책을 하거나 체조를 하고 있었고 또 낚시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건 예전에 봤던 광경인데 여전히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게 바로 소박한 서민의 기운이 넘쳐나는 베이징의 정취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걷는데 콩이지(孔乙己) 주점이라는 간판이 눈에 확 들어왔다. 콩이지를 여기서 만나다니…. 콩이지는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루쉰의 단편소설의 제목이자 그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 아닌가. 아주 짧은 작품이어서 단숨에 읽을 수 있지만 읽고 난 뒤의 쓸쓸한 여운은 아주 오래 동안 가시지 않는 그런 작품이다. 두루마기를 입고 와서도 돈이 없어 안채에 들어가 앉아서 술을 천천히 마시지 못하고 술청에 서서 마시곤 했던 몰락한 지식인 콩이지. 그는 정말 죽었을까. 그러나 아무도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이 없었던 콩이지. 루쉰은 자신이 쓴 단편소설 중에서 어느 작품을 가장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콩이지>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주점의 주인은 그런 콩이지가 못내 불쌍했던 것일까. 아예 그의 이름을 딴 술집이 만든 이유는 혹 <콩이지> 보고 돈 걱정 말고 술 마시라는 뜻은 아닐까. 나중에 확인한 일이지만 이 주점의 주인은 루쉰과 동향인 베이징 대학의 중문과 출신이라고 하니 정말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베이징대 비정규직 사서 ‘마오’

치엔하이와 허우하이 중간에 위치한 인팅챠오(銀錠橋)에서 바라본 석양. 예전에 왕들은 이곳으로 산책을 나와 시산에 지는 석양을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베이징 10경 중의 하나다.
하여간 <콩이지>는 나로 하여금 루쉰, 그리고 다시금 마오를 올리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루쉰이 1918년 겨울에 쓴 것인데, 마오는 마침 그해 8월 후난성에서 처음으로 베이징에 올라와 스승 양창지(楊昌濟)의 소개로 11월부터 베이징대학 도서관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주된 업무는 15종의 중국과 외국 신문을 관리하고, 신문을 열람하기 위해 온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비정규직’ 일이었는데 월급은 8인위안(은원)이었다. 전문적인 연구에 따르면 당시의 1인위안은 요즘의 50위안(1995년 기준), 즉 15㎏의 쌀을 살 수 있는 돈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8인위안은 요새 돈으로 400위안, 대략 120㎏의 쌀을 살 수 있는 돈이다. 한편 당시 문과대 학장이었던 천두슈(陳獨秀)는 300인위안(요즘의 1만5000위안), 도서관 관장이었던 리다자오(李大釗)는 120인위안을 받았고, 얼마 뒤 겸임강사로 부임했던 루쉰은 교육부 관리이기도 했으므로 300인위안 이상이었다고 한다. 이 엄청난 월급의 양극화! 마오는 4개월 만에 그만 두었고, 루쉰은 1920년부터 베이징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므로 대학의 교정에서 두 사람은 같이 만날 수는 없었지만 루쉰이 이 작품을 쓸 당시 마오도 베이징의 회색빛 하늘 아래에 같이 있었던 것이다. 마오가 만약 베이징대학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다면 중국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현대중국의 가장 중요한 두 거인 마오와 루쉰은 평생 만난 적은 없지만 당시 마오는 그의 동생인 저우쭈어런(周作人)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1920년 4월의 일인데 사실 5ㆍ4운동 당시에 저우쭈어런이 루쉰보다 유명했다. 또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저우쭈어런은 중국 신촌(新村)운동의 최초의 주창자였고 마오는 이 운동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신촌운동은 요즘 중국에서는 추진되고 있는 사회주의 신농촌 건설 운동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운동이다.

