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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는 어땠는지 궁금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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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연애 / 내 남자의 전 여자친구
▶ 연인에겐 그들만이 공유하는 뭔가가 있다. 둘만의 언어, 둘만의 세계. 이것은 헤어진 연인에게도 해당된다. 물론 헤어지는 그 순간 공유했던 모든 건 멈춰버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마모된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걸 깨닫는다. 남은 것은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믿는다. 다른 사랑이 시작될 때까지. 하지만 만약 이전에 공유하던 것의 잔재가 남아 있다면 어떨까. 뿐만 아니라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면? 사랑은 정말 다른 사랑으로 지워지는 걸까. 언뜻 보기에도 남매 같았던두 사람은 오랜 연인이었고
긴 연애의 종지부 찍은 지
얼마 안 돼 나는 남자를 만났다 “내가 사람 만들어놨지”
그녀는 무심히 그에 대해 말하고
“나 오늘 걔 만나고 왔어”
그는 그녀와 여전히 친하다
갑자기 현기증이 인다 “내가 사람 만들어놨지. 걔가 얼마나 별로였는지 알아?” 또다. 그의 이야기. 나는 반사적으로 긴장한다. 그런 나를 알아차렸는지 그녀가 웃는다. 아무 속내가 보이지 않는, 뭐든 받아들일 수 있다는 웃음. 지난 몇 년간 속았던 웃음이다. 항상 이런 식이다. 무심한 듯, 하지만 집요하게 그녀는 자신과 그의 관계에 대한 화두를 꺼낸다. 이어지는 그녀의 이야기들을 막을 도리는 없다. 갑자기 그녀가 내게 몸을 기울이며 묻는다. “그와의 섹스는 어땠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녀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움찔한다. 도발적인 눈빛. 까만 눈 한켠이 번쩍거린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앉아 아까의 대화를 곱씹는다. 정확히 말하면 여자의 도발적인 질문을. 나도 모르게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긴 한숨을 쉰다. 퇴근길 체증 때문인지 버스의 속도가 느리다. 옛날부터 이런 버스를 타면 괜히 생각이 많아졌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옛날, 그러니까 여자와 남자를 알게 된 그날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휴대전화가 울린다. 그다. 하던 작업이 마무리되었나 보다. 잠시 액정 속 그의 이름 석 자와 뒤에 하트를 바라본다. 이상하게도 여자를 만나고 오는 길에는 항상 그가 전화를 걸어왔다. 우연치고는 너무하다. 나는 전화기를 신경질적으로 핸드백 속에 쑤셔 넣는다. 남자는 여자의 오랜 연인이었다. 정확히 얘기하면, 힘든 시기를 함께 거쳐온 동지였달까. 사랑 이후엔 우정으로 만난다고 하지 않나. “두 분 참 닮으셨어요.” 그 둘을 처음 만나던 날 나도 모르게 이 말이 나왔다. 그들은 언뜻 보기에도 남매 같아 보였다. 그때 둘은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그 이유가 오랜 연애에 종지부를 찍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나는 그 남자를 만나고 있다. 벨이 세 번 울릴 무렵 느릿느릿 전화를 받는다. “나 일 끝났어.” 수화기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놀자.” 나도 모르게 손이 관자놀이에 간다. “나 집에 가는 길이야. 이미 버스 탔어요.”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다. “그렇구나. 그럼 난 게임이나 해야겠다.” 괜스레 기분이 시무룩해져 나도 모르게 툭 던진다. “나 오늘 걔 만나고 왔어.” 남자는 그제야 생각난 듯하다. “아아 맞다, 걔 만난다고 그랬지. 어제 통화했는데. 걔 직장 옮긴다면서?