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진 소설 <2화>
진의 집은 시 외곽에 있었다. 이 층짜리 단독주택으로 이사 온 것은 그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벽돌과 대리석을 시루떡처럼 켜켜이 얹어 만든 양옥이 유행이었다. 창이 곳곳에 있었으나 크기가 작아 채광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듯했다. 내부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집은 완고해 보였다. 진은 등에 멘 배낭이 너무 무거워, 조금만 무게중심을 옮겨도 뒤로 넘어가 버릴 것만 같았다. 가방의 열린 지퍼 사이로 간신히 욱여넣은 교과서와 문제집, 공책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진의 양손엔 교복과 옷가지가 든 여행 가방과 실내화 가방이 들려 있어, 몸이 고꾸라질 듯 점점 앞으로 기울어졌다. 진의 아버지는 대문에서 현관으로 이어진 대리석 타일을 따라 앞서 걸었다. 아버지가 진에게 집의 구조를 설명해주었으나, 진은 좀처럼 집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굽은 등 때문에 절로 고개가 기울었기 때문이다. 마당엔 고목이 있었다. 몸통과 비교해 유난히 가느다란 가지가 맥없이 쳐졌다. 종을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앙상한 나무는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었으나, 부자(父子)는 나무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관심도 없어, 그래도 괜찮았다.
어느 날 아침, 진은 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꽃 무더기를 발견했다. 없던 나무가 하루아침에 자라나 꽃을 피운 듯, 눈앞이 순간 환해졌다. 연한 보랏빛 꽃 사이사이 돋아난 작은 잎들이 참새 부리 같았다. 진은 뒤늦게 밀려오는 꽃 비린내에 코가 아렸다. 부자는 이사 온 지 반년 만에 고목이 라일락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전화벨이 울렸다. 진의 장모였다. 짜증과 체념 사이를 오가며, 진은 시간을 확인했다. 타인의 집에 전화를 걸기엔 터무니없이 이른 시각이다. 게다가 오늘은 휴일이 아닌가. 장모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진의 목소리에 잠기운이 남아 있음을 알아챘는지, 모임 참석을 재차 확인받은 후에야 진을 놓아주었다. 약속 시각까진 여유가 있었다. 장모는 필요 이상으로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고, 자주, 흘러넘치는 불안을 주변 사람들에게 떠넘겼다. 진은 자신이 여전히 그 희생자 중 하나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말에 외출해야 한다는 것 역시 못마땅했다. 다른 경우라면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주일 전 장모의 전화를 받은 순간, 진은 전의를 상실했다. 가능한 한 빨리 통화를 끝내고 싶었다. 설득이 가능한 인사가 아니었다.
진은 이십여 년 가까이 유지해 온 유선전화를 정지시키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 이내 그만두었다. 장모는 유선전화가 아니라면 휴대전화를, 휴대전화마저 받지 않는다면 집으로 찾아오고도 남았다. 장모는 늘 진의 상상 이상으로 무례했다.
진은 부엌으로 발길을 돌렸다. 밀린 설거지를 할 요량이었다. 쌓인 설거지거리래 봤자 유리컵 대여섯 개와 절인 오이를 담았던 밀폐용기 정도가 전부일 것이었다. 진은 주중에는 요리하지 않았다. 아침은 우유 한 잔으로 대신했다. 집안일을 주말에 몰아서 하기 위해, 보름간은 손대지 않아도 무리 없을 정도의 유리컵과 속옷, 양말, 와이셔츠 들을 구비해 두었다. 세척과 보관이 용이하도록 같은 종류의 것을 여러 개 마련했다. 진은 단순하게 살고 싶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였다. 몇 가지 규칙을 마련하는 일은 불가결했다. 개수대 옆 선반엔 동일한 모양의 유리컵들이 이미 깨끗이 닦여 정리되어 있었다.
냉장고를 열자 군둥내가 확 끼쳤다. 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악취의 원인은 밑반찬이었다. 크기가 제각각인 유리용기들이 냉장고 가운데 칸에 두서없이 쌓여 있었다. 캔 맥주와 밀폐용기에 담긴 절인 오이는 가장 아래 칸으로 밀려났다. 모두 영이 한 일이었다. 진은 마땅찮았다. 영은 설거지뿐 아니라, 주기적으로 진의 집에 들러 살림을 살피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들을 찾아내 채워 놓았다. 식료품이 대부분이었다. 진이 탐탁지 않아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진이 출근한 사이나 잠이 들었을 때를 이용했다. 처음엔 과일을 가져다 놓았다. 진이 입도 대지 않아 무르고 썩어 나가길 몇 차례 반복하자, 종목을 밑반찬으로 바꿨다. 밑반찬 역시 손도 대지 않자, 얼마 전엔 찬장에 즉석밥을 채워 놓았다. 냉장고에 언제나 우유가 있음을 깨달았는지, 시리얼을 사다 놓기도 했다. 진은 그 모든 노력이 허사임을 몇 차례 주지시켰으나 소용없었다. 영은 장모와 마찬가지로 설득할 수 없었다.
진은 우유를 유리컵에 따랐다. 우유에서 김치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비위가 상했다. 우유를 반쯤 마시다 식탁에 내려놓았다. 진은 탁자 끄트머리에 놓인 낯익은 물건에 눈길이 닿았다. 검은색 원통형 고무줄이었다. 진은 머리끈을 들어 올렸다. 가느다란 갈색 머리카락 한 올이 줄에 딸려 올라왔다가 이내 바닥으로 떨어지며 종적을 감췄다. 영의 것이었다. 영은 아내의 대학 동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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