위엔스카이의 얼굴이 새겨진 1914년 당시의 은(인)화 1원. 그러니까 마오는 이걸 8개 받았다는 얘기다.
이처럼 마오는 루쉰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일생을 통해 두 번 ‘만났다.’ 첫 번째는 대략 1934년 전후였는데 1931년 “매우 엄중하고도 일관된 우경 기회주의”라는 이유로 당의 수뇌부에서 배제당한 뒤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고독 속에서 루쉰을 ‘만났다.’ 한번은 펑쉬에펑(馮雪峰)이 마오의 시를 가져다가 상하이에 있는 루쉰에게 보여준 일이 있었다. 당시 펑쉬에펑은 상하이와 루이진을 오가며 중공(중국공산당)의 연락책 노릇을 하고 있었다. 루쉰은 이 시를 보고 산적 두목(山大王)의 시 같다고 평했는데 펑이 마오에게 다시 이런 평가를 전하자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마오는 정말로 얼마 있다가 준의회의(1935)를 통해 중공의 ‘산적 두목’이 되었다. 마오는 루쉰이 서거한 다음 해에 루쉰을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중국에서 루쉰의 가치는 내가 보기에 중국의 최고 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봉건사회의 성인이고 루쉰은 현대중국의 성인이다.”

문혁때 루쉰만 자유롭게 읽혀

일찍이 루쉰은 ‘현대중국의 공자’라는 글에서 “공자는 중국에서 권력자들에 의해서 떠받들어졌고 그 권력자나 권력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성인이었지 일반 민중과는 매우 인연이 먼 존재였다”고 비판한 적이 있는데 그런 그가 마오로부터 이런 ‘공자’라는 평가를 받은 것은 매우 역설적이었다. 성인 콤플렉스를 가졌던 마오의 속마음이 루쉰에 대한 평가 속에 드러난 것은 아니었을까.

두 번째의 ‘만남’은 문혁 전후라고 할 수 있다. 1961년 전후에 마오는 대약진운동의 실패, 소련 기술자의 철수, 당내의 비판 등 내우외환에 직면해 있었다. 사면초가 속에서 다시 루쉰을 ‘만난다.’ 그는 당시 중국을 방문한 일본인들에게 “광대한 천지와 연결된 호탕한 마음속 심사, 소리 없는 가운데 요란한 천둥소리 들리네(心事浩茫連廣宇 于無聲處聽驚雷)”라는 루쉰의 시로 이런 자신의 마음속 심사를 드러내었다. 얼마 뒤 마오는 문혁이라는 ‘천둥소리’로 중국을 뒤흔들었다. 그렇지만 루쉰은 문혁의 와중에서 왜곡된다. “루쉰은 위대한 문학자일 뿐만이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이며 위대한 혁명가다”라고 널리 선전되었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의 책은 문혁기간에 마오의 어록 외에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던 유일한 책이었다.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그러나 그런 만큼 풍부하고 모순으로 가득찬 루쉰의 사상이 지나치게 단순하게 신성화되고 권력화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코 명랑하지 않은 루쉰의 글은 “아주 오래되었으면서도 방대한 중국의 문화가 근대적 전환기에 펼쳤던 무거운 행보를 침울하게 펼쳐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중요하고, 또 언제 읽어도 신선하다. 이는 아마도 그가 결코 선구자가 아니라 역사적 중간물임을 철저하게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다만 길에는 하나의 종점이 있고, 그것이 무덤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다. 이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이어서 누가 가르쳐줄 필요도 없다. 문제는 거기까지 가는 길이다.”

루쉰에 중독되었기 때문일까. 샤오쯔들처럼 가볍게 콩이지 술집에 들어가 회향콩 안주에 소흥주 한 잔 마시지 못하고 지나쳤지만 후회는 없었다. 석양에 물든 호숫가가 너무 아름다웠으므로….


바로잡습니다 지난번 2회째 글 가운데 ‘로스 테릴이 마오를 호랑이 기운(호기)와 원숭이의 기질(원기)를 동시에 지닌 복잡한 인물로 그렸다’는 부분이 나오는데, 원숭이 기질 뒤의 괄호속 한자는 원숭이 후자를 쓴 ‘후기’가 돼야 맞습니다. 편집과정의 실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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