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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6.17 10:18 수정 : 2014.01.14 11:37

김유진 소설 <글렌> ⓒ전지은

김유진 소설 <1화>



그는 1982년 10월 15일 태어났다. 그해엔 기억할 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사건도, 재해도 없었다. 그가 다닌 유치원에선 매달 생일잔치를 했다. 10월생들은 차고 넘쳤다. 그는 십여 명에 이르는 10월생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다. 단상 끄트머리에 앉아 색종이로 고리를 이어 만든 목걸이를 두르고 자갈치를 집어 먹었다. 그는 미지근하게 자라났다. 발육이 남다르지도, 더디지도 않았다. 말썽을 일으킨 적도 없었지만, 교사들에게 명민한 인상을 남기지도 못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에 태어나 성정이 유순한 것이 장점이라고 했다. 내성적인 편이었으나 오래 보아 온 사람들과는 곧잘 농담을 나눴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는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캐나다인 피아니스트에 관한 전기였다. 책 말미에 이르자, 피아니스트는 지병으로 죽었노라 기록되어 있었다. 1982년 10월 4일의 일이다. 열흘 후, 음악회 형식을 띤 추도 예배가 진행되었다. 그는 교회 사진 하단에 작게 적힌 1982년 10월 15일이라는 날짜를 발견했다. 연필로 희미하게 밑줄을 그었다. 반가웠다. 그는 피아니스트의 이름을 기억해 두었지만, 음반을 들을 기회가 없었으므로, 오래지 않아 잊었다.

진은 거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오후 모임에 입을 옷을 고르느라 애를 먹었다. 진이 가진 간절기 정장은 세 벌이었다. 쓰리 버튼의 진한 감색 양복, 푸른빛이 감도는 비둘기색 투 버튼 양복, 회색 스트라이프 정장은 옷깃에 스티치 장식이 들어가 있었다. 진은 감색 재킷을 걸쳤다가 이내 벗었다. 점잖아 보였지만, 장례식에 온 듯 어두운 인상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회색 스트라이프 양복은 결혼식 즈음 아내의 취향대로 맞춘 것이었다. 자리의 의미를 생각하면 이것을 입는 것이 옳았다. 진은 약간의 광택이 들어간 재킷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화려하다. 양복 끝단을 따라 줄줄이 박힌 스티치 장식 역시 너무 멋을 낸 것 같아, 진은 옷을 맞출 때부터 내키지 않았다. 아내와 재단사의 입김이 거셌다. 진은 결국 비둘기색 정장을 골랐다. 양복은 앞선 것들에 비해 여러모로 어정쩡했다. 격에 맞지도, 남다른 의미가 있지도 않았다. 진은 그 옷이 잠시 후 참석할 자리에서 자신의 위치를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양복을 고르고 나자, 넥타이 선택이 다음 과제로 떠올랐다. 피로했다. 눈꺼풀 안쪽에 불쾌한 열기가 느껴졌다. 혓바닥이 유막에 싸인 듯 미끈거렸다. 진은 오늘이 토요일임을 상기했다. 주중의 피로가 고스란히 쌓여 몸을 짓눌렀다. 술을 줄여야 하나. 퇴근 후, 저녁 대신 절인 오이와 맥주를 마시는 것은 진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서두르는 법 없이 세 캔 정도의 맥주를 마시면, 근육의 긴장이 풀리며 잠이 스며들었다. 근래 술의 양이 조금 늘었는데, 그것이 피로감의 원인인 듯했다. 진은 밖에서 술을 마시는 법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술 한 잔 하지 못하는 숙맥이거나 종교적 이유로 금주하는 팍팍한 인사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는 매일 술을 마시는 대신, 휴일엔 금주하는 것으로 건강을 유지하려 했다. 가능한 한 오랫동안, 홀로 술을 마시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유진(소설가)




김유진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4년 문학동네에 단편소설〈늑대의 문장〉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단편집《늑대의 문장》, 《여름》과 장편소설《숨은 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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