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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0.17 16:27 수정 : 2013.10.17 16:29

중동대전(4)
소 이슬람세력 직시하며 아프간 지도부 압박
미 개입 꼬리 감추려 중개인 통해 반군 지원

소련의 아프간 침공 당시 소련 지도부. 왼쪽에 앉아있는 최고 지도자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의 옆에 유리 안드로포프 KGB 의장이 서있다. 아프간 사태를 지휘한 안드로포프는 브레즈네프에 이어 최고 지도자에 오르나, 곧 사망한다. 오른쪽에 얼굴을 보이며 서있는 이가 안드로포프를 승계하는 콘스탄틴 체르넨코 정치국원이다. 당시 소련 지도부는 아프간 침공에 반대했음에도 수렁에 빠지게 된다. 1981년 즈음에 점심을 겸해 가진 소련 지도부 회동이다.

아프간의 헤라트에서 봉기가 들불처럼 번지던 1979년 3월17일.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비밀 비상 회동을 했다. 이날 회동에서 유리 안드로포프 당시 국가안보위원회(KGB) 의장은 아프간 사태를 보고했다. 회동은 다음날 있을 정치국 정례회의에 앞서, 심각해지는 아프간 문제에 대한 정치국원들의 입장을 조율하기 위한 것이었다.

3년 뒤 소련의 최고 지도자로 등극하는 안드로포프는 소련 지도부 내에서 비중이 커지는 자신의 입지에다가 소련의 정보기관장으로서 이 회의를 주도했다. 안드로포프의 설명이 아니어도,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들은 아프간 정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심각한 문제 투성이임을 직감하게 됐다. 그들이 모스크바가 제공한 혁명 교과서들을 문자 그대로 추종하고, 너무 빨리 나아가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그들은 고질적인 파벌투쟁으로 나뉘어서, 경색된 이데올로기와 자잘한 특권들을 놓고 아귀다툼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새로운 세력의 중대한 위협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아프간, 우즈벡 타지크 등 출신 병사 민간인 위장 파병 애걸

다음날 정치국 정례회의에서 소련 지도부 내의 보수파인 디미트리 우스티노프 국방장관도 이를 인정했다. “문제는 아프간 지도부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역할을 충분히 평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이 현 시점에서 자신들이 직면하는 모든 문제들을 사회주의를 통해서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명확하다.”

아프간 문제의 책임자격인 안드로포프는 1956년 소련의 지배에 맞서 일어난 헝가리 봉기 때 헝가리 대사를 지내며 이를 무력진압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또 그는 1967년 이후 KGB 의장으로 재직하면서 프라하의 봄이라는 체코슬라바키아 반소민주화운동도 진압하는 등 등 소련권의 반체제 운동 대처를 주도해왔다. 프라하의 봄 등을 강경 진압했다고 해서, 그가 소련 위성국 내의 반체제 운동에 대한 강경파는 아니다. 단지 그는 당시 상황에서 소련의 이익을 지키려는 현실파였고, 오히려 크렘린 내에서는 이데올로기 차원에서는 개혁파였다. 안드로포프도 지적했다. “경제는 후진적이고, 이슬람 종교가 지배적인데다, 농촌의 거의 모든 인구는 문맹이다. 우리는 혁명적 상황에 대한 레닌의 가르침을 알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이 어떤 것이라 해도, 그건 그런 혁명적 상황이 아니다.”

정치국은 알렉세이 코시긴 전 총리를 내세워 아프간 지도부와 협의하게 했다. 코시긴은 혁명위원회 의장인 아프간인민민주당 당수 타라키와 통화했다.

타라키 : “상황이 안좋고, 악화되고 있다. 헤라트가 시아파 구호들로 거의 장악됐다.

코시긴 : “그들을 진압할 수는 있는가?”

타라키 : “그러길 바란다.”

코시긴은 격앙됐다.

코시긴 : “수백명의 아프간 장교들이 소련에서 훈련받았다. 그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는가?”

타라키 : “그들 모두는 무슬림 반동분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은 무슬림형제단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들에게 의존할 수 없다. 그들을 신뢰할 수 없다.”

타라키는 자신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타라키 : “왜 소련이 우즈벡, 타지크, 투르크멘 출신 병사들에게 민간인으로 위장해 파병할 수 없는가?”

아프간과 접경하는 소련 내 중앙아시아 자치공화국 출신 소련군 병사들을 위장해서 파병해달라는 애걸이었다. 그들이 아프간 사람들과 인종적으로 비슷하고, 같은 무슬림 문화를 공유하고 있어서, 위장이 쉽다는 점에 착안했다. “아무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우리 아프간에도 그 민족들이 살고 있다. 그들이 아프간 복장을 하고 아프간 정부군 복장을 하면 아무도 알아볼 수 없다.” 타라키는 현재 이란과 파키스탄이 그런 식으로 자국인들을 아프간에 파병하고 있다고도 주장했다.

