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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5.13 18:44 수정 : 2014.05.13 18:44

곽승준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19세기 중반, 동아시아 지도자들은 산업혁명의 물결이 서구 열강의 증기선과 함께 이 지역에 닥치자 중대한 갈림길에 섰다. 일단 모두 빗장부터 걸어 잠갔다.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면 기존 질서와 기득권이 흔들릴 것을 경계해 강력한 쇄국정책을 취한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본 지도자들의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달라졌다. 변화의 큰 물결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이 일본의 생존에도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인지했다. 일본은 1860년대 메이지유신으로 산업혁명과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했다. 반면, 우리 지도자들은 변화의 시급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변화의 충격을 산업화와 근대화로 대응하려 하기보다는 봉건질서와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했다. 결국 경술국치를 당했고, 일본군 성노예 징집과 식민치하 피해의 대부분은 민초와 후대들이 떠안았다. 적시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지도자들의 인지와 대응이 국가의 흥망과 미래세대의 운명을 얼마나 크게 좌우하는지를 보여준 뼈아픈 역사다.

이후 우리는 일본에 비해 백년 늦게 산업화·근대화를 시작했지만, 30여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경이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까지 호황을 구가한 경제성장의 열매들은 소수에게 집중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의 신(新) 기득권층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점점 굳어져 왔다.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기득권 혁파를 외치지만, 제대로 실천된 것을 꼽아보자면 궁색하다. 그래도 또 선거철이 되면 지역감정에 호소해 쉽게 표를 얻고 기득권을 지킨다.

하지만 앞으로는 꽤 달라지리라 기대해본다. 이번 세월호 침몰 참사와 수습 과정을 지켜보면서 국민들도 그동안 간과해온 많은 것들을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난 30~40년간 압축성장의 이면에 잘 보이지 않던 사회 곳곳에 누적된 문제들을 직시하고, 이제라도 바꾸지 않으면 더 큰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불안감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만연한 불안감은 세월호 선장이나 선원들, 선사 관계자들과 문제가 드러나는 공무원 몇몇을 엄단한다고 해서 쉬이 누그러질 것 같지 않다. 관피아(관료+마피아)를 척결한다고 해서도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다. 우리 사회 지도층에서는 세월호 사건 후, 서울 지하철 2호선 추돌사고가 벌어지자 승객들 모두 “대기하라”는 안내방송을 무시하고 주저 없이 자력 탈출한 것을 매우 심각한 문제로 인지해야 한다. 정치학에서는 지도자나 정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무정부 상태를 ‘아나키’(anarchy)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는 안전과 질서유지를 위해 취한 정부나 공공기관의 조처를 국민들이 전혀 따르지 않는 경우가 일상화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명목상 정부는 존재하나 사실상은 무정부 상태”로 악화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지도층에 대한 불신이 커진 것이다. 신뢰를 다시 되돌리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진짜 위기다.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구조적·제도적 정비는 결국 정치권과 국회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과거와 달라졌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국민들의 슬픔, 분노, 불안감은 지지 정당이나 이념, 지역구도를 초월하고 있다. 정치인들은 여당 지지율 하락이 더 이상 야당의 반사이익이 되지 않는 것도 심각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대한민국이 근본적으로 바뀔 때가 됐다는 범국민적 인식은 널리 퍼지고 있다. 헌법부터 새 시대에 맞게 바꾸는 개헌이건, 낡은 지역감정 위에 유지되어온 정치 기득권을 깨기 위한 중선거구제로의 개편이건, 대선 전 여야 공히 내세웠던 경제기득권을 깨기 위한 경제민주화이건, 지금은 우리나라를 쇄신하기 위한 대대적인 큰 틀의 개혁이 시급하다. 국민들의 높아진 인식과 불신에도 불구하고, 여야 지도자들이 국민들의 요구를 인지하지 못하고 과거와 같이 내용 없는 말장난이나 하고 구태의연하게 정쟁에 매달린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둡다. 우리 사회 지도층이 시대 변화를 간과하고 기득권에 연연했던 구한말의 패착을 되풀이하지 않길 바란다.

곽승준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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