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진 소설 <10화>
옆자리의 남자는 진에게 음반에 대해 설명했다. 진은 물어본 적이 없었지만, 침묵보다는 나았다. 그것은 짧은 피아노 소곡집이었다. 1981년 캐나다인 피아니스트는 오랜 지병 때문에 거의 소진된 체력으로 자신이 평생에 걸쳐 연주했던 작곡가의 곡을 재차 녹음했다. 1955년 녹음된 앨범의 첫 번째 곡의 연주 시간은 1분 50초가량이었다. 26년이 지나 같은 곡을 다시 연주했을 때, 연주 시간은 3분을 훌쩍 넘겼다. 남자는, 길어진 연주를 채우는 것은 늘어진 음이 아닌 짧은 묵음의 순간들이라고 말했다. 진은 그 말이 매우 추상적으로 들렸지만,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묵음의 순간들. 진은 자신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2년 사망했으므로, 1981년 음반은 유작 음반이 되었다. 첫 번째 연주곡은 피아니스트의 장례식장에서 마지막 순서로 흘러나온 이별의 곡이기도 했다는 남자의 설명이 끝나자, 진은 어렴풋이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진은 이 연주자를 알고 있었다. 그 장례식은 1982년 10월 15일 열렸다. 그가 오랫동안 기억하리라며 책에 밑줄을 그었으나 금세 잊었던 그 남자였다. 평생을 고독하게 살다 홀로 죽었다, 로 마침표가 찍힌 피아니스트였다. 진은 갤러리에 온 이후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날, 진은 영과 아내의 나체 사이에서 무던히 노력했으나 결국 발기가 되지 않았다. 진은 과음 때문인지, 부담감 때문인지, 머릿속에서 변명거리를 찾느라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영은 침대 밑에 떨어진 팬티를 집어 조용히 다리 사이에 꿰었다. 아내는 소리 내어 웃으며, 진의 머리통을 꼭 껴안았다. 시시한 남자구나. 아내의 따뜻한 목소리는 생경했다. 진은 아내의 품에서 바짝 긴장한 몸이 눈 녹듯 풀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시시한 남자구나. 진은 아내의 시시한 남자라는 말이 싫지 않았다.
진은 집으로 돌아와 4인용 소파에 앉았다. 전면 창에, 만개한 라일락이 가득 찼다. 진은 항상 뒤늦게 꽃이 핀 것을 안다. 초봄, 꽃을 틔우기 위해 나무가 내보내는 수많은 사소한 전조들을, 진은 본 일이 없다. 그래서 진에게는 꽃나무의 풍경이 갑자기 주어지는 선물 같다. 진은 맥주 한 캔을 땄다. 토요일이라 금주를 해야 했지만, 오늘만은 마실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주는 차고 부드러웠다. 진은 입안 가득 술을 머금으며 자신 앞에 남아 있는 수많은 고독의 날들을 응시했다. 진은 그것이 좋았다.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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