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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2.21 18:55 수정 : 2007.03.02 16:59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올해 아시안게임은 온통 ‘중국 천하’였다. ‘천하’라고? 2002년에 나온 장이머우 감독의 <영웅>은 천하를 흉중에 품은 진시황도, 그를 죽일 수 있었으나 천하의 평화를 위해 죽이지 못하고 자신이 죽음을 택하는 무명(리롄제 분)도 모두 영웅으로 그린다. 지난 세기 민족국가 건설에 급급해 천하관념을 꺼렸던 중국이 개혁 개방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이제 다시금 천하를 사고하고 있다. 사진은 <영웅>의 무명이 칼을 뽑아 든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천하는 서양으로 넘어가고 중국은 ‘국’을 세우기에 바빴다
급부상하는 요즘 다시금 천하 관념 조명
미국이 민심을 못얻으니 중국이?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17)

이번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은 온통 ‘중국 천하’였다고 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단단히 준비했던 모양이다. 나는 중국 천하라는 말을 보면서 이상하게 형용 모순을 느꼈다. 그래 천하라는 말을 듣는 순간 무슨 생각이 나느냐고 주위 분에게 물어봤다. 진용의 무협지가 생각난다고 한다. 무림천하. 내가 던지고자 한 질문은 그게 아닌데…. 천하하면 중국이 먼저 떠오르는지 세계가 먼저 떠오르는지를 묻고 싶었던 것이다. 아다시피 중국은 일찍부터 자신들이 지리적으로 천하의 중심에 있을 뿐만이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다고 자부하여 왔다. 나라 이름도 가운데 있는 나라라는 뜻에서 중국이다. 그러니까 천하라는 말은 중국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천하라는 말은, 말 그대로 하늘 아래라는 뜻이니 다른 말로 하면 세계라는 의미이다. 누구든 다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니 자신을 지칭할 때 쓸 수도 있는 말이다. 우리도 천하통일이니 천하장사니 여인천하니 하면서 이 말을 현재 사용하고 있다. 천하장사라고 하면 당연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힘이 세다든지 씨름을 제일 잘한다든지 하는 의미지만 한국장사라고 하는 것보다 천하장사라는 말이 익숙하다. 사정은 일본의 경우도 비슷할 것이다. 다만 특이한 것은 에도시대에 쇼군을 대담하게 천하(덴카사마)라고 했다는 점이다.

각설하고 천하는 이념적으로는 세계 규모의 넓이를 갖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중국을 가리키는데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19세기 말 서양의 충격을 받아 중국이 하나의 국으로 전락하면서 천하는 중국이 아니라 세계(서양의 천하)로 변해버렸다. 따라서 천하와 중국은 분리되기에 이르렀던 것이 저간의 사정이었다. 따지고 보면 중국 천하라는 말에는 이미 중국은 천하가 아닌 현실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천하하면 무협지가 먼저 떠오르기에 이른 것은 아닐까.

‘와호장룡’은 강호, ‘영웅’은 천하

돌이켜보면 중국철학을 공부하면서 정말 천하라는 말과 많이도 마주쳤다. 확인해보니 <논어>에서만 22번이나 나온다. “군자는 천하의 일에 대해서 꼭 그래야 한다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없다. 다만 의를 좇을 뿐이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가고 도가 없으며 숨는다.” 등등. 하지만 그것은 고전 속에서 늘상 등장하는 개념이었을 뿐 현실감은 그다지 없었다. 우리의 중국철학엔 중국이 없기 때문에 특히 그러했다. 그러다가 우연한 일이 계기에 되어 천하 혹은 천하관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 즈음 장이머우 감독의 <영웅>(2002)이라는 ‘무협’영화를 보았다. 영웅의 주제도 마침 남녀 간의 애정도 강호의 은원관계도 아닌 천하였다.

이 영화는 바로 직전에 대성공을 거둔 중국계 미국인 감독 리안의 <와호장룡>(臥虎藏龍, 2000)과 여러 모로 비교가 된다. 와호장룡은 원작이 유명한 무협소설이거니와 등장인물들이 노니는 세계는 현실세계가 아니라 환상적인 이른바 ‘강호의 세계’였다. 그러나 그리고 있는 것은 매우 현실적이고 생생한 인간의 애정 문제였다. 듣자하니 리안은 이 영화을 통해 자신의 중년의 위기를 그렸다고 한다. 장쯔이처럼 아름답고 거침없는 젊은 여성이 ‘칼’처럼 덤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담백한 것을 사모한다는 뜻의 리무바이(저우룬파 분)는 칼처럼 날카롭고 위험한 애정을 책임감 있고 아름답게 승화해야 한다고 말하는 리안이다.


