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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0.18 19:40 수정 : 2013.10.19 07:48

[토요판/연애] 고3의 연애통

▶ 이분의 메일을 받고 한참 고민했습니다. “일단 수능부터…”, “대학 가면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따위의 대답은 너무 교과서적입니다. 다소 ‘꼰대’스럽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그녀를 잡으세요!”라는 답은 무책임해보였습니다. 고3이라고 사랑을 모르겠습니까, 어리다고 놀리면 안 되겠죠. 사랑도 공부도 최선을 다하시길.

나는 고3이다. 하루종일 앉아서 <교육방송>(EBS) 연계 지문 공부, 수학 문제 풀이, 과학 관련 공부를 하는, 수능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이과생이다. 이번 수능은 언어도, 수학도, 영어도, 과학 선택 2과목도 어느 것도 틀리면 안 될 만큼 치열한 경쟁이다. 그러나 나도 청춘인지라 사랑이 있었다. 그것도 꽤 길게.

처음 시작은 2011년 1월이었다. 우수한 학생들만 뽑아 오는 학교는 1월부터 학생들을 학교 기숙사에 머물게 하며 선행학습을 시켰다. 그때 그녀를 학교 매점에서 처음 봤다. 내 키보다 15㎝가량 작고, 하얀 단발머리의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뭘 사러 왔는지 잊을 만큼 눈이 탁 트였다. 영어로 표현하면 이피퍼니(epiphany), 그야말로 신의 현현이었다. 1월 한달 내내 그녀가 어디 있는지 찾았고 급식을 먹을 때도 길거리를 걸을 때도 내 눈에는 그녀만 보였다.

그런 생활도 잠시, 3월이 되자 바쁜 고등학교 생활이 시작됐다. 동아리 활동이 없는 나와 달리 그녀는 한 동아리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는 그녀이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그녀를 보고는 있지만 이름조차 모르던 나는 1학년 말의 수학여행에 이르러서야 그녀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벌써 꽤 유명했다. 뚱뚱하고 공부만 했던 내게는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기숙사형 학교인 우리 학교는 매달 말에야 귀가를 한다. 2학년 1월부터 줄곧 매달 말에 그녀에게 익명으로 전화를 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나에게도 그녀는 친절했다. 나는 계속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했고, 계속되는 익명의 고백에 그녀도 내가 누군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5월 말이 되었을 즈음에는 내가 누군지 알려달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전화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내가 누군지 실물을 보고도 아무 반응은 없었다. 그저 궁금했던 게 해소되는 느낌 정도였나 보다. 나는 번호를 밝히고 그녀와 문자를 하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내가 먼저 문자를 보냈다. 한시라도 그녀와 대화하고 싶어 자습이 끝나는 그때를 기다렸다. 공부도 손에 잡히지 않았던 5월, 그녀가 문자에 답장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

놀랍지는 않았다. 솔직히 같은 동아리의 그는 키도 크고 잘생기고 성격도 좋았다. 나에게는 커다란 벽이 나타난 느낌이랄까. 슬펐다. 나는 한없이 작았다. 나는 한 마리의 물고기에 불과했던 것일까. 아니라고 끝없이 부정해 보아도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는 책임을 외모와 성격에 돌렸다. 모든 것은 내 탓이라고 한없이 자책했다. 공부가 손에 잡힐 리 없었고, 1등급으로 가득하던 모의고사에 2, 3등급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는데도 그녀 생각이 났다. 나는 나 자신을 단장하기 시작했다. 머리 스타일을 바꾸고, 전혀 관심없던 옷을 사고, 운동을 하고 미친 듯이 나를 바꿔 나갔다. 그렇게 2학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가 공부를 하기 위해 찼다고 했다. 나는 결심했다. 겨울방학에 집에 갔다. 170㎝에 80㎏. 10㎏이나 뺐는데도 여전히 몸은 무거웠다. 한달간 하루에 주먹밥 하나만 먹으면서 떨어진 성적을 올리기 위해 미친 듯이 공부했다. 힘들 때면 지갑에 몰래 넣어 놓았던 그녀 사진을 보았다. 눈물이 흐르는 고3 직전의 성장통이었다.

3년 전 매점에서 처음 보았다
그야말로 신의 현현이었다
뚱하고 공부만 하던 내게
기 많은 그녀는 먼 존재였다

6개월 전 고백을 했지만
“엮이고 싶지 않다”는 답
길고 긴 여정이 끝난 것일까
나에게 남은 건 뭐지?
그동안 못 한 공부는?

대망의 2학년 말 스키캠프에 참여하러 학교에 돌아왔다. 몸무게는 68㎏까지 빠졌다. 친구들이 말라 보인다고 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보였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녀를 미친 듯이 갖고 싶었다. 방학이 끝나고도, 3월 나만의 사랑을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지만) 계속했다. 새벽 4시30분에 일어났다. 공부를 하다가 학교 문이 열리는 6시20분이면 몽쉘 하나를 들고 그녀의 사물함 앞으로 뛰어갔다. 6시40분에 기숙사로 돌아와 점호를 받고 나면 그녀가 행복한 미소로 하루를 보내기를 기도했다.

한달 뒤 지나가는 여자아이에게 그녀를 불러달라고 했다. 수능 끝나고 만나달라는 말을 하려고. 그녀를 그렇게 가까이서 보기에는 처음이었지만 떨리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 당당하게 말했다.

“너 주말에 시간 돼?” “왜?” “나랑 밥 한번 먹을까 해서….” 그녀는 “우리 고3이잖아…”라고 말하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내가 할 말이 있어서 그래.”

그녀는 그냥 지금 얘기하자고 했다. 간단하게 전했다. 지금까지 내가 너무 많이 귀찮게 했을지도 모르지만 수능 끝나고 보자고. 그녀는 그냥 망설이다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사물함에 넣어 놓은 거 너지?” “어….” 그렇게 끝난 것이 첫 대화다.

소문이 돌았다. 너무 웃으면서 대화했나. 그녀는 그런 소문이 견딜 수 없었나 보다. 그녀가 나를 불러 세웠다. 교실 책상 어딘가에 있는 낙서를 말했다. 나는 그저 몰랐다고만 대답했다. 그녀는 말했다.

“미안한데, 이런 일로 너랑 엮이고 싶지 않아. 그리고 수능 끝나고도 보고 싶지 않다.”

그렇게 비수는 꽂혔다. 끝난 것인가. 정말 끝난 것인가. 그렇게 길고 길던 3년의 여정이 끝난 것인가. 남은 것은 뭐지? 그동안 하지 못한 공부는? 괜찮다고 한없이 나를 위로했지만, 내 숨은 거칠고 빨라졌다. 수능을 잘 보자, 수능을 잘 보자, 한 것이 어느새 10월이 되었다. 그 일이 있은 지도 벌써 6개월이나 지났다.

어느 대학교로 논술시험을 보러 간 아이들이 한 반에 20명씩이나 돼 텅텅 비는 교실에서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꼭 대학을 잘 가야지, 그녀를 얻어야지. 한심한 고3, 연애 경험 없는 한심한 찌질이, 나다.

19일 뒤 수능 치는 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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