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몸
종기
▶ 현대에 태어난 것은 축복입니다. 이 문장에 동의하지 않는 분도 많을 겁니다. 각종 환경오염과 지나친 경쟁 등을 생각하면 ‘순수한 옛날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종기와 관련해서는 현대인이 조선의 임금보다 행복합니다. 현대인에게 아무것도 아닌 종기가 항생제가 없던 과거에는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질환이었습니다. 종기로 본 역사는 흥미진진합니다.
현대인들은 차곡차곡 쌓인 시간의 더미 위에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옛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누리며 살아간다. 만약 시간의 혜택을 받은 현대인들이 현재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채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페니실린의 제조법을 알고 있는 의사가 종기로 인한 합병증으로 죽어가는 어린 환자 앞에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지식을 이용할까, 아니면 역사적 혼란을 막기 위해 눈과 귀를 닫을까. 어쩌면 그는 이름없는 어린아이 하나 살리는 것은 큰일이 아닐 거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의 눈앞에서 죽어가는 인물이 필부가 아니라, 한 나라의 임금이라면? 더 나아가 조선의 역사적 흐름에 큰 전환점을 만들어낸 문종이나 정조였다면?
세균이나 항생제에 대한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종기(腫氣)는 가장 무서운 질환 중 하나였다. 현대인들에게 종기란 피부가 감염되어 고름이 생기고 불룩하게 튀어나오는 증상을 의미한다. 종기의 원인은 박테리아의 유입에 의해 발생된 염증반응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겨드랑이나 사타구니의 땀샘이 감염되어 발생하는 화농땀샘염(hidradenitis suppurativa), 장시간 앉아 있는 사람의 엉덩이 근처에서만 발생하는 모발둥지낭(pilonidal cyst)도 종기의 일종이며, 사춘기 청소년들의 고민거리인 여드름 중에서도 극강의 위력(?)을 자랑하는 낭포성 여드름(cystic acne) 역시도 종기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항생제 없던 100년 전만 해도 종기에 의해 사람들 죽어나가
문종·정조도 종기로 인해 사망
세조 역시 현덕왕후가 침 뱉는
꿈 꾼 뒤 종기 시달렸다는 야사 현대의학에서 종기란 ‘피부 염증’
조선시대엔 ‘붓는 증상’ 통칭
봉와직염이나 관절염은 물론이고
암 같은 악성종양도 종기로 봐
종기 전문의사가 있었을 정도 문종의 등창은 붉게 부어오른 부위가 30㎝ 천연두를 박멸하고 다양한 감염성 질환들을 코너에 몰고 있는 현대 의학의 위력에도 종기는 여전히 살아남긴 했어도, 과거에 비하면 그 위세는 영 변변치 않다. 예나 지금이나 일단 상처가 생겨나면 그 부위가 세균들의 집중 공격 포인트가 되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현재에는 다양한 종류의 소독약과 항생제 연고, 살균 처리된 일회용 밴드가 손 닿는 곳에 늘 놓여 있기에 가벼운 상처가 2차 감염으로 이어지는 비율은 매우 낮아졌으며, 설사 감염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다양한 내외과적 처치를 통해 종기를 치료하는 방법이 다양하게 개발되어 있어 종기가 원인이 되어 사망하는 현대인들은-적어도 선진국에서는- 극히 드물다. 하지만 시계를 겨우 100년 전으로만 돌려보아도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당시에는 종기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비율이 훨씬 높았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한 2차 감염으로 죽음에 이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종기는 남녀노소는 물론이거니와 지위 고하도 막론했기에, 당대 최고의 의료 수혜를 받을 수 있는 왕조차도 종기에 시달리다가 사망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방성혜 지음, 시대의 창 펴냄)에 따르면, 문종과 정조는 종기가 원인이 되어 숨진 대표적인 ‘귀하신 몸’들이다. 세종 31년인 1449년에 당시 세자였던 문종은 등에 생긴 화농성 종기, 즉 등창으로 고생했다고 하는데, 당시 문종의 등창은 붉게 부어오른 부위가 한 자(약 30㎝)에 이를 정도로 컸고 그 증상도 심각했다. 세자의 등창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아비였던 세종은 아들의 고통을 보다 못해 “도죄(徒罪) 이하의 죄를 저지른 자들은 이유와 판결 여부를 막론하고 모두 사면하라”는 왕명을 내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주변 사람들의 배려와 정성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수시로 재발하는 종기로 인해 즉위 2년 만에 사망했으며, 겨우 열두살인 어린 세자의 즉위는 결국 계유정난과 사육신의 처형으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이끈 임금으로 평가받는 정조의 생명을 앗아간 것도 정조 24년(1800년)에 머리와 등에 발생한 커다란 종기였다. 종기의 병증이 얼마나 심했는지 어의들이 총동원되어 임금의 환부를 살폈지만 종기는 낫지 않았고, 결국 정조는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승하하고 만다. 종기가 발생한 지 겨우 24일 만의 일이었다. 정조 사후, 아버지의 큰 뜻을 이어받기에 열한살의 순조는 너무 어렸고, 그렇게 정조가 꿈꾸었던 조선의 미래도 스러져 버리고 말았다. 역사는 가정을 허락하지 않는다지만, 만약 페니실린의 제조법을 쥐고 미래에서 온 의사가 종기로 고생한 문종과 정조가 살던 15세기 중반이나 18세기 후반에 떨어졌다면, 그리고 그들을 치료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더라면 어땠을까? 문종과 정조 이외에도 조선의 임금들은 크고 작은 종기에 시달렸다는 기록이 실록 곳곳에 심심치 않게 드러나며, 비록 정식 기록에는 없지만 세조 역시도 현덕왕후(단종의 어머니)가 저주하고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난 뒤, 종기에 시달렸다는 야사도 유명하다. 당대 최고의 의료진을 상시 대기시켜 두었던 임금이 이 정도였다면 당시 일반 백성들은 말해 무엇하랴. 아마도 당시 사람들에게 종기는 차라리 머리카락이나 손톱 같은 신체의 일부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흔하면서도 일반적인 현상이었을 것이다. 종기 치료법을 전문적으로 다룬 치종학서들이 다수 편찬되었고, 종기만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치종의들을 관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양성할 정도였다는 것은 이에 대한 증거이다. 그 끈적한 그림자를 몸에서 지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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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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