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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19 18:43 수정 : 2013.08.19 18:43

요즘 사람들은 밥에 대해 관심이 높은 반면에 똥에 대한 대접은 지나치게 소홀하다. 심지어 ‘똥’이라는 말이 방송에 부적격한 언어라는 의견도 있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왜 똥에 대한 기억을 빨리 잊으려고 할까? 똥, 이라는 그 귀여운 말을 아예 발설하지 않는 게 문화생활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친구네 집에서 놀다가도 똥이 마려우면 자기 집 변소로 달려가 똥을 누던 시절이 있었다. 농경사회에서 똥은 훌륭한 거름이었으니까. 우리는 날마다 양변기에 앉아 재활용되지 못하는 똥을 누고 있다. 사람의 똥냄새가 사라진 이후 삼천리에 사료 먹인 가축들의 똥냄새가 진동할 뿐이다. 곤충과 조류들, 혹은 미생물들이 찾을 만한 신선한 똥이 없다. 쇠똥구리도 그래서 사라졌다. 참 고약한 현실이다.

존 그레고리 버크의 <신성한 똥>(까치)은 배설물의 사회문화사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 책이다. 분뇨를 종교의식에 사용하거나 질병의 치료제로 썼던 사례들은 흥미롭다. 지금도 인도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소똥을 말려 소중한 연료로 쓰는 사람들이 있다. 베트남 고산지대에서는 다람쥐 똥에서 골라낸 커피를 귀하게 여긴다. 중국인들은 박쥐 똥에서 모기 눈알을 골라 요리를 한다고도 한다. 출판계에서는 ‘똥’이 제목에 들어가는 책이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한다. 남원 실상사의 ‘생태뒷간’이나 김제 귀신사의 ‘미생물 소멸식 화장실’은 똥에 대해 예의를 지키려는 안간힘이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트위터 @ahndh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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