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01 19:05
수정 : 2014.04.01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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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승준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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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공직사회에는 얼공과 늘공이 있다. ‘얼공’은 정권을 잡은 덕분에 얼떨결에 공직자가 된 경우를 말한다. 소위 실세그룹이라 불리지만 최장 5년 이하의 계약직이다. ‘늘공’은 본래 직업상 늘 공무원인 경우다. 늘공 대부분은 25년 이상 공직자로 있는 정규직이다.
늘공은 과장급만 되어도 비정규직 정권이 서너번 바뀌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사람들이다. 늘공 핵심그룹은 명문대 나오고 치열한 고시에 붙은 최고 엘리트들로 이뤄져 있다. 에이스들이 모인 이유는 그만큼 힘 있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힘의 근원은 부처의 규제권력에서 나온다. 또 규제권한 덕분에 늘공은 공직을 그만둬도 민간에서 서로 모셔가려는 전관예우를 받곤 한다. 반면, 단기 비정규직인 얼공들의 눈에는 규제를 대폭 완화하면 경제, 사회 부문에서 가시적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 잘 보인다. 게다가 이들은 임시직이기 때문에 기존 관료조직과의 이해관계로부터도 자유로운 편이다. 얼공과 늘공이 이렇게 다르다 보니 규제개혁을 놓고 늘 전쟁이 벌어진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 모두 규제개혁에서 크게 성공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정규직 늘공이 비정규직 얼공보다 더 경험이 많고, 잘 훈련됐고, 노련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길어야 5년마다 바뀌는 얼공들과 달리 늘공은 특정 정권보다는 소속 부처에 대한 충성도가 더 높다는 것도 큰 이유다. 늘공은 자신들에게 규제개혁이라는 과제가 주어지더라도, 그로 인한 부처의 권한 약화는 본능적으로 피하려고 한다.
규제를 철폐하려고 해도 늘공의 협조 없이는 효과를 낼 수 없다. 예를 들어, 정부 인허가 기간을 줄이기 위해 접수 후 처리기간이 6개월이던 것을 ‘접수 후 한달내 처리’로 줄였더니, 일선에서 아예 접수를 안 하거나 대기표만 주고 수개월 동안 접수를 미뤄 전과 다를 바 없었던 경우가 그러한 예다. 또 부처 시행령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입법을 해야 한다’며 국회로 넘겨버리는 경우도 있다. 국회를 거치면서 세월만 가는 동안 결국 한 정권이 저물고 새 정권이 시작되면서 기존 얼공들이 떠나고 신입생 얼공들이 또 들어오는 과정이 반복된다.
규제개혁이 성공하려면 결국 늘공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과거와 같은 여론몰이나 질타만으로는 어렵다.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은 담당 과부터 없애는 것이다. ‘불모지대였던 한국에서 반도체산업이 클 수 있었던 건 정부에 반도체과가 없었던 덕분’이란 말도 웃어넘길 게 아니다. 하지만 규제개혁을 위한 조직 축소는 현실적으로 거의 어렵다. 그래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늘공들과 전쟁을 하려면, 그들로 하여금 규제개혁을 꺼리도록 만드는 제약요인들과의 전쟁을 더 먼저 벌여야 한다. 규제완화 뒤에는 단기적 부작용이 따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감사에 대한 면책 특권부터 보장해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꼭 필요한 규제개혁이라도 가능하다.
규제완화는 결과적으로 특정 민간에게 더 이익이 되는 경우도 흔하다. 이런 경우 정권이 바뀌고 새로운 얼공이 들어올 때마다 앞선 정부의 규제완화 조처들이 특혜 시비로 비화되는 예들을 늘공들은 수없이 보아왔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안전장치를 마련해주지 않는 한 절대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 건 당연지사다. 또 어떤 경우엔 한쪽은 이익을 보고, 손해 보는 쪽도 생긴다. 자동차를 개조해 이동식 음식업을 할 수 있도록 해주면 기존 포장마차 사업자들이 크게 반발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시끄러워지기 시작하다 보면 더 몸을 사린다.
한편, 규제 중에는 ‘착한 규제’도 있다. 환경보호, 수도권 과밀억제, 사교육 억제, 경제 집중화 방지, 동반성장 등 꼭 필요한 규제들도 많다. 이런 것까지 섣불리 건드리면 되레 전열(戰列)만 흐트러지고 만다. 착한 규제와 나쁜 규제는 명확히 구별돼야 한다.
바이오 헬스, 금융, 콘텐츠, 소프트웨어 산업에서의 과감한 규제개혁은 청년들이 좋아할 양질의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 것이다. 하지만 우선 늘공들과의 전쟁 방식부터 바꾸지 않으면 지난 정부들처럼 유야무야되기 쉽다. 규제개혁에 성공한 정권은 역사가 온당히 평가할 것이다.
곽승준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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