코시긴은 기가 막혔다. 그는 타라키의 제안을 일축했다. “당신은 지금 문제를 너무 단순화하고 있다. 아프간의 점증하는 이슬람 봉기는 복잡한 정치적, 국제적 문제이다”고 경고했다.

코시긴 등 소련 지도부의 인식은 정확했다. 아프간 문제의 심각성이 이슬람주의 세력이라는 전혀 새로운 세력의 출현에 있다는 것을 아마 최초로 간파한 지도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소련은 대책이 없었다. 이미 행해지는 수많은 원조와 고문단 파견을 넘는 선택이란, 타라키가 요구하는대로 파병 등 직접적 군사개입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직접적 군사개입은 소련의 발등을 찍는 자해 행위임은 소련 지도부는 당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시간은 그대로 흘러갔다.

미 중앙정보국, ‘아프간 반공 봉기 은밀한 지원’ 기밀 보고서

소련 정치국이 아프간 문제로 비상 회의를 하던 3월 중순께 미국도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헤라트 봉기가 일어나자, 중앙정보국은 3월초 백악관에 아프간의 반공 봉기에 대한 은밀한 지원을 제안하는 첫 기밀 보고서를 올렸다.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의 백악관 특별조정위는 중앙정보국에게 비밀공작에 대한 보고를 다시 올리라고 지시했다.

중앙정보국의 소련 담당 수석분석관인 아놀드 회릭은 그 공작이 감당해야 할 위험성도 경고했다. 그는 아프간 공산정권의 와해는 소련의 개입을 부르고, 파키스탄, 이란, 그리고 중국까지 주변 국가들의 아프간 반군에 대한 지원을 촉박하게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파키스탄의 군사정부 지도자 무하마드 지아-울-하크 대통령은 소련 군사력의 파키스탄 영내 침입을 막아달라고 미국에 요청할 것이고, 이는 3차대전의 시나리오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취약한 카불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모스크바의 태도로 보아서, 소련은 적어도 그들을 위해 개입할 태세를 갖추게 될 것이라고 결론을 냈다. 그의 분석은 구체적인 각론에서는 결과적으로 틀렸으나, 미국이 결국 감당하기 힘든 결과를 떠안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는 옳았다.

내부에서의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중앙정보국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중앙정보국 본부 랭리에 있는 지도부부터 아프간을 담당하는 근동(近東)부의 현장 요원들까지, 이미 아프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파키스탄 정보부와 사우디아라비아 정보기관과 접촉하고 있었다. 중앙정보국에게 아프간 사태는 당시 위축됐던 자신들의 입지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시 미국은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하야를 부른 워터게이트 등으로 국가 권력의 남용에 대한 국민적 비난 여론이 비등했다. 중앙정보국도 60~70년대 중남미 등에서 쿠바 지도자 암살 시도 등 비도덕적 비밀공작이 드러나면서, 지탄의 대상이 됐다. 닉슨의 후임인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중앙정보국의 암살 공작을 금지하는 대통령령을 내렸다. 인권과 도덕을 표방한 지미 카터 민주당 대통령이 취임한 뒤에는 통제의 강도가 더욱 높아졌다.

카터는 스탠스필드 터너 해군 제독을 중앙정보국 국장으로 보낸 뒤 기구의 대대적 개편을 추진했다. 모든 비밀 공작에 대해 의회와 백악관의 통제를 받게 했고, 예산도 옥죄었다. 터너는 중앙정보국 사상 최초의 요원 구조조정을 단행해, 현장 요원들을 감축했다.

이런 상황에서 터진 아프간 사태는 중앙정보국에게 자신들의 필요성을 다시 각인시키고 입지를 회복할 순간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프간 사태는 중앙정보국에게 입지 회복뿐만 아니라 거대한 전쟁을 수행하는 전쟁기구로 탈바꿈시키게 될 줄을 아무도 그때는 예측 못했다. 중앙정보국의 아프간 개입은 중앙정보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공작이 되지만, 최대의 전략적 실패의 출발점이 될지는 아무도 예상못했다.

