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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연애 / 모태솔로의 소개팅
서른셋. 나는 모태솔로다. 내 몸에 어떤 하자가 있다거나 성격에 결함이 있어서 연애를 못 했던 건 아니다. 대학교 때 연애 비슷한 걸 했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졸업 뒤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러 번 했던 소개팅은 이런저런 이유로 번번이 실패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삼십대 중반을 향해가는 나이가 되었다. 전문직에 종사하긴 하지만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 흔한 남자친구도 없으니 불안감은 하늘을 치솟는다. 그리고 이런 말 하기엔 부끄럽지만 나는 그 흔한 키스조차 해보질 못했다. 요즘은 서른 넘은 여자가 성 경험이 없다고 하면 남자들도 부담스러워한다던데. 결혼한 친구들, 이제는 학부모가 된 친구들마저 수없이 충고한다. 누구든 만나보라고. 나도 그러고 싶다. 남들 다 하는 그 ‘흔한’ 연애가 나에게는 자격증 시험보다도 어렵다. 그리고 이젠 연애만 할 수도 없는 나이가 돼버려 아무나 만날 수도 없다. 결혼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니까. 삼십대 중반 다 돼가지만
아직 키스조차 못 해봤다
누구든 만나보라고 하지만
마음이 움직이질 않는다
책과 개 이야기 잘 나눴지만
나는 이번에도 때 묻지 않은
새 옷처럼 고이 반환되었다
연애가 시험보다 어렵다
주말. 전화벨이 울렸다. 지난주 회사 선배로부터 소개받은 그 남자였다. 갑갑하게 조여오는 마음을 모른 척하고 일단 수화기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씨, 우리 오늘 만나기로 한 거 잊지 않으셨죠? 이따 6시에 거기서 봬요. 아 참, 밤부터 비가 올지도 모른다니 우산 꼭 챙기시고요.” 이번 소개팅 남자도 상냥한 말투에 배려가 묻어나는 좋은 사람 같았다. 지난 소개팅들을 돌이켜보면 상대 남자는 대부분 선량한 인상에 훌륭한 매너를 갖췄으며 어딘지 모르게 수줍음을 많이 타는 이들이었다. 모태솔로한테 플레이보이나 마초 성향의 남자는 첫 연애 상대로 버거울 거라는 주선자들의 배려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나는 공들여 화장을 한 뒤 어제 백화점에서 새로 산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아직 그대로 붙어 있는 가격표가 겉에서 안 보이도록 안으로 말아 넣는 찰나, 신경이 살짝 날카로워짐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어젯밤 붙이고 잔 마스크팩 덕택에 한층 환해진 피부를 확인하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는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 그대로였다. 목소리에서 느껴졌던 따뜻함과 약간의 수줍음 타는 듯한 성격마저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가 예약해놓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2차는 내가 대접하겠다며 커피를 마시자고 제안했다. 커피숍에서 우리는 서로를 탐색하는 대화를 꽤 오랜 시간 나눴다. 마침 독서라는 취미와 반려견을 키우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한 그와 나는 잠시도 어색한 침묵을 허락하지 않은 채 대화를 자연스레 이어나갔다. 사랑의 신 에로스가 돕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그만 흥분해서 그에게 이런저런 질문들을 했다. 속사포처럼 계속되는 질문 공세에도 그는 성심성의껏 잘 답해주었다. 중간중간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게 수줍어하는 그의 성격 때문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번 소개팅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훨씬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성황리에 마쳤다. 난 확신했다. 그와 내가 나누던 농밀한 대화의 온도를. 집으로 돌아와 소개팅을 주선해준 선배 언니에게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누구보다도 나의 소개팅 후기를 기대하던 그녀였다. 선배한테 그분한테서 연락이 왔는지 물어봤다. 얼마 뒤 ‘아니, 아직’이라는 메시지가 당황스러워하는 얼굴 표정의 이모티콘과 함께 도착했다.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최대한 그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니 맘이 한결 편해졌다. 빗길에 차가 막혔을 수도 있는 일이고, 집에 들어와 강아지가 말썽 부려놓은 걸 뒷수습하느라 피곤해서 잠들었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난 어느새 배려 넘치는 사람이 되어서 그를 변호해주고 있었다. 선배는 내가 상심했음을 눈치챘는지 그한테서 연락이 오는 대로 알려주겠다며 대화방을 나갔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났지만 선배에게선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는 내가 싫은 걸까. 내 앞에서 수줍은 듯 지어 보이던 미소는 뭐였지.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테이프를 거꾸로 감듯 시간을 되돌려 남자를 처음 만났던 이틀 전을 떠올렸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건지 분석이 필요했다. 약속 장소에서 만나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어색하지만 최대한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초반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저녁식사를 하는 중에도 괜찮았다. 깨작거리지도 않았고 특별한 실수를 한 것 같진 않았다. 그럼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혹시 2차로 커피숍을 가는 도중? 나는 식사 때의 좋았던 분위기를 이어나갈 겸, 나름 매력도 발산할 겸 가볍게 그의 팔짱을 꼈다. 흠칫 그가 놀라는 것 같았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고작 팔짱 낀 것 가지고 무슨 유난을 그렇게 떠느냐고 피식 웃을 수도 있겠지만, 모태솔로한테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여기까지는 별 특이사항이 없음을 확인하고 시간을 그다음으로 돌려 계속해서 기억을 더듬어 나갔다. 커피숍에 앉아 우리는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식사를 하는 자리에선 그가 하는 일에 대해, 이 자리를 마련해준 선배와의 관계, 최근에 본 영화 등에 대해서 간단히 얘기했을 뿐 정작 그에 대해서 알게 된 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 취미 얘기가 나왔고, 우리는 공통적으로 독서를 좋아하고 반려견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나는 너무 반가운 마음에 낯선 남자와 소개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책과 개에 대한 얘기를 쉼 없이 했다. 주로 읽는 분야가 무엇인지, 개 훈련은 어떻게 시켰는지, 사료는 뭘 주는지 주절주절 쓸데없는 질문들만 퍼부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그가 언뜻 보이던 어색한 표정의 의미가 분명해졌다. 그것은 수줍음이 아니라 불편함 때문이었고, 처음 만난 나를 위한 배려와 인내의 표시였던 것이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괴감마저 들었다. 야속하게도 새로 산 원피스는 구김도 가지 않았고 가격표도 그대로 붙어 있었다. 씁쓸한 맘으로 쇼핑백에 옷과 영수증을 아무렇게나 집어넣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나는 이번에도 새 옷처럼 때 묻지 않은 상태로 고이 반환되었다. 망원동 꽃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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