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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0.04 20:00 수정 : 2013.10.31 11:31

mayseoul@naver.com


[토요판/연애] 짝사랑

▶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법한 짝사랑. 그 사랑이 친구의 친구라면 어떤 기분일까.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다는 노래 가사도 있지 않은가. 누군가는 우정보다 사랑이 중요하다고, 혹은 그 반대라고 말한다. 과연 잘못된 만남이라는 말이 맞기는 하는 건지 의문일 정도로 일상에서는 쉽게 벌어지는 일이다. 마음으로 애써 억누르려 해도 결국 곪아서 터지고 마는 사랑. 그 진부한 단어를 버리지 못하는 건 무엇 때문일까?

이번엔 얼음물이었다. 헤어지자는 말을 듣자마자 울먹거리며 테이블 위에 놓인 물잔을 내 얼굴에 들이부었다. 차가움에 미간이 찌푸려지긴 했으나 나란히 놓인 뜨거운 커피가 아닌 게 천만다행이었다. 역시나 이번 연애도 두 달을 넘기지 못했다. 내게 제대로 된 연애가 가능하긴 할까, 내가 바라는 이상이 너무 높은 걸까. 그럼에도 언젠가 만나게 될 ‘그녀’에 대한 생각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나타난 건 우연한 계기였다. 나는 이 우연을 운명이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오랜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내겐 고독과 외로움으로 점철된 일상이 반복되었고 그런 일상에서 기댈 곳은 텅 빈 블로그의 공백을 채우는 일이었다. 그녀는 블로그 이웃 중 한 명이었다. 음악 얘기로 말문을 트게 된 우리는 서로의 글에 댓글을 달기 바빴고 댓글이 달리면 실시간 채팅을 하듯 답글을 달기 바빴다. 답글이 바로 달리지 않으면 몇 번이고 블로그를 들락날락하고 그녀의 댓글을 기다렸다. 댓글과 댓글의 텀이 있을 땐 그녀의 공간을 차지하는 수백개의 글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그녀의 말들을 곱씹어 내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표현할 순 없지만 그녀의 글은 사람을 잡아당기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지적이면서도 서늘한 예술적 감성은 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그녀와 나는 취향이 같았다. 오히려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예쁜 모습만 보이려는 인형 같은 전 여자친구들과는 비교될 정도로 그녀의 지적인 생각들은 성적 매력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달랐다.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녀라는 존재는 점점 내 안에 스며들었다. 나는 해야 할 일을 망각한 채 그녀의 댓글을 기다리고, 그녀가 새로운 글을 포스팅하면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고 댓글을 다는 데 정성을 쏟았다. 어쩌다 올라온 그녀의 희미한 실루엣을 보고 그녀의 알몸을 떠올려보는 불온한 상상으로 미소 짓기도 했다. 나는 그녀라는, ‘대상 a’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달이 지났을까. 그녀가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댓글로 남겼다. 보자마자 핸드폰에 번호를 저장했다. 아니나 다를까 카카오톡에 뜬 그녀는 예뻤다. 먼저 연락을 해야 하나, 그녀가 왜 자신의 연락처를 남긴 걸까, 그녀도 내게 관심이 있는 걸까. 망설이던 나는 카카오톡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이글루스 K예요. P님 맞으시죠? 연락처를 남기셨길래 :)” 건조하지 않게 스마일 이모티콘 하나를 첨부한 게 너무 어려 보이진 않을까 걱정하던 찰나 그녀에게 답이 왔다. “응, 안녕. K?” 그녀는 오래전부터 알던 친구처럼 반말을 했고 잠시 어리둥절한 나를 예상이나 한 듯 “우리 말 놓자”고 연이어 문자를 보냈다.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초면부터 반말하는 모습에 기분이 상할 법도 한데 그렇지 않았다. 이미 나는 그녀라는 세계에 발을 담그고 첨벙첨벙 물장난을 치며 들떠 있는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블로그 이웃이었다
실시간 채팅하듯 답글 달다가
어느 날 날아온 이름과 연락처
실제로 만난 그녀는 예뻤다

그녀에게 고백하려던 찰나
그녀 친구 고백이 당황스러웠다
“왜, 잘해보지?”
그녀는 태연히 내게 말했다

그녀를 만나기 전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카톡 사진을 보면) 그녀의 얼굴은 예뻤지만 뚱뚱하면 어떡하지, 그녀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반대로 내가 그녀를 너무 마음에 들어 한다면. 이런 생각들로 잠을 설치고 약속한 전철역 앞에서 그녀를 만났다. 온라인상의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두려웠던 나와는 달리 환하게 웃는 그녀는, 한눈에 봐도 그녀임을 알 수 있을 만큼 캐릭터가 강했다. 짙은 눈썹과 큰 눈, 옅은 화장을 했음에도 이목구비는 뚜렷해 보였고 어깨에 흘러내린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은 검은 원피스와 조화돼 세련돼 보였다. 한눈에 봐도 예쁜 얼굴이었다.

그녀는 친구를 데리고 나왔다고 그를 내게 소개했지만 내 눈엔 오직 ‘그녀’밖에 보이지 않았다. 온통 그녀의 말밖에, 그 말을 내뱉는 그녀의 붉은 입술만 보였다. 나는 그녀를 마주하고 술잔을 무의식적으로 목으로 넘겼다. 술이 어찌나 달던지!

우리는 자주 만났다. 자주 만나는 만큼 내 마음은 그녀에게 기울어졌다.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 그녀가 읽는 책, 그녀가 보는 영화. 거부하려 해도 그녀의 취향으로 기우는 나의 감각을 한사코 거부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강하게 그녀에게 이끌렸다. 하지만 그녀를 만날수록 나의 상처는 커져만 갔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그녀는 필터를 거치지 않은 채 말들을 내뱉었고 직선적인 그 말들에 나는 적잖이 상처를 받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만날 때마다 오늘은 얼마나 상처를 받을까란 마음과 그녀를 만난다는 기쁨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그녀라는 우주가 뿜어내는 빛에 눈이 멀어 갔다.

황홀경이 생김과 동시에 나의 가장자리에는 불안이 싹트기 시작했다. 나의 취향은 사라지고 그녀의 취향이 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즈음,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았다. 그녀가 아닌, 그녀의 친구에게서.

그녀에게 고백하려던 찰나 나를 좋아한다는 그녀 친구의 고백은 적잖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그녀 친구, 그리고 내가 종종 어울리긴 했지만 그녀와 정반대인 그녀 친구가 내게 감정을 가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혼란스러운 나는 “××가 내게 고백을 했어”라고 무겁게 입을 열었고 그녀는 무심하게 “알아. 넌 어떤데?”라고 예의 그 태연함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코드가 같다고 다 사귀나? 이성적 호감은 없어.” “왜, 잘해보지?” 그녀는 무슨 의미로 내게 그런 말을 던지는 걸까. “내가 널 좋아한다면…” 말끝을 흐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예쁜 입술은 “복잡해지기 싫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오늘도 그녀의 블로그를 기웃거린다. 어떤 댓글을 달지, 그녀의 추이를 살피며 그녀의 그라운드를 배회한다. 언제나처럼 “나는 사랑하고, 그녀는 말이 없다.”

그녀라는 우주에 눈이 먼 삼십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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