파키스탄, 안보 위기 우려해 이슬람 정체성 고수 집착

1979년 봄 중앙정보국이 아프간에 대한 개입 방안을 강구하자, 근동부의 현장 요원들은 파키스탄 옵션을 제안했다. 파키스탄의 무함마드 지아 울 하크 군사정권이 아프간 개입의 베이스캠프가 될 수 있다는 보고였다. 파키스탄은 이미 아프간에서의 봉기사태를 은밀히 지원하고 있는데, 이를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파키스탄에게 소련의 아프간 개입은 중대한 안보 위기였다. 파키스탄은 친소 국가인 인도와 남쪽에서 전쟁 상태의 대치를 하는 상황이었다. 북쪽의 아프간마저 친소국가로 넘어갈 경우, 양쪽에서 적대적인 세력에 둘러싸이는 안보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 직전 파키스탄에서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무함마드 지아 울 하크는 아프간 반군들을 적극 지원하면서 파키스탄의 이슬람화도 적극적으로 추진해, 이슬람주의 확산의 씨를 뿌린다.

또 아프간 사태는 파키스탄에게는 이슬람 국가로서의 정체성 위기를 다시 조성하고 있었다. 2차대전 이후 첫 이슬람권 분쟁은 사실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 과정에서 빚어졌다. 영국령 인도에서 소수였던 무슬림들은 다수인 힌두교도 주도의 인도 건국을 피해서 파키스탄을 분리독립했고, 이 과정에서 겪은 폭력사태는 파키스탄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심었다.

분리 독립 과정에서 무슬림들과 힌두교도들은 각자의 종교가 다수인 파키스탄과 인도로 몰려들면서 엄청난 희생이 발생했다. 약 125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는 가운데 최소 20만명에서 최대 100만명이 숨졌다. 1971년 파키스탄령이던 현재의 방글라데시인 동파키스탄이 독립하는 과정에서 인도는 방글라데시를 후원하고, 파키스탄과 전쟁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도 30만~300만명의 민간인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파키스탄의 대중과 건국 엘리트들에게 이런 트라우마는 파키스탄이라는 국가의 존립을 위한 이슬람 정체성 고수에 더욱 집착하게 했다.

파키스탄 분리 독립 당시 인도 영국군의 엘리트 장교였던 지아는 그 과정에서 빚어진 폭력사태를 지켜보면서 자신의 이슬람 정체성을 확보한 인물이다. 그는 역대 파키스탄 지도자 중 가장 이슬람주의에 경도됐다. 1978년 쿠데타로 집권 뒤 그는 줄피카르 부토 전임 총리의 세속적 사회주의 성향과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이 파키스탄의 일상적 삶의 질서를 혼란시켰다고 주장했다.

이란 대체하는 대소 전진기지로 파키스탄 가치 더욱 커져

이슬람 보수주의와 이슬람 국가는 지아 군사정부의 최고 정책이 됐다. 소련의 개입으로 인한 아프간에서의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에 대항하는 아프간의 무슬림 형제들의 투쟁은 파키스탄의 지아 정부와 이를 지지하는 이슬람 세력에게는 자신들의 이슬람 정체성을 시험하는 중대한 도전이었다. 이는 결국 파키스탄을 이슬람주의 무장투쟁의 배후지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현대 이슬람주의에서 파키스탄의 위치는 나중에 다시 상술한다.

당시 미국과 파키스탄의 공식적 관계는 거의 바닥 수준이었다. 지미 카터 당시 미국 행정부는 인권 및 도덕외교를 표방하고 있었다. 지아가 이끄는 파키스탄 군사정부의 쿠데타와 인권탄압 상황은 카터 행정부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하지만, 이란 혁명에 이어 아프간 사태는 미국에게 파키스탄의 전략적 가치를 더욱 고양시켰다. 이란 혁명으로 미국은 이란에 있던 감청시설 등 소련을 겨냥한 정보 및 군사 시설들을 상실해서, 그 대체지가 절실했다. 미국은 이미 1960년대부터 파키스탄의 페샤와르 공군기지에서 U-2 정찰기를 은밀히 발진시키는 등 파키스탄과의 군사협력을 진전시켜왔다. 파키스탄은 이란을 대체하는 미국의 대소 전진기지로서 가치가 더욱 증대됐다. 두 나라의 공식적 관계악화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보국은 파키스탄 채널을 강화했다.

지아는 파키스탄에 새로운 미국의 정보시설을 설치하자는 중앙정보국의 제안을 수락했다. 지아는 아프간 사태에 개입하는 비밀공작은 서남아에서 파키스탄의 영향력을 확장하고, 안보를 보장하는 가장 신중한 방안으로 생각했다. 8년 전 동파키스탄인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지원하는 인도와의 전쟁에 완패한 파키스탄은 아프간 위기를 자신들의 안보증진의 기회로 생각했다.

