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진 소설 <4화>
진의 아내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거래처 부장의 질녀였다. 아내는 이곳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유학길에 올랐다. 이국에서 사 년을 보낸 뒤 돌아왔다. 두세 번의 단체전과 서너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아내의 이름을 치면 미술 전문 잡지에 실린 인터뷰가 가장 먼저 보였다. 아내는 유래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이질적인 예명을 썼다. 부장은 습관적으로 질녀를 아명으로 불렀다. 진은 아내가 가진 세 개의 이름 중 무엇으로 불러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 호적상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무난할 것이라 결론지었다. 세 개의 이름 중 그것이 가장 평범하기도 했다. 그사이 진은 아내의 개인전 관람 후기를 포스팅 해 놓은 블로그를 하나 찾았다. 혀를 빼 문 짐승처럼 붉은 과육이 드러난 열매를 매단 나무 그림 옆에, 관람객과 자세를 취한 사진이 있었다. 날짜상으론 그것이 아내의 가장 최근 모습이었다. 진은 선 자리에 나가기 전날 인터뷰를 조금 읽어 보았으나, 요지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아내는 단순한 이야기를 복잡하게 하는 사람 같았다. 진은 미술에 소양이 없었으므로 더는 이해하려 노력하진 않았다. 진은 주먹만 한 링 귀걸이를 한 사진 속 아내를 유심히 보았다. 그림도 사람도 야했다. 상사의 압력에 가까운 부탁이 아니었다면 마주 앉을 기회조차 없을 만큼 자신과 동떨어진 부류의 사람 같았다. 진에게 선 자리는 업무의 연장선상이나 진배없었다.
컴퓨터를 끄기 전, 진은 검색 엔진에 자신의 이름을 입력해 보았다. 각기 다른 직업과 나이, 성별을 가진 개별적인 진들이 끝없이 쏟아졌다. 자신의 정보는 없었다. 진은 인터넷 동호회도, 쇼핑도, 블로그도 하지 않았다. 검색 페이지의 끝을 알기 어려울 만큼 많은 진이 그곳에 있었다.
진은 양치질을 하다 말고, 욕실 선반 위에 놓인 샘플 화장품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성용 수입 화장품 브랜드였다. 하나는 에센스였고, 다른 것은 아이크림이었다. 진은 화장품들이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희미했다. 주중에는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진은 머리끈과 마찬가지로, 화장품들 역시 영의 것이라 짐작했다. 이 집을 드나드는 것은 불심검문을 하듯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장모와 영뿐이었다. 게다가 영은 집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진은 샤워기의 물 온도를 조절하면서도 선반 구석에 나란히 놓인 샘플 화장품들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영 눈에 거슬렸다.
영이 집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진이 혼자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부터였다. 영은 진보다도 고독하고 비통에 찬 얼굴로 찾아왔다. 진은 과도하게 슬픔에 젖은 영을 바라보며, 자신이 위로받아야 하는 입장인지 위로해야 하는 것인지 잠시 헛갈렸다. 아내는 처음 진에게 영을 소개할 때, 친자매나 다름없는 사이라는 표현을 썼다. 형제가 없던 진은 그것이 무척 친하다는 것 이외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영은 말이 없는 진 대신 많은 말들을 했다. 주로 아내의 대학 시절에 대해, 그리고 아내가 유학할 당시 떠돌았던 소문들에 대해 추억했다. 영의 말법은 교묘한 데가 있었다. 영은 자신과 함께했던 아내의 대학 시절을 아름답게 미화하는 대신, 아내의 유학 시절 떠돌던 좋지 않은 풍문들에 대해선 사실인 양 굴었다. 소문 속의 아내는, 스스럼없이 약을 하고, 현지인과 동거를 하다 아이를 지우고, 휴대폰으로 애인들의 성기를 찍어 수집하는 여자였다. 진은 그것이 다소 과장되어 있긴 하지만 아주 없는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진이 아내를 불신해서가 아니라, 아내이기 이전에 예술가인 탓에, 그녀의 도덕관념이 늘 자신의 상식선보다 광범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은 아내의 과거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지만, 영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진은 영 역시 아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부류라고 여겼다. 영은 둔한 데가 있었다. 영은 때때로 왕비를 잃으면 아내의 자매를 후처로 들였던 왕들의 일화를 농담처럼 건네곤 했다. 진은 그 태도가 아내와 영이 말하는 친자매와 다름없음이 무슨 의미인지를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