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진 소설 <5화>
진은 식탁 위에 놓여 있던 머리끈을 떠올렸다. 머리끈은 실수로 놓고 간 것이 아닐 것이다. 영은 늘 고등학생처럼 손목에 고무줄을 두세 개씩 차고 다녔다. 손목에 매어 두지 않으면 다 도망가 버린다고, 진이 자신의 손목을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음을 눈치챈 영이 말했다. 진은 영이 자신의 집으로 찾아와 요리나 설거지를 하는 것이, 홀로 남은 자신에 대한 측은지심이나 가까운 이를 잃은 동병상련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진은 그것을 빈 곳을 채우려는 영의 습성으로 보았다. 아내의 경우가 그러했듯, 진은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영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기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영이 자신의 집 냉장고를 직접 만든 음식으로 채우는 것을 넘어서서 점진적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것에 심기가 불편할 따름이었다. 영은 아내처럼 호전적인 타입은 아니었다. 영은 상대방 앞에선 곧잘 순응하며 따르는 척하지만, 뒤돌아서면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독불장군 같았다. 영은 싸움에 임하는 전략가처럼 점진적으로 나아가며 공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미 관계를 오해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진은 갑자기 영이 부담스러워졌다. 고작 샘플 화장품을 두고 가면서도 구색을 갖추려 한다는 것이 구차해 보였다. 진은 샤워기 아래 섰다. 뜨거운 물줄기가 진의 어깨와 정수리를 바늘로 찌르듯 거세게 떨어졌다. 진은 아내가 죽은 지 얼마나 지났는지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았다. 육 개월이었다. 영이 이 집을 드나든 지도 꼭 반년이 지났다.
이사한 이듬해, 아버지는 산에 가자고 했다. 진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말 거는 것이 신기해, 군말 없이 따라나섰다. 두어 시간가량 올랐을 무렵, 통나무집 한 채가 나타났다. 처마 밑에 돼지가 그려진 작은 간판이 덜렁거렸다. 아버지는 아무런 언질 없이 통나무집을 지나쳐 뒤뜰로 갔다. 진은 자갈이 깔린 앞뜰에 남았다. 아버지가 농장주와 나누는 말소리가 들렸다. 흥정하는 듯했다. 진은 아버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지 못했지만, 번번이 질문할 기회를 놓쳤다. 진이 얇은 자갈층 아래 무른 흙을 운동화 뒤꿈치로 찍으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을 때, 아버지가 목줄을 한 돼지 한 마리를 끌고 진 쪽으로 다가왔다. 농장주 역시 돼지를 앞세우며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농장주는 대형견을 산책시키듯 노련하게 목줄을 다뤘다. 진은 놀라 뒷걸음질 쳤다. 살아 있는 돼지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농장주와 아버지는 산길을 올랐다. 산 중턱에 이르자 완만한 경사로 이루어진 참나무 숲이 나타났다. 훈련된 돼지들이 코를 땅에 처박으며 숲을 뒤지기 시작했다. 돼지가 낙과와 나뭇잎들을, 이미 썩어 흙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축축한 낙엽층을 코로 들춰내자 비로소 땅의 붉은 속살이 드러났다. 진은 처음으로, 땅이 여러 겹의 보호막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진은 말린 돼지 꼬리를 쫓았다. 농장주와 아버지는 목줄을 쥐지 않은 다른 손에 작은 모종삽을 들고 있었다. 돼지들이 한 자리에 미동 없이 서서 장시간 땅에 코를 박고 있다, 앞발로 흙을 파내려 하면, 둘은 기다렸다는 듯 재빠르게 목줄을 잡아당기고는 주머니에 넣어 온 사료를 먹였다. 모종삽으로 그 자리의 흙을 파냈다. 셋은 아무런 성과 없이 오랫동안 숲을 헤맸다. 숲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진의 귀에는 돼지와 농장주의 숨소리만이 번갈아 들렸다. 나무 사이로 빛이 젖어드는 것을 깨달은 농장주가 수색을 멈췄다. 그는 저만치 떨어져 있는 아버지를 큰 소리로 불렀다. 작은 형체는 일렁이기만 할 뿐 커지지는 않았다. 농장주는 다시금 아버지를 불렀다. 농장주의 돼지 뒤꽁무니를 따르던 진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버지를 향해 달렸다. 아버지는 바닥에 주저앉아 모종삽으로 땅을 파고 있었다. 찾는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땀에 젖은 등산복이 등에 달라붙어 얼룩덜룩했다. 아버지. 온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진의 목소리가 가시에 걸린 듯 뒤틀려 나왔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