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3.08.16 19:23 수정 : 2013.08.17 07:32

[토요판/연애] 남친의 편집증

▶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은 실은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않는 사람이다. 진정으로 한 사람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다른 한 사람을 버려야만 한다. 하나의 대상에 대한 강박. 그것도 ‘사랑’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만을 바라봐주던 그가 끔찍해지는 순간이. 강박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이 선택한 대상에 몸을 던지는 그 순간, 그것 이외의 모든 것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제 알았다. 나는 그의 집요함이 아니라 불확실성이 싫었던 것이다.

이상한 느낌이다. 이건 뭘까. 내 손에 전해진 건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가 아니라 기분 나쁜 감촉이었다. 손가락을 간질이는 호호 부는 바람도 느껴졌다. 슬며시 눈을 떠보니 그의 손이 내 손을 잡은 채로 엄지손톱의 벗겨진 매니큐어를 자신의 손톱으로 긁고 있는 게 아닌가! 주춤거리며 손을 빼 그를 바라보니 “자기, 이거 뭐야?”라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나는 그냥 두라고, 벗겨진 거 아는데 시간이 없어 못 지웠던 거라고, 오늘 밤에 지울 거라고 대답했다. 거슬리는 건 너보다 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소한 말다툼으로 번질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는 “싫어, 나 이거 벗길래”라며 비음 섞인 목소리로 벗겨진 매니큐어를 다시 긁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지울 거니까 하지 마. 내가 하겠다고.” 짜증을 억누르며 말했건만 그는 집요하게도 손톱을 긁었다. 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반복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그에게 또 한번 “하지 말라고, 내가 한다고 했잖아?”라고 버럭 화를 내며 그의 손에서 내 손을 뺐다.

한적한 버스가 덜컹거리며 도로를 달렸다. 어이없음과 황당함이 머릿속에 뒤섞인 채로 나는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차라리 내가 예민한 것이라 치부하는 게 나았다. 그러다 설핏 잠이 들었을까. 또 한번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떠보니 그가 또다시 내 손톱의 매니큐어를 조심스레 긁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살살.

그것이 발단이었다. 그는 매사에 편집증적인 집요함을 보였다. 그의 눈에 표적이 되는 것은 절대로 지나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내 감정은 하루에도 몇 번씩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했다.

그의 자취집에 처음 놀러 갔던 날 그의 방 스피커에서는 어떤 곡이 무심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듣다 보니 똑같은 곡이 반복되는 것 같아 나는 왜 자꾸 같은 곡이 반복되느냐고 물었고 그 역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나 이 곡 좋아해. 이것만 들은 지 며칠 됐는데. 왜~~에, 싫어?” 예의 그 특유의 말투로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건 변함없었다. “싫은 건 아닌데 좀 질리잖아. 앨범을 반복하는 것도 아니고 한 곡만 듣다니. 좀 그렇지 않나?” 그와 내가 있던 좁은 공간은 더운 열기로 가득했지만 스피커에서는 ‘봄이 오네’라는 노랫말이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봄은 지나간 지 오래고 언제 다시 올지 기약할 수조차 없는데, 지금 내 마음은 무덥기만 한데 그와 나 사이에는 막연하게 봄이 흐드러지고 있었다.

그의 행동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생각을 조금씩 내게 관철시켰다. 내 자취방에 놀러 올 때면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듣자고 강요했다. 자신의 음악 취향을 상대에게 관철시키는 것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한 곡만, 자신이 꽂힌 곡만, 들었다. 아무리 좋은 곡도 반복해서 들으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게 되는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의 서재는 꽤 질서정연하게 분류별로 책이 꽂혀 있었는데 내가 책을 꺼내 보고 그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에 꽂으면 귀신처럼 알아차리고 화를 냈다. A 작가와 C 작가 사이에 있던 책이 D 작가 옆에 꽂히기만 해도 제자리에 꽂지 않는다며 잔소리를 했다. 그 많은 책을 꽂은 순서대로 기억하는 것도 의아했지만 기막힌 건 책장의 책 높낮이가 어느 하나 튀지 않고 정연하다는 것이다. 먼지는 당연히 있을 리 만무했다. 그의 방은 언제나 정적이 흘렀다. 마치 모든 사물이 잠들어 있는 것처럼. 그 공간에서 반복되는 한 곡을 들으며 환희에 젖은 듯한 표정이라니.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떠보니
벗겨진 매니큐어를 긁고 있었다
“싫다”고 버럭 화를 내도
천천히, 살살, 또 긁는 그  

한 노래에 꽂히면 그것만 듣고
한 음식에 꽂히면 그것만 먹었다
그의 편집증적인 집요함 탓에
내 감정은 늘 롤러코스터를 탔다

어디 그뿐인가. 과자를 먹고 흘리거나 머리카락이 몇 개라도 떨어지면 소형 청소기를 손에 잡고 치우기 바빴다. 요리를 해서 먹고 나면 상대가 다 먹기도 전에 비워진 그릇을 하나씩 정리했다. “다 먹고 치우면 되잖아. 내가 치울게”라고 말해도 막무가내였다. 오히려 이런 내 말에 “왜~~에, 싫어. 지금 치울래”라며 특유의 목소리로 날 바라봤다.

“어머, 자기 책장이 이게 뭐야, 응? 순서가 하나도 맞지 않잖아”라고 말하기 무섭게 그는 이미 내 책장의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알아서 정리해주는 것에 대해 눈물나게 고마워야 하는데 내 마음은 이미 분노의 파도가 몇번이고 밀려왔다. 그렇게 몇시간이고 정리한 뒤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틀고 방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머, 자기, 방이 이렇게 깨끗해졌어!”라는 말이라도 기대했던 걸까, 그는 나를 보고 “왜~~에, 너무 깨끗해져서 그런 거야?” 하고 뿌듯한 표정으로 말하며 나를 바라봤다. 내가 해야 할 말들은 이미 차곡차곡 쌓여 무너지기 직전이라는 걸 그는 알 리 만무했다.

“더러운 것보다 낫지. 깔끔한 게 결혼해서 더 좋을지 몰라.” 너무 힘들다는 내 고민을 듣던 선배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그런 걸까.’ ‘어쩌면 내가 그보다 루즈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상한 건 그가 아니라 나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럼에도 참을 수 없었던 건 그가 꽂히는 게 음악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어떤 음식에 한번 꽂히면 똑같은 음식만 일주일 넘게 먹었다. 북엇국만 일주일 넘게 먹을 때는 그나마 나았지만 칼국수라든가 라멘 혹은 중국 음식에 꽂히는 날이면 참아왔던 인내심이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말보다 침묵의 시간이 늘어갈 즈음 순간순간 괜찮다고, 괜찮아질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던 나는 결국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내 삶은, 그리고 그에 대한 마음은 괜찮아지질 않았다. 누구나 한번쯤은 이별이라는 터널을 지나치게 된다. 앞으로 몇번의 터널을 더 지나야 할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매번 길고 어두운 터널만 통과하란 법은 없다.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 어느 소설의 마지막 문장처럼 나는 또 한번의 시린 진리를 깨닫고 또 다른 터널을 찾아가면 될 일이다.

서교동 이파네마 아가씨


혼자 마음속에 꾹꾹 눌러담은 은밀한 연애사나 소수만 아는 1급 연애 비밀을 love@hani.co.kr로 보내주세요. 못다 한 이야기나 뒤늦은 뒷담화도 환영합니다. 익명은 철통 보장 합니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토요판 연애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