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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연애] 여자 몸에 무책임한 남자
▶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낙태죄로 고발하겠다’고 협박하는 남자친구. 이 문제로 올해 상반기 여성민우회에 들어온 상담이 3건입니다. 한 피해자는 “남자친구가 관심이 없어 친구와 함께 병원에 갔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피임에 소홀하고, 임신·낙태에도 무심했던 남자친구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요? 내 몸은 소중하고 남의 몸은 소중하지 않다는 걸까요? 의사는 애매한 표정으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런 경우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관계를 통해 옮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와 같이 약을 먹어야 합니다.” 약을 먹어야 했다. 그것도 같이. 의사는 종이에 알지도 못하는 이상한 바이러스 이름을 적어주면서 상대에게 알려주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부턴 피임을 하란 말도 덧붙였다. 병원에서 나왔을 땐 저녁 7시가 넘었음에도 볕이 뜨거워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그때 그에게 문자가 왔다. “병원은 다녀왔어? 몸은 좀 괜찮아?” 잠시 망설이다가 괜찮다고, 당분간 약을 먹어야 할 것 같다고, 그리고 어쩌면 너도 약을 먹어야 할 수도 있다고 말끝을 흐렸다. 이 말을 하는데도 ‘내가 왜 약을 먹어야 하지?’라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얼마 전 했던 에스티디(STD)검사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이후 관계를 맺은 건 그가 유일했다. 구태여 피임을 하지 않겠다고 고집했던 표정이 떠올랐다. 어쨌거나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는 문자가 왔다. 무엇이 미안한지, 도대체 이 상황을 알기나 하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약 먹으면 낫는 거니까’ 식의 애써 감정을 억누른 말들을 손가락으로 끄적거렸지만 차마 문자로 이어지진 못했다. 그와 내가 만난 건 에스엔에스(SNS)를 통해서였다. 140자 안에서 그가 내뱉는 말들은 대개 술을 마셨다는 것, 오늘도 야근을 한다는 것, 지치고 힘들다는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진부한 말뿐이었다. 그의 짧은 생각들에 마음이 동하거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큼의 매력적인 글귀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린 만났다. 처음 본 그의 모습은 화이트칼라의 전형적인 대기업 사원이었다. 만취해서 시니컬하게 웃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기까지 했다. 내가 바랐던 이상형과 다른 그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끌렸다. 그리고 그러한 끌림은 나의 외로움을 미세하게 흔들어 깨웠다. 그와 함께 집 앞 편의점에 앉아 맥주를 시켜놓자마자 그가 입을 열었다. 사는 게 힘들다고. 주절주절 말을 쏟아내는 그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속으로는 뭐가 저렇게 힘들다는 건지, ‘너보다 더한 사람들도 많다, 그런다고 이렇게 술을 마신들 뭐가 달라지니’라고 화답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다. 그는 술기운을 빌려 굴곡진 자신의 삶을 이야기했고 나는 그의 지친 마음을 가늠하는 것 이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는 끝없이 말했고 나는 주억거리며 묵묵히 들었다. 몇 번의 만남이 반복되고 그와 내가 좀더 친밀해졌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셨다. 맥주를 마시고 우리 집에 오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 집에 와서 맥주를 마셨다. 소주든 맥주든 다른 어떤 술이든 술을 마시지 않으면 일상이 불가한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에게 술은, 일상이었다. 어느 순간 그의 존재감은 옆에서 자고 있는 찌든 육체 덩어리에 불과했다. 얼마 전 STD 검사는 이상 무그 뒤 관계 맺은 건 그가 유일
피임 않겠다던 표정이 생각났다
너도 병원에 가보라고 말했다 약을 먹기 시작한 날부터
우리는 만나지 않았다
바쁘다며 그는 병원도 안 갔다
그는 나를 SNS에서 블록했다 “면역력이 떨어진 탓이겠지. 며칠 약 먹으면 된대. 하지만 검사는 꼭 해봐야 한대.” 체념 섞인 문자를 보내자마자 알겠다고, 병원에 가겠다는 답문이 왔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고 며칠이 지났지만 그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바빠서 병원 갈 시간이 없다느니, 병원에 갔더니 하필이면 휴진이라느니 등등의 핑계를 댔다. 하루에 두 번씩 먹어야 하는 약은 속을 더부룩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더부룩한 속보다 마음에 체기가 쌓여가는지도 몰랐다. 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가 바쁘다는 이유로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내가 병원을 다녀온 날부터, 약을 먹기 시작한 날부터 우리는 만나지 않았다. 그는 병원을 가지 않았지만 술은 마시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나는 알았다고, 병원은 꼭 가보라는 말을 건넸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은 힘들어서 술을 마셔야겠다는 문자가 왔다. 회사에서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었기에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의 체증이 쌓여가던 나는 병원을 가야지 왜 술을 마시냐고 버럭 화를 냈고 그는 내가 힘들다는데 넌 들어주기는커녕 네 말만 한다고 말했다. 기가 막혔다. ‘더러운 바이러스를 누구 몸에 옮겨놓고 이제 와서 자기 힘든 것을 몰라준다고? 내가 누구 때문에 약을 먹는데, 지 생각해서 기껏 병원 가보랬더니 뭐라고? 넌 나랑 섹스하는 것 말고는 없었어?’라는 말들을 하고 싶었지만 발설되지 못한 채 삼켜버렸다. 관계는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며칠 사이 누가 뭐랄 것 없이 문자는 뜸해졌고 그는 트위터에 별다른 글을 남기지 않았다. 가상공간을 통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할 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그가 트위트를 올렸다. “몸이 좋지 않아 정기검진을 했는데 놀랍게도 모든 게 정상이었다. 그만큼의 의문이 남는다.” ‘그만큼의 의문? 뭐야, 지금 나를 의심이라도 한다는 거야? 너는 결백하다는 거야?’ 한 문장은 내포하는 의미가 너무 강렬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블록당했다. ‘이제 와서 이렇게 회피해버리면 다야? 이렇게 더럽게 끝을 내버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너는 생활하겠지. 또 그렇게 어딘가에서 술을 마시고 인생사를 늘어놓으면서 시간의 무게를 짊어진 채 떠들어대겠지. 도대체 뭔데? 내가 잠깐의 유희 상대였어?’라는 말들이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이 상황에서 나는 쿨해지지 못했고 쿨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의 태도가 쿨한 것이었다면 도대체 뭐가 쿨한 건지 되레 묻고 싶었다. 원망은 마음속에 침잠되기 시작했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나간다. “이 개새끼야, 너 그딴 식으로 살지 마, 이렇게 뒷정리 지저분하게 하는 거 니 맘이지만 적어도 상대를 배려한다면 그건 아냐! 제대로 살아”라고 욕 한번 못했던 내가 바보 같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속이라도 후련했을 텐데 그러한 말들로 내 자신을 상처내고 싶진 않았다. 그만큼의 의문은 나 또한 남았지만 오해만큼 풀리지 않았다. 비가 내리면 스멀스멀 올라오는 하수구 냄새같이 썩은내를 풍기는 기억이긴 해도 이제는 쓴웃음 한번 짓고 흘리면 될 일이다. 이륙은 누가 뭐랄 것 없이 행복하게 하지만 착륙은 언제 어디로 할지 모를 일 아니던가. 어긋난 감정 따위는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단지 우리는 하나의 소실점을 바라보지 못했고 그렇기에 지금도 다른 노선을 향해 또다른 이륙을 준비할 뿐이다. 체리를 좋아하는 20대 후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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