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 참 말 안 들어.” 새삼스레 그들이 종종 늦은 시간까지 전화한다는 것이 떠올랐다. 같은 집전화기를 가입해 무제한이란 것도. 나도 모르게 말투가 날카로워진다. “지금 직장이 문제야? 걔 또 나한테 막말했어.” 속사포같이 아까의 기분을 쏟자니 점점 비참해진다. 이건 지독한 화풀이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수화기 너머 남자의 침묵만큼 무거운 승객들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다는 걸 깨닫는다. 얼굴이 달아올라 서둘러 엉뚱한 정류장에서 내린다. 한숨이 푹푹 나온다. 남자가 말을 잇는다. “걔가 좀 그런 면이 있지. 근데 다른 뜻은 없을 거야. 알잖아, 걔 쿨한 거.” 과연 그럴까. 나는 잘근잘근 입술을 깨문다. 그는 항상 그녀를 과대평가했다. “네가 신경쓰는 게 뭔지는 알겠는데, 난 아무 감정 없어. 걘 그냥 편한 친구 같아.” 남자는 그러지 말고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다시 한번 얘기했다. 나는 반쯤 상한 사과를 안은 기분으로 택시를 잡는다. 그의 집은 한 시간 거리에 있었다. 방은 스케치가 그려진 종이들로 엉망이다. 남자는 그사이 방을 치우지 못했다며 허리를 굽혀 그것들을 줍는다. 컴퓨터 화면에는 게임이 한창 진행중이다. 그의 방에 오도카니 서 있자니 문제의 전화기가 눈에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는다. 시선을 돌리니 여자와 ‘공구’(공동구매)했다고 자랑하던 앤티크 스탠드도 보인다. 여자는 이별 뒤에도 물건을 사면 항상 남자와 나누곤 했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남자는 그녀의 취향에 열광했고 스펀지처럼 흡수되었다. 청소를 마친 그가 작은 접시에 간식을 내왔다. 그녀가 좋아하는 카스텔라다. 얼마 전 여자가 여행 갔다 사다 준 붉은 스웨덴 그릇과 거기에 놓인 작은 티스푼을 보자 나의 기억력이 저주스러워진다. 그녀는 항상 포크 대신 티스푼으로 빵을 으깨 먹곤 했다. 갑자기 현기증이 인다. 이 사실을 남자는 모르는 걸까. 그는 그의 하루를 얘기하고 있다. 이제 보니 말투도 같다. 웃을 때 올라가는 입꼬리마저도. 더 이상 앉아 있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전화기가 울리지만 받지 않고 익숙한 골목에서 낯선 도로에 다다를 때까지 달렸다. 머릿속에서 내내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최초의 게임은 검은 화면에 작고 하얀 점을 주고받는 공놀이였어. 그 점을 보고 이것은 공이고 이것은 사람이야 하면서 가상체험을 즐기게 되었지.’ 그는 진지하게 말하곤 했다. ‘여기서 재미있어져. 게임은 흔히 게임 오버가 되면 끝난다고들 생각하지. 난 달리 생각해. 게임은 우리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아. 어느 한쪽에서 기권을 선언해도, 화면이 꺼져도 그 영향은 지속돼. 일종의 여운이랄까? 우리가 단순히 받아들이는 그 이상으로 깊숙이 들어온다는 거지.’ 숨이 턱까지 차오르지만 멈추지 않는다. 갑자기 그의 말은 왜 떠오른 걸까. 어쩌면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그들의 인연은 화면 속 게임의 공놀이였던 걸지도 모른다. 끝나도 끝난 것 같지 않은, 끊임없이 주고받는 공놀이. 그리고 나는 화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들어갈 수 없는 타자이고. 문득 그들의 이야기는 나에게 작은 단초를 남긴다. 어쩌면 우리 모두 보이지 않는 가상현실, 보이지 않는 끈들을 알게 모르게 이어가고 있다고.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 사람과도, 끝남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도. 더러는 지루하다 손가락질하고 어떤 이는 스스로가 그렇지 않다 자부한다. 하지만 과연 그 누가 관계의 진정한 끝을 단언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망원동 땅콩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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