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0.18 12:06
수정 : 2013.10.18 15:13
젊은 여자 당신, 집-직장-동네에서 ‘유령’에 시달리면
싸우고 부딪치고 깨진 ‘앞선 삶’이 토닥토닥 찾아온다
그것은 유령임에 틀림없다. 곁에 있으면서도 눈치채지 못하고, 따로 있어도 같이 있는 존재다. 그는 아버지, 어머니, 남편, 남자친구, 여자친구, 동기, 직장 상사, 후배가 될 수도 있다. 눈에 보이는 유령이라고? 아니, 세상에 없더라도 내 삶에 영향을 미칠 수만 있다면 틀림없는 유령이다. 게다가 그것은 삽시간에 들이닥친다. 길을 걷다가, 화장실에서, 꿈에도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축복은 먼 옛날의 추억, 멘붕의 혼돈이 곳곳에 지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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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느 드 보부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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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아직은 젊다고 하는 여자, 당신은 앞으로 축복의 나날만을 맞이하지는 않을 것이며 비루한 일을 자주 겪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당신이 어린 시절처럼 남을 노골적으로 비난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오지 않을 것이지만, 반대로, 당신을 비정상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리거나 낙인 찍는 행위를 누구든, 언제 어디서든 할 것이다. 지금까지 당신의 빛나던 개성은 앞으로 상당한 기간 동안 단점으로 전락해 손가락질 당할 운명에 처했다. 혼돈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집에서 직장에서 동네에서 당신은 때론 약자가 될 것이며, 그래서 자주 우울감에 젖을지도 모른다. 시시때때로 당신을 도구처럼 쓰면서 필요할 때만 친절하게 접근하고 평소에는 먼지나 물건 취급하는 그 사람들에게 화를 낼 수 없다. 언젠가는 뒤집겠다며 속끓이며 반격을 노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기회는 자주 오지 않거나 아주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불교적 명상법에서는 ‘지금 여기’를 중요하게 여긴다. 고요와 평화를 찾는 방법인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내면의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릇을 씻을 땐 설겆이에만, 길을 걸을 때는 발과 신체의 움직임에만 집중하며 살아가는 방법밖에 도리가 없지 않은가. 티베트에서도 ‘해결 될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해결 안 될 문제라면 걱정해도 소용 없다’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가능하다면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좋다.
‘또 다른 나’에게 들려줄 약간의 실패담은 누구나 다 얼마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생겼을 때 ‘내’가 아닌 ‘남’ 탓을 해도 괜찮다. 그리고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당장 지금 여기의 내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나만의 문제인가? 전략상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구한테 이 문제를 상의해야 하는가?
때론 다른 사람들의 모자란 경험들을 들어보고 싶을 수도 있겠다. 그들은 ‘또 다른 나’에게 들려줄 약간의 실패담을 얼마쯤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첫사랑에 실패하여 울부짖는 당신, 처음 들어간 회사에 적응하기 힘들어 점심시간이면 홀로 숨어 담뱃불을 붙이는 당신, 밤이면 동굴같은 술집에 숨어들어가 작은 노트에 깨알같은 글씨로 뭔가를 쓰는 당신, 타인의 공감 없이 우주에 혼자 떨어져 있는 것처럼 고독한 당신, 이 세계와 단절을 꿈꾸는 당신에게 바보같은 언니들이 나타나 어깨를 두드리게 되는 것이다. 싸우고 부딪치고 깨지며 화내고 살아온 동료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찾아온다. 토닥토닥.
※ 추천 책; <제2의 성>(시몬느 드 보부아르, 강명희 옮김, 하서)
※ 추천 이유
보부아르는 여성의 타자화, 객체화에 대한 이론적인 실마리를 제공했다. 유명하지만 읽기 겁날 만큼 두꺼운 고전이지만 후련한 감을 느낄 수 있다. 철학적인 개념을 따라가야 해 복잡하기도 하지만 꼼꼼히 읽어보면 행간에서 작가의 분노를 즐겁게 만날 수 있다. 특히 잘 알려지지 않은 기혼부인, 어머니, 사교생활, 연애하는 여자 등 구체적이고 신랄한 이야기가 들어있어 두껍지만 뜻밖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부분도 많다.
※ 밑줄 긋기
“어째서 남녀 사이에는 이와같은 상호성이 인정되지 않고, 한쪽만 유일한 본질적인 존재가 되고, 상대방에게는 일체의 상대성을 부정하고 순전히 타성으로 규정하게 되었는가? (중략) 그런데 타자의 신분에서 주체로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은, 그 타자는 그와 같은 상대의 관점에 순순히 복종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여자의 이와 같은 복종은 대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서론 가운데)
“‘남자들은 숨을 쉬는 한 언제나 독립적인 주체로 남아있으며, 사랑하는 여성은 많은 가치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런 여성을 자기들의 실존에 일체화시키려고 하며, 결코 그녀 속에 자기의 실존을 몰입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여성의 경우 연애는 애인을 위한 완전한 자기포기이다.”(제3편 정당화, 제2장 연애하는 여자)
이유진 <한겨레> 기자 frog@hani.co.kr
▶여성생존백서 http://plug.hani.co.kr/todactod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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