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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6.18 19:25 수정 : 2013.06.18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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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집 사이 골목이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적당한 간격을 골목이라 부르던 때가 있었다. 저물 무렵 요령 소리를 앞세워 오던 두부장수가 있었고, 맹감잎에 싼 찹쌀떡을 팔러 오던 사람이 있었다. 가로등 아래 떨리던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 있었다. 노상방뇨의 빗소리도 있었다. 골목은 어느 집에서 고기를 굽는지 알려주었고, 어느 집에서 악다구니 끝에 울음이 새어나오는지, 밥상 던지는 소리가 나는지 기별해주었다.

혹시라도 낯선 이가 들어서면 그의 눈에 풍경이 익숙해질 때까지 가만히 엎드려 있던 골목.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친절하던 골목. 젊은 시인 백상웅은 시장골목에 좌판을 펴고 앉은 이들을 비유한 시에서 “저 골목은 무릎을 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 늙은 무릎들이 골목 안쪽에 가지런히 내놓은 화분에는 파, 쑥갓, 상추, 부추가 오종종 꽃밭을 이루었다. 골목으로 턱 하니 불알 내놓은 세발자전거의 주인이 나타나시면 다들 그분을 경배하였다. 그분은 머지않아 골목대장이 되실 분이기 때문이었다.

골목은 집과 집을 이어주는 끈이었다. 아파트가 생기면서 골목이 사라졌다. 끈이 사라졌다. 근대 이전의 골목길은 그나마 끈을 이으려는 노력들이 있다. 안동 하회마을과 담양 창평면 삼지내 마을 골목길이 대표적이다. 팽나무와 어깨 낮은 돌담집들이 잘 어우러진 제주 해안마을의 골목길도 일품이다. 중국 베이징 동쪽의 후퉁 거리도 삼삼하다. 근대 이후의 골목은 어디서 찾아야지?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트위터 @ahndh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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