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0.27 19:17
수정 : 2013.10.27 19:17
중국 윈난(운남)성의 차마고도(茶馬古道)는 텔레비전으로 소개된 이후 우리에게 익숙해졌다. 길도 길이지만 그 길을 오가는 이들의 삶의 역정이 각별한 감동을 주었던 것. 중국에만 옛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에 나 있는 ‘토끼비리’는 우리의 대표적인 옛길 중 하나다. 이 길은 조선시대 경상도 사람들이 서울로 갈 때 이용하던 영남대로의 일부다. 문경 석현성 진남문에서 영강 쪽으로 내려가는 험준한 낭떠러지에 길이 나 있다.
고려 때 왕건이 군사를 끌고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산세가 험한 이곳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그때 토끼 한 마리가 벼랑 쪽으로 달아나는 걸 보고 왕건은 아찔한 벼랑을 깎아 길을 내게 했다. 그리하여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바윗길이 생겼다. 토끼가 달아난 길이라 해서 ‘토천’(兎遷)으로도 부른다. ‘비리’는 강가나 바닷가에 높이 솟은 벼랑을 가리키는 ‘벼루’의 이 지방 방언.
토끼비리의 석회암은 이 길을 오간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닳아 유리 표면처럼 반질반질해졌다. 짚신도 가죽신도 맨발도 지나갔을 것이고 말과 소도 지나갔을 것이다.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도 등짐 진 방물장수도 시집에서 구박받던 며느리도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그들의 발소리가 쌓여 발자국이 되었을 것이다. 발자국 위에 발자국이 또 쌓이고 쌓여 조붓한 길이 되었을 것이다. 가을이면 단풍이 붉은 입술을 삐죽거렸을 것이고, 겨울이면 눈발이 벼랑 끝에 서서 울었을 것이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트위터 @ahndh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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