이에 반해 영웅에서는 역사적 인물이 등장하는 ‘천하의 세계’가 그 배경이다. 그것은 진시황과 그를 죽이려는 자객들의 이야기니까 형가의 낭만적인 행동(<사기> 형가열전)을 연상시킨다. 예전에 한문을 배우면서 무협소설보다 박진감 넘치는 ‘형가열전’을 읽다가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 한 토막. 강감찬 장군이 형가열전을 읽다가 형가가 진시황을 결국 죽이지 못하자 책을 덮고 탄식하면서 왈 “바보!”라고 했었는데 우연히 형가의 영정을 모신 사당에 들렀다가 형가의 눈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무릅을 꿇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근거가 있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일개 자객이 천하의 중심 진시황을 암살하고자 한 이야기는 영화적 상상을 자극하기 충분하기에 다양한 버전으로 번안되어 왔다.

저우샤오원(周曉文)의 <진송>(秦訟,1996)에서는 형가보다는 그의 친구 고점리(高漸離)와 진시황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고, 천카이거(陳凱歌)의 <형가 진왕을 찌르다>(荊軻刺秦王, 1998)에서는 아버지 콤플렉스를 가진 섬약한 진시황이 어떻게 폭군으로 변하게 되었으며, 직업 살인청부업자에 불과했던 형가가 어떻게 영웅이 되어 갔는가의 과정으로 그리기도 했다. 이에 반해 장이머우는 무명(리롄제 분)이 진시황을 죽일 수 있었는데 죽이지 않은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진시황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했던 파검(양조위 분)에게 무명이 설복 당했는데 이유는 천하라는 두 글자. 천하의 평화라는 대의를 위해 사소한 은원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진시황은 이전까지 하나의 이념으로 존재했던 천하를 현실화시킨 첫 황제였다.

죽은 인물이나 역사적 사실을 통해 살아 있는 인물이나 현재의 사건을 암시하는 영사(影射)의 전통이 강한 중국에서 성장한 장이머우는 진시황과 자객의 이야기를 통해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가 말하는 천하는 중국일까 세계일까. <영웅>이란 영화가 막대한 중국자본을 동원해 세계시장에 야심차게 내놓은 블록버스터라는 점을 생각할 때 천하는 이미 중국이 아니라 세계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 영화가 개봉되기 1년 전에 9.11 사건이 있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비행기를 칼로 삼아 미국(세계)의 심장을 찌르려고 했던 사건이었다. 그러니 ‘형가’가 9.11 이후에 진시황을 찌르지 않았다. 아니 찌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찌르지 않은 행동이 영웅적이라고 장이머우는 말한다. 그렇다면 진시황은 졸장부인가. 아니다. 그도 영웅이라는 것이다.

천하 현실화한 첫 황제 진시황

장이머우에 해석에 따르면 영웅이란 천하를 흉중에 품은 자인데 진시황은 천하를 흉중에 품었을 뿐만이 아니라 실지로 천하를 통일한 사람이니 영웅이 아닐 수 없었다. 혹시 빈 라덴도 부시도 모두 영웅이라는 말씀!? 아무튼 중국과 미국을 모두 고려한 장이머우의 고도의 상업적 전략은 결국 중국과 미국에서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적중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천하와 평화는 누구의 천하이고 누구를 위한 평화일까. 그가 말하는 천하는 영화 속 진시황의 궁전처럼 어둡고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닐까.

사실 내가 이렇게 천하라는 말에 민감해진 것은 근자에 들어 중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자오팅양과 같은 지식인들이 전통적인 천하관념을 새롭게 조명한 저작들을 발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19세기 중엽 이후 서양의 문화적 군사적 침략에 직면해 중국은 천하를 운위하기는커녕 하루빨리 국을 건설해야 했었다. 천하관념은 근대적 민족국가를 건립하는데 커다란 장애물로 받아들여졌다. 전통적 천하관념의 영향을 받아 이념적으로는 국가가 사라진 대동의 세계를 주창했던 캉유웨이(1858-1927)였지만 실제로는 입헌군주제의 민족국가를 세우고자 분투했었다. 크게 보면 지난 세기 중국의 역사는 천하가 아니라 국가를 통해 구망(救亡)의 동력을 얻고자 한 역사였다. 지난 세기말 시작한 개혁 개방을 통해 급속한 경제적 성장을 이루면서 새로운 면모로 세계에 등장하고 있는 중국은 이제 다시금 천하를 사고하고 있는 것이다.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자오팅양은 난세의 근원이 국가 단위로 세계를 사고한 데에 있으니 천하로써 세계를 사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심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천하관념의 핵심은 민심에 있는데 지금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은 세계의 민심을 얻고 있지 못하니 중국이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북핵문제만 하더라도 이제까지 중국은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에 맞서 균형자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천하관념에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천하관념은 지리중심적이고 문화중심주의적인 사고체계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고 또 역사적으로도 그러했다. 또한 천하관념엔 “바깥‘이 없는데 이것이 장점이 아니라 단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바깥‘(타자)을 발견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중심적 사고는 이게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사정은 어떠한가. 천하는 커녕 “동지 섣달 기나긴 밤의 한 허리”가 아니라 멀쩡한 한반도의 “한 허리”를 버혀내고 무려 50여년을 ‘섬’처럼 살아오지 않았던가. 오호 통재라!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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