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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3.25 18:36 수정 : 2014.03.25 18:36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까까머리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의 동국대 백일장에서 신경림 시인을 먼발치에서 처음 보았다. 시인은 심사위원으로 나와 계셨다. 자그마한 키와 작은 눈의 시인은 소년처럼 생글생글 웃었다. 시집 <농무>를 미리 읽었던 터라 남성적인 투박한 기운이 느껴지는 시집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저분의 어디에서 민중의 숨소리가 터져 나왔던 것일까? 그날의 시제는 ‘풀잎’이었다. 나는 ‘풀’이라는 제목의 시를 이미 써서 습작노트에 적어둔 적이 있었다. 식은 죽 먹기였다. 후딱 시를 제출하고 응원하러 나온 선배들과 어울려 놀았다. 늦은 오후에 백일장 심사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나는 2등이었다. 시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분들이라고 심사위원들을 속으로 원망했다. 상품으로 받은 시집 한 보따리를 들고 경부선 하행열차를 탈 때까지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시절이었으므로. 나중에 시인이 되어 선생님을 뵈었을 때 그때 일을 말씀드렸더니 빙긋이 웃기만 하셨다. 내가 바둑 두 판을 이기고 났을 때였을 거다.

최첨단의 요즘 시들은 읽어도 속이 헛헛할 때가 많다. 해독이 불가능한 건조한 문체 탓이다. 신경림 선생님의 새 시집 <사진관집 이층>을 읽었다. 저세상으로 가신 어머니와 아내를 떠올리는 시편들은 코끝을 시큰하게 만든다. “도시락을 싸며 가난한 자기보다 더 가난한 내가 불쌍해/ 눈에 그렁그렁 고인 아내의 눈물과 더불어 산다”는 선생님은 어느덧 여든을 목전에 두고 계신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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