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22 18:51
수정 : 2014.04.23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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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승준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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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 구조에서 생사를 가르는 시간을 ‘골든타임’이라고 한다. 재난 발생 시 골든타임 때의 조치를 보면 선진국과 후진국이 확연히 갈린다. 이번 세월호 침몰은 11년 전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와 판박이다. 당시 기관사는 “위험하니 전동차 안에 있으라”고 방송해놓고 통제 열쇠마저 뽑아들고 빠져나갔다. 그 말만 믿은 승객들은 객차에 갇혀 참혹하게 죽어갔다. 사망자만 192명에 이르러 지하철 사고로는 세계 둘째 규모 대참사였다. 작년 태안반도 사설 청소년캠프 사고 때도 교관 지시에 따른 고교생 198명이 파도에 휩쓸려 5명이 숨졌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선실에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만 열 번 가까이 해놓은 채, 선장과 항해사, 조타수 등 항해승무원들만 모두 승객들 몰래 구명보트에 탔다. 최우선이어야 할 승객들의 목숨은 고사하고 조리원, 사무원, 아르바이트생까지 한솥밥 먹던 동료들마저 버릴 정도로 현장 책임자들의 조처는 후진적이었다.
대한민국에 대형 참사가 잦은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정부와 정치권에 국민 안전에 대한 강력하고 일관된 정책 의지가 없다. 사고가 나면 그때만 요란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단 망각에 빠진다. 더 큰 문제는 재난 대비나 구조를 실행할 종합적 현장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는 데 있다. 현 정부는 출범 초 정부조직 개편을 통해 행정안전부의 이름을 안전행정부로 바꿨다. 안전을 더 중시하겠다는 취지는 국민들도 반길 일이지만, 요란하게 간판만 바꾼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지난해 8월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을 전면 개정해 이번 2월부터 시행할 때도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개정법의 핵심은 안행부에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를 신설해 기존 소방방재청은 자연재해를 전담하고, 인적·사회적 재난 대응은 중대본이 지휘한다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모든 유형의 재해를 도맡아야 했던 방재청의 부담을 덜고, 중앙부처 차원으로 업무 중요도를 격상시킨다는 것이니 그럴듯해 보일 수 있지만, 이번 참사에 대한 초기 대응을 짚어보면 되레 더 퇴보한 듯하다.
그런 까닭에 일각에선 그동안 재난 대응을 전담해온 소방방재청 전문인력들을 중대본이 제대로 흡수하지 않고 행정관료들이 주가 된 것이 이번에 드러난 여러 문제들의 원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문제는 방재청 인력을 흡수하고 안 하고가 아니다. 방재청은 행정안전부가 안전행정부로 이름이 바뀐 것과 무관하게 줄곧 안행부 산하에 있어왔기 때문이다. 재난관리 책임이 건설부 소관에서 내무부, 즉 지금의 안행부로 넘어온 것은 1990년이었다. 안행부가 재난 대응의 컨트롤타워를 맡은 건 이번 2월부터가 아니라 24년 전부터라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재난 대응 컨트롤타워는 그동안 진화하지 못했다. 대형 참사가 반복될 때마다 언젠가 본 듯한 ‘데자뷔’로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셋째 문제는 안전에 대한 우리 어른들의 심각한 불감증이다. 이번 세월호 침몰 사고는 특히 더 그렇다. 해운회사와 운항 관계자들은 과적, 과속은 물론 기본적인 운항관리규정도 무시했다. 아이들은 어른들에 비해 지휘자나 권위자의 지시를 더 잘 따른다. 그래서 그 많은 아이들이 죽고 실종된 지금의 상황은 안전불감증이 만연하도록 둔 우리의 공동책임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우울하다. 하지만 이런 집단적 우울증이 제대로 치유되려면 지금 분위기가 빨리 바뀌거나 잊혀지면 안 된다. 이미 드러난 맨얼굴을 서둘러 가리려 해선 안 된다. 이번에야말로 정부와 정치권도 책임을 통감하고 말이 아닌 실천에 나서야 한다. 대응 매뉴얼은 발생 가능한 최악의 재난 시나리오들을 가정해 현장에서 반드시 쓰일 수 있도록 실행 가능하고 구체적으로 보완해야 하고, 비치용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불시점검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제대로 쓰이게 해야 한다. 또한 어떠한 곳에서 재난이 발생하더라도 즉각적인 정부 개입과 전폭적 지원이 가능하도록 미국 연방재난관리청 같은 정부 단일접촉창구도 확립해야 한다.
“당신이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가 그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는 글귀를 되뇌며 생존자 구조 소식을 기다린다.
곽승준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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