반군 지원 이득-소련 자극 위험 사이서 저울질

코시긴 소련 전 총리가 아프간 친소정부 수반 타라키와 통화한지 2주 뒤인 3월30일 카터 미국 대통령의 부안보보좌관 데이비드 아론은 아프간 반군에 대한 미국의 직접적인 비밀 지원을 위한 특별조정위 2차 회의를 주재했다. 국무부 쪽은 아프간에서 소련의 방향과 존재를 퇴각시키고, 소련 개입에 대한 미국의 이해와 우려를 파키스탄 쪽에 밝히는 한편 제3세계에서 소련의 영향력 확장을 저지하는 미국의 결의를 파키스탄뿐만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에게도 과시해야 하는 카터 행정부의 의향을 설명했다. 문제는 아프간 반군에게 무기와 병참을 공급할 경우, 소련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였다. 반군을 지원하는 이득보다도, 이것이 소련을 더 자극할 위험이 클 수 있었다. 결론을 못내고 방안을 더 강구하기로 했다.

헤라트에서 이스마일 칸이 주도하는 군사반란 며칠 뒤 잘라바드에서도 아프간 정부군의 탈주와 반란이 일어나는 등 반란을 확대됐다. 소련 고문단을 동반한 아프간 정부군은 청소년까지도 학살하는 잔인한 반란 진압으로 대응했고, 이런 소문은 정부군의 탈주와 지방에서의 봉기를 더욱 부채질했다. 봄이 지나면서 아프간 산악지대 눈이 녹듯이 아프간 정부군는 와해됐고, 산악지대는 ‘성스런 전사’인 무자헤딘들의 영토로 바뀌었다.

중앙정보국 등 미국 정보당국은 소련이 아프간에서의 반란을 진압하려고 침공 등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봤다.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도 5월24일 “예측 가능한 상황에서는 소련은 아마 반폭동 전투의 실질적인 부담을 짊어지려는 것을 피할 것이다”고 보고했다. 미국의 정보판단은 정확했다.

안드로포프 소련 KGB 의장은 그로미코 외무장관과 우스티노프 국방장관 등과 함께 아프간 위기에 대처하는 실무그룹을 구성했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6월28일 최고지도자인 소련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에게 최고기밀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는 아프간 혁명이 “경제적 후진성과 빈약한 노동계급”, 현지 공산당의 허약함뿐만 아니라 아프간 지도자들의 이기심 때문에 고전하고 있다고 결론냈다.

안드로포프 팀은 ‘위대한 스승’이라는 타라키에게 편지를 작성해, 경쟁자들과의 분규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혁명 지도부에 더 많은 동지들을 참가시키고, 이슬람에 대한 입장을 완화하라고 지시했다. 이슬람 율법학자들을 고용해 공산당의 급료를 받도록 하고, “광범위한 무슬림 대중들에게 사회경제적 개혁들이 무슬림들의 종교적 신념들에 영향을 주기 않을 것임을 납득”시키도록 했다. 하지만, 타라키는 총을 선호했고, 소련군이 반군들과 직접 대결해 주기를 원했다.

제3세계에서 소련 교란할 절호의 기회로

안드로포프가 타라키에게 편지를 보낸 그 주간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은 카터 대통령이 아프간 반군에 대한 ‘비치명적’인 비밀 지원을 승인하도록 건의했다. 아프간 반군들에게 지원을 하나, 무기 지원은 당분간 하지 않는다는 타협책이었다. 브레진스키는 제3세계에서 그동안 소련을 교란시킬 기회가 없었으나, 이제 아프간에서 그 기회가 왔다고 봤다. 직접적인 군사개입에 대한 소련의 소극적 자세로 보아서, 아프간 반군 지원이 초래할 위험성은 관리가능하다고 평가했다.

7월3일 카터 대통령은 드디어 중앙정보국의 아프간 반군에 대한 지원 공작을 승인했다. 선전 및 심리 공작과 아프간 반군에 무전기, 의료, 현금을 지원하도록 50만달러의 예산을 배정했다. 미국의 개입을 감추려고, 독일 등 다른 국가의 중개인을 통하도록 했다. 중앙정보국의 근동부 요원들은 그해 여름 의료 장비와 무전기 등을 파키스탄으로 선적했다. 이 장비들은 파키스탄의 정보부(ISI)에게 건네져, 파키스탄과 아프간의 접경 산악지대를 통해 아프간 반군 게릴라들에게 배분됐다. 시작은 작았다. 하지만, 이는 전후 현대사를 바꾸는 미국과 소련의 마지막 대결의 시작이었다.

이 대결은 카불 친소정부 내에서 다시 권력투쟁이 일어나, 지도부가 교체되면서 가속화된다. 새로 교체된 지도부에 대한 정보 공작과 그 결과로 생긴 역정보의 유입에 소련은 이성적 판단이 마비되며, 침공으로 치닫았기 때문